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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년 1월 27일] 요한1서 3:13-18, 루가 10:25-37 복의 통로 - 생명을 주는 삶 !
  • 청지기
    조회 수: 2993, 2008-01-28 14:06:31(2008-01-28)
  • 세상에 복이 되는 교회, 이웃에 덕이 되는 신자!
    행복하십니까?

    지난 주일에 우리는 하느님을 모르는 세상이 하느님을 알아 행복한 삶을 살도록 복음을 전하는 증인의 삶이 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라고, 이러한 증인이 되기 위하여 샘물, 눈물, 선물이 필요하다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각자가 ‘이웃에게 덕이 되는 신자’가 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덕이 된다는 말은 ‘세운다’, ‘살려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웃에게 덕이 되는 신자라는 말은 이웃을 살려내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내 이웃이 누구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이웃에게 덕이 되게 하는 삶인가’를 정립해야 합니다. 성경은 모든 크리스챤이 살아가는 삶의 지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줍니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네가 알고 있는 율법의 말씀 그대로 실천하면 살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율법이란 황금률이라고 불리는‘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율법학자는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여러분, 누가 여러분의 이웃입니까?
    이웃사촌? 예! 옆집에 사는 사람이 우리의 이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비유를 통해 알게 되는 이웃의 개념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만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마침 한 사제가 죽어가는 사람 곁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제는 그를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습니다. 얼마 후 레위 사람이 나타났는데피해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그의 옆을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서 그를 여관으로 데려가서 치료해 주고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며 간호를 부탁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이 비유를 마치시고 예수님이 질문을 던지십니다.
    36, “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물론 답은 세 번째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이에 다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율법학자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너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가?’를 물어 오십니다. 강도만난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 그들의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의 삶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느 시대나 강도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강도만나 사람들은 어둠의 권세에 의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육적으로는 사회적인 불의와 부패 속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강도만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이 시대 강도만난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 그들을 살리는 삶을 살아갈 때 ‘이웃에게 덕이 되는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강도만난 사람들을 살리는 방법은 나에게 있는 생명이 그들에게 흘러 들어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자신의 생명을 바침으로써 우리를 살려내셨듯이 나의 생명이 바쳐질 때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1서 3:16

    여러분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이 생명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예수님은 비유 말씀을 통해 어떻게 나의 생명을 흘러 보내어 생명을 살릴 수 있는지를 2가지의 방법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 시간을 내어 몸으로 하는 수고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그저 자기의 갈 길을 갑니다. 멈추어 서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을 위한 시간을 내지 않았습니다. 생명을 주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어 섰습니다. 그에게 가까이 가서 상처를 싸매주고 치료해 주었습니다. 축 늘어진 사람을 들어 올려 자기 나귀에 태우고 여관까지 데려갔습니다.
    그 다음날까지 시간을 지체했습니다. 자기도 바쁘고 가야할 길이 멀지만, 멈추어 시간을 내고 몸의 수고를 하는 봉사가 강도만난사람을 살리어 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봉사라고 섬김이라고 말합니다.
    시간을 내야지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내 몸으로 하는 수고가 있어야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내어 몸의 수고를 하는 것이 생명입니다.
    시간을 내어 몸으로 하는 수고를 통해 생명이 살아 납니다.

    효나눔센타의 자원봉사자회장 진인선사장은 봉사 시간이 무려 1000시간 가깝습니다. 이런 분들이 있기에 효나눔이 생명을 흘러보내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교회도 교회를 섬기는 많은 교우들의 섬김을 통해 자라나고 생명을 살립니다. 우리 교회에 이렇게 섬기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인해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모두 가던 길을 멈추고 시간을 내서 몸의 수고를 다함으로 생명을 주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돈이라는 것으로 자기 생명을 흘러 보냅니다.

