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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제자교회대한성공회 제자교회

  • [2009년 9월20일]야고3:13-4:8, 마르9:30-37
  • 청지기
    조회 수: 2228, 2009-09-20 18:06:00(2009-09-20)
  •   지난 주일 우리는 우리가 내뱉는 말이 우리 인생을 결정하게 된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언어란 부패하고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이 악하기에 긍정적이고 창조적이고 선하고 아름다운 축복의 언어가 나오기 보다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이고 악하고 더러운 저주의 언어가 나오게 된다.
      인생이란 내뱉어지는 말 그대로 되어져 가기에 우리의 마음이 바뀌어야  언어가 바뀌게 되고 주님이 예비하신 좋은 날,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멋진 인생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간단한 처방을 내려주셨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생각하다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 그분의 나의 주되심, 주님이 하신 말씀들이 생각된다.

      이렇게 예수님을 생각하면 할수록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성령이 시키는 새로운 언어-축복의 언어, 생명의 언어,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언어, 선하고 아름다운 말들을 하게 되면서 아름다운 축복의 인생으로 전진하게 된다고 했다.

      예수님을 생각하는 한 주를 보냈는가?
      아니면 세상 걱정으로 근심하는 한 주를 보냈는가?

      지난 한 주 예수원에 다녀왔다. 왜 다녀왔는지는 수요예배 잠시 나누겠다. 예수원에 가면 삼종기도를 한다. 아침, 점심, 저녁 세번 종을 치면 잠시 멈추어 서서 기도를 한다.

      삼종기도를 드리면서 힌트를 얻었다. 우리도 도시에서 삼종기도를 드리면서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다. 핸드폰 알람을 맞춰놓고 울릴 때마다 2-3분 멈추어 서서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지난 한주 예수님보다는 세상 걱정, 내 인생의 걱정과 두려움으로 살아왔다면, 혹 누군가를 향한 미움이나 시기의 마음이 있다면 이 시간 십자가 앞에 내려놓기를 바란다.

      믿음이란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주님의 뜻이 최선이기에 나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생의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짊어지고 허덕인다. 이 시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이 주시는 안식으로 우리의 삶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찬양 한 곡 부르고 개인기도의 시간을 잠시 갖자.
      ‘주님 보좌 앞에 나아가’

      주님은 말씀하셨다.
      마래 11:28-30,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이 시간 내가 짊어지고 있는 인생의 모든 문제 - 학생들은 학업의 문제, 청년들은 미래의 문제, 장년들은 여러가지 인생의 문제들을 주님 앞에 다 내려놓고 주님이 주시는 평화, 소망, 확신으로 회복되기를 축복한다.

      오늘 본문으로 가보자. 오늘 본문에 관한 설교는 오후 견진성사예배 때 혹 주교님이 다시 해 주실지도 모른다. 주교님이 워낙 좋은 설교가이기에 더 좋은 말씀은 주교님으로부터 들으시면 좋겠다. 나는 간단하게 묵상을 나누도록 하겠다.

      성경은 여전히 마음을 다룬다. 사람들과 갈등하고 다투게 되는 것도 다 내 마음이 원인이라고 한다.
      야고보 3:14.

      스스로 자기를 높게 생각하고 남을 낮게 여기는데, 그것과 일치되지 않는 상황에 부딪치게 되면 마음이 불편하고 화가 나고 사람들과 갈등하고 심지어 분란까지 있게 된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도 다투고 있다. 싸움의 원인이 ‘누가 더 높은가?’였다. ‘내가 너보다는 높지... ’라는 자기 마음의 생각이 인간관계에 갈등과 다툼을 준 것이다.

      홈페이지에 루시아 자매님이 여기에 관련된 좋은 글을 올려주셨다.

      <가난할 때, 힘이 없을 때는 분노하지 않는다. 아니 분노할 수 없다.
       졸병이 분노하는 것을 보았는가? 이등병은 분노하지 않는다.
       "제 생각에는..."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이등병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지금은 바빠서..."  이런 말은 있을 수 없다.
       이등병 주제에 뭐가 바쁜가?
       바로 이 이등병 같은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최고가 된다.
       내 생각이 없고, 바쁜 것이 없고, 오직 주님이 명령하시면 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약할 때는 순종이 잘 된다. 가난한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만 힘이 생기면 달라진다.
       교만해진다.
       그런데 그 교만의 양상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가? 바로 "분노"로 표출된다.
       "내가 누군데 감히 네가..."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말이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도 드러난다.

       연애할 때는 서로 겸손하다.
        왜? 서로의 사랑을 받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혼하고 난 다음에는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하는 교만이 솟아난다.  
        특히 결혼한 다음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함부로 하는 예가 많은데 바로 이런 경우이다.
        교만해져서 그런 것이다. 자기 뜻대로, 멋대로 조종하려고 한다.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는다. 교만하기 때문이다.
        화를 내는 것은 분명히 교만이다.
        자신이 화를 내는 상대보다 더 힘이 있는 권력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다.>

      다투지는 않지만, 싸움까지는 일으키지 않았지만, 누군가 갈등하고 있는가?
      남 탓할 일이 하나도 없다. 자기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이런 마음을 성경은 단호하게 심판한다.
      야고보 3:15,

      이런 마음 역시 예수님을 생각하면 이 마음이 치료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 - 스스로 꼴찌가 되어 섬기는 자가 되라.
      겸손한 마음으로 섬기는 삶을 가르쳐 주신 주님은 말씀하셨다.
      마르코 10:45,

      예수님은 말씀 그대로 모범을 보여 주셨다.
      제자들 앞에 스스로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자기의 생명을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 겸손한 섬김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고 섬김은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상대방이 어떠한 사람이든지 그 사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마르코 9:37,
      받아들인다는 말은 웰컴. 리시브, 어거지가 아니라 환영하는 것이다.
      코 찔찔 흘리고 때 묻은 손과 발을 한 고아와 같은 이런 어린 아이를 기꺼이 환영하는 것이다.

