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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년 10월 4일] 마음을 바꾸라!
  • 청지기
    조회 수: 1990, 2009-10-04 19:59:19(2009-10-04)
  • 예수님은 오늘도 늘 하시던 대로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주요 사역 중의 하나는 가르침이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시고자, 하느님 나라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시고자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가르치셨다.

    오늘은 무엇을 가르치셨을까?

    예수님을 대적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혼에 관한 질문을 던진 것을 보니
    아마도 예수님이 가르치신 교육 내용은 ‘행복한 가정이 어떻게 세워지는가?’를 가르치지 않으셨을까?

    에페소 5장, 6장에 나오는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를 가르치셨을 것 같다.

    여러분의 가정은 행복한가?
    여러분의 가정은 성경의 원리대로, 하느님의 말씀대로 세워진 가정인가?
    가정을 통해서 천국을 경험하고 천국을 확장하고 있는가?

    대답하지 않아도 안다.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적지 않은 가정이 내면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주님이 ‘행복한 가정 세미나’를 허락하셨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을 때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 - 끄덕! 당연한 것 아닌가?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헌신 - 무슨 말? 여자가 감히 뭐라고...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 - 당근이지... 십계명에도 있는 걸...
    부모가 자녀를 주님의 정신으로 교육하라? 무슨 말?
    자녀는 내 맘대로 하는 것 아니야?

    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질문한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합법적인 것인가?’하는 이 질문은
    1세기 유대교 안에서는 질문거리도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남편이 아내를 마음대로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질문은
    헤롯이 아내를 버리고 동생 아내를 취한 것을
    비판한 세례 요한의 죽음을 염두에 둘 때
    예수를 시험하고자 하는 질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께서 이혼을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한다는 것 자체로
    세례 요한의 편에 서는 정치적인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흔히 기독교인들이 갖는 생각 중에 정교분리라는 사고가 있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 땅의 삶은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다.
    예수가 이혼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면
    헤롯을 비판한 세례 요한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이 되고
    이는 곧 헤롯을 반대하는 입장이 되어 버린다.

    기독교가 정치권력을 잡고 이용하고자 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하지만 성경의 원리에 따라 하느님의 공의를 세우고자
    제도를 개선하고 바른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도록
    기도하고 행동하는 것은 신앙적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인용하며 헤롯의 행위가 합당하다고...
    곧 자신들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창조질서로서 이를 반박한다.
    마르코 10:6-9,

    예수님의 가르침의 목표는 창조질서의 회복에 있다.
    즉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이 땅에 이루어져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에 있다.

    창조질서에 따라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렇다.
    모세의 율법은 너희가 아내를 버리라고 명한 법이 아니다.

    ‘너희가 마음이 굳어질 대로 굳어져서’
    아내를 버릴 경우에라도 이혼 증서만은 반드시 주어서
    그녀를 간음에 의한 죽임으로부터 보호해야한다는 것이
    모세의 율법의 의도라는 것이다.

    완악해진 인간에 의해 버림받아 죽임에 처하게 되는 생명을
    보호하고 살리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모세의 율법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성경은 오늘 우리로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보게 한다.
    ‘너희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마르코 10:5)

    완악함 ; 주로 하느님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아내에 대한 잔인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대한 반항을 가리킨다.

    사람이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자기 욕심과 생각에 따른 자기 뜻대로 사는
    모든 태도가 완악함이다.

    완악한 사람들은 창조주 하느님의 뜻이 분명함에도
    상황에 따라 그 기준을 변경시키면서 자신들의 삶을 합리화해 왔다.

    포스트 모던니즘, 다원주의 시대라고 하는
    21세기의 대표적인 특징이 바로 이것이다.

    절대적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다.
    각자 자기 생각이 옳다고 하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과 가치관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전도서 1:9, 지금 있는 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이요, 지금 생긴 일은 언젠가 있었던 일이라. 하늘 아래 새 것이 있을 리 없다.

    성경에 보면, 그 실례가 나온다.
    판관기 17:6, 그 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사람마다 제멋대로 하던 시대였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하느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기 소견대로 산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것 같지만,
    이내 곧 무질서와 혼란으로 그 삶을 파괴시켜 버리고 만다.

    운동경기에는 규칙이 있다.
    룰대로 진행되지 않는 운동 경기를 상상해 보라!
    심판의 호각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경기는
    이내 아수라장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도 룰이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그 룰이다.
    하느님의 외침에 사람들은 삶을 멈추고 돌아서야 한다.

    그런데...
    완악한 사람들은 하느님께 반항하고 그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욕심에 따라 자기 소견대로 살아간다.

    가정의 파괴...
    사회질서의 파괴....
    자연의 파괴...
    이 모든 것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의 완악함에 있다.

    이 마음을 바뀌어야 한다.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마음’으로(마르코 10:15)

    완악한 마음은 연약한 자들을 무시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여자와 아이들은
    계수에도 들지 못할 정도로 무시되었다.
    제자들에게도 이런 완악함이 있었다.

    주님은 사람들이 무시하던 어린이를 안으시고 축복해 주셨다.
    환대의 마음.... 기억하는가?

    이렇게 little child, 어린 아이를 안고 축복하신 것은
    당시 어린 아이들에 대한 통념을 무너뜨리신 것이다.

    어린 아이의 유치함, 무계획성, 미숙함, 이기심, 무례함을 인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의 절대의존성과 겸허함을 높이 평가하신 것이다.

    마태 18:3,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 아이는 참된 제자의 특성을 소유하고 있다.
    부모에 대한 겸손한 절대 의존이 어린 아이의 특징이다.

    어린 아이는 하느님의 선물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자기포기적인 신뢰성을 가지고 있다.

    제자도는 완악함을 버리고 어린 아이와 같은 순진함을 갖는 것에 있다.

    이 순진함이 예수님에게서 보여지는 거룩함이다.
    예수님은 온전히 하느님 아버지를 신뢰함으로
    자기를 포기하실 수 있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십자가에 자기를 내어주는 거룩한 희생!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완악한 죄인의 본성이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의 순진함이 내 안에 들어오게 된다.

    이것을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히브 2:10-11,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만물은 그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많은 자녀들이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로 하여금 고난을 겪게 해서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 사람을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거리낌없이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완악한 존재가 아니라
    어린 아이와 같은 순진함을 가진 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로 그 모든 완악함이 씻음을 받았고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여러분의 마음이 순진한 예수님의 마음으로 새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주님은 우리 안에 있는 완악한 마음은 죽어졌고
    어린 아이와 같은 순진한 마음을 지닌 존재임을 알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살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며 하느님 앞에 나아가라.

    히브리 9:14, 하물며 성령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흠없는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데나 죽음의 행실을 버리게 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하는 데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내주 하시는 성령님을 더욱 의지하라

    에제키엘 36:26-27,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주리라. / 나의 기운을 너희 속에 넣어주리니, 그리 되면 너희는 내가 세워준 규정을 따라 살 수 있고 나에게서 받은 법도를 실천할 수 있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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