    돈이 내 주머니에 있기까지 나는 그 돈을 벌기 위해 많은 시간을 노동했습니다. 그래서 돈은 생명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냈습니다. 당시 로마의 여관비가 1/32데나리온이었다고 합니다. 두 달 치의 여관비를 자기 주머니에서 감당합니다.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내어주는 것이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이웃을 위해 자기 주머니를 기꺼이 열지 않습니다. 자기 가족을 위해서는 자기 주머니를 열어 막대한 돈을 사용하지만, 한 치만 건너도 인색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생명을 살리는 종교이기에 돈으로 생명을 흘러보내는 일에 인색한 삶의 태도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오늘 시편이 그것을 말합니다.
    ‘야훼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좋아하는 사람',
    복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손이 잘 되고 부귀영화가 깃들인다는 기분 좋은 약속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 있는 사람에게는 영원히 기억되는 의로운 행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9절의 말씀입니다.나누는 삶입니다.

    성경은 자기 주머니에서 꺼내진 돈으로 사람을 섬기는 나눔을 강조합니다.

    루가 6:38,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 너희에게 안겨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다."

    주는 것의 최저 기준이 십일조입니다.
    신명기 14:22이하의 말씀을 보면, 매년 모든 소출의 십일조를 드리고 3년에는 한 번 더 십일조를 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성 안에 있는 나그네, 떠돌이,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십일조라는 최소한 기준으로 돈을 환원하도록 하여 생명을 살리자는 것입니다.
    예수원 설립자 대천덕 신부님은 십의 일이 구약의 법이라면 신약의 법은 십의 십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땅에 생명을 살리는 복의 통로로 세워진 교회를 세워가는 일과 이웃을 섬기는 일들에 주님이 주신 재물이 사용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신자들이 자기들의 것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놓고 서로 필요에 따라 썼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는 핍절한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복음으로 영혼을 살리고 돈을 나눔으로 육체를 살리는 전인적인 생명의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라기 3장 10절의 말씀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의 것을 도둑질 하는 것이라고 호통을 치십니다.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주님의 거룩한 일에 최소한 기준으로도 참여하지 않는 인색함과 자기 혈육만을 사랑하는 이방적인 삶에 대한 경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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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자기 시간을 사용합니다. 아무리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하여도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는 시간을 투여합니다.

    어머니들을 보면 온통 자기 생명을 아기에게 줍니다. 아기를 사랑하기에 잠을 자다가도 얘가 울면 깨우나 젖을 물리고 기저귀를 갈아주며 자기의 시간을 온통 쏟아 붓습니다. 이처럼 자식은 부모의 생명을 받아서 자라나고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시간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은 시간을 내어 가족과 함께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시간을 내어 주님과 함께 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시간을 온통 일하는데 사용합니다.
    그런데....자기 혈육에게만 생명을 주는 사람들을 봅니다. 크리스챤조차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가족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동물들도 하는 일입니다.

    무릇 크리스챤이라함은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기 혈육을 뛰어 넘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 자기 생명을 내어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 시대 강도만난 사람들-영적으로 죽어가고 또 실제 가난과 외로움에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줌으로서 그들의 생명을 살리는 복의 통로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생명을 주는 일을 꺼려하거나 두려워합니다. 철저한 자기헌신과 희생 그리고 일방적인 자기 손해만 필연적으로 수반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몸의 수고, 그리고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나누는 일은 물론 자기헌신, 희생, 손해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 생명을 바꾸어 주는 자의 생명이 도리어 더욱 맑게 정화되고 깊어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마치 옹달샘과 같은 것입니다. 날마다 솟는 샘물은 이렇게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주는 삶이란 타인을 위하기 이전에 먼저 나 자신의 생명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지름길임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생명을 주는 삶을 너무 거창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주는 삶은 가장 작은 데서부터, 일상생활부터 시작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드리는 친절한 미소로 인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크리스챤은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난 사람들이기에 그 사랑을 알고 예수님의 생명보다 더 큰 것은 없기에 더 이상 다른 것을 구하지 않고 이제 그 생명을 나누는 삶을 사는 존재입니다.

    이웃에게 덕이 되는 신자!

    하느님은 우리가 시간을 내어 몸의 수고를 다함으로,
    자기 주머니를 열어 십일조를 드리고 나눔의 삶을 살아감으로,
    이 시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강도만난 사람들을 살려내는 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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