      이것을 환대라고 말한다.

      누군가에게 환대 받아본 경험이 있는가?
      진심으로 환영받고 섬김을 받았을 때 어땠는가?

      내 마음이 회복되고 내가 살 가치가 있다고 여겨질 정도로 좋다.

      프리 허그 운동.

      교토 전도여행때 이런 경험을 했다.
      일본성공회 교토교구 성루가교회 야마모트상이 있는데, 일본이 보여주는 겉모습의 친절이 아닌 마음으로 우리를 환영하고 섬겨주었다.
      자기 차를 내어주고, 60대 중반의 환자가 직접 차를 몰고 안내해 주고, 식사 대접하고, 가이드해 주고, 기꺼이 무릎을 끓고 기도를 받고, 선물도 주고, 배웅까지...
      그 모습이 마음 깊이 고마움으로 남아 있고 또 만나고 싶은 사람이다.

      이런 환대가 내 안에서 나와야 하는데....
      내 안에 이렇게 겸손한 사랑의 마음이 부족하다.

      이런 환대가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데 어떠한가?
      한참 부족한 것 같다.

      ‘환대’를 묵상하다보니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마태 5:40-42의 산상수훈이다.

      ‘오리를 가자며 십리를 가라.’
      대개는 ‘무슨 소리야 내가 왜 너 말대로 해야 돼?’라고 반응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신앙이 있는 사람은 오리까지 가 주겠다. 그런데 환대의 사람은 그 너머 십리를 동행한다.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도 생각났다.
      베드로는 7번까지라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70번씩 7번이라고 하신다.
      우리들 대부분은 삼세판이다. 그래도 믿음이 있다면 7번까지 참겠다. 환대의 마음은 70번씩 7번까지... 무제한이다.
      용서하고 용납하고, 용서하고 용납하고.. 또 용서하고 용납하고... 또 용서하고 용납하고...  또 용서하고 용납하고.... 또 또

      우리가 내는 헌금이 생각났다. 아주 현실감있게 다가올 것이다.
      헌금은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주님의 위대한 교회를 유지하는데 사용된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선교하는 일에 사용된다.

      비록 돈이지만, 거기에도 환대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과도 같고 생명을 살리는 존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초신자일 때는 대개가 월정헌금을 한다. 믿음이 생기면 십일조를 한다. 그런데 환대의 마음이 있는 사람은 십의 이조, 십의 삼조... 선교구제헌금까지도 힘껏 드리고 또 은밀한 중에 나눈다.

      고후 8:1-5,

      이런 섬김, 이런 환대가 나와 우리 공동체 있기를 기도하고 축복한다.

      결론은 어떻게 이런 겸손과 환대의 섬김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37절을 보자.
      예수님은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자가, 환대하는 자가 나를 받아들이고 나를 보내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너희의 환대 정도가 나를 받아들인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말이다. 즉 예수님을 받아들인 만큼, 하느님을 받아들인 그 만큼 환대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를 얼마나 받아들였는가? 나를 보내신 이를 얼마나 받아들였는가?’
      
      이 말은 곧 ‘얼마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아 아는가?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가?’라는 질문이다.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 나를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이시고자  나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느님.

      실제로 예수님의 대속의 사랑, 하느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은 아는 사람은 내가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내가 하느님께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믿음이란 내가 주님을 받아들이고 환대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받아주셨다는 것, 나를 환대해 주셨다는 것, ‘이런 어린 아이’같은 나를 주님께서 환대해 주셨음을 믿는 것이다.

      아주 유명한 찬송가를 지은 아이작 왓츠라는 사람이 있다.
      키는 서양 사람으로서는 난쟁이를 겨추 면할 정도인 150센티미터에 불과했다. 게다가 눈도 작고, 피부도 창백한 잿빛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자기가 벌레 같은 존재라고 늘 생각했다. 그러나 자기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살고 피흘려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자마자 그 은혜와 그 사랑에 감격해서 감동적인 찬송을 썼다.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박히셨으니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나 같은 죄인이 죄 사함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서 겸손의 섬김, 환대가 나온다.

      나는 주님께 환대 받은 용서받은 죄인임을 고백한다.
      이 시간 오직 성령님의 은혜로 십자가의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마음 깊이 깨달아 겸손히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그 누구든지 있는 모습 그대로 환대하는 사람이 되기를, 우리교회가 이런 예수님의 사람들이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한다.

      “오! 성령님 이 깨달음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얼마나 주님으로부터 환대를 받는, 죄사함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사랑을 받는 존재인지를 알고 감격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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