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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년 11월 18일] 요한 20:19-23 평화대회에 즈음한 공동 설교문 - 평화의 복음
  • 청지기
    조회 수: 2549, 2007-11-20 14:48:50(2007-11-20)
  • 1. 세계성공회 공동체는 세계성공회주교회의인 람베드회의와 세계성공회협의회 총회를 통해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한국교회의 선교노력을 적극 지지 격려해 왔습니다. 그리고 2005년 영국 노팅엄에서 개최된 13차 세계성공회협의회 총회에서는 한반도의 평화위기 속에서 제출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한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습니다. 따라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동북아시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국가의 성공회 지도자들이 함께 남북한을 동시에 방문해서 한반도의 평화 통일과 동북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할 목적으로 11월 14일부터 20일까지 평화대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계성공회 공동체의 이런 관심과 노력에 감사하며, 이들의 발걸음을 인도하신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평화대회가 이 한반도에 평화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길을 예비하고 통일의 새 시대를 여는 역사적인 출발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오늘의 감사성찬례를 올리고 있습니다.


    2. 이 시대 이 땅에 사는 우리들에게 하느님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시어서 우리에게 오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의례를 거행하고 개인만 만족하고 마는 신앙인이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한반도에 보내시고 고난의 세월을 견디어 내게 하신 그 큰 뜻은 바로 평화의 사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못자국난 손을 우리에게 내미시며 일으켜 세우시려는 까닭은 우리에게 새로운 평화의 길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시자 제자들은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골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들은 살아있지만 살아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밝은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어둠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불과 3일전에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나타나시어서 하신 말씀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었습니다. 배신하고 도망간 것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기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주시는 평화는 어떤 평화이겠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평화는 안일이 아닙니다. 이들을 해치려고 하는 유대인들을 물리치고 평안하게 사는 그런 평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편안한 상태에서 자기만족을 하며 머물러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닙니다. 아마도 그런 평화를 바라신다면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나타나서 이들을 물리쳐 주셔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영원한 생명으로 말미암은 평화입니다. 도망가고 골방에 갇혀서 안주하는 그런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담대하게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그런 평화입니다.

      우리는 간혹 평화를 전쟁과 갈등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문제없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상태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단의 상황에서 안주하는 것은 절대로 평화로운 것이 아닙니다. 분단은 우리에게 죽음의 권세에 안주하도록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분단된 상황 속에서 평안을 찾는 것은 골방에 숨어서 문을 닫아걸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제자들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분단으로 인해 우리는 수많은 목숨을 잃어야만 했고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1994년 가을에 한반도는 핵전쟁의 위험에 처했었습니다. 미국이 북한 핵시설을 폭격하는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극적으로 카터 전 대통령이 김일성 주석을 만남으로서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미국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핵공격의 가능성을 내비쳤습니다. 그리고 북한은 작년에 핵실험을 감행했습니다. 분단된 상태에서, 그리고 평화가 항구적인 체제로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항상 민족 전멸의 파멸을 가져오는 전쟁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또한 분단은 남과 북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의 모든 삶을 왜곡하고 기형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새는 좌, 우의 날개로 납니다. 그런데 어느 한쪽의 날개가 성장하지 못했거나 건강하지 못하면 새는 날아갈 수가 없습니다. 보수가 있으면 진보가 있어서 상호 보완하고 견제하면서 사회가 발전해야 하는데 우리는 어느 한 쪽 아니면 안 된다는 극단적인 사고방식과 편견에 사로잡히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인도하시고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평화는 신앙적이고 영적인 것을 포함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영혼에 기쁨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때문에 어느 한 쪽이 승리해서 지배하는 것은 진정한 평화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물질의 풍요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은 소유와 지배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무엇으로 인해 기뻐하고 무엇으로 인해 슬퍼해야 합니까? 권력입니까? 물질적인 소유와 상실입니까? 명예입니까? 다들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의가 궁극적이고 본질적으로 중요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하느님의 의가 훼손된다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빈부의 현저한 격차가 있고 실직자들이 만연하고 직장이 불안한 상태에서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생태계가 파괴되고 마구 훼손된다면 엄청난 자연재해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심각한 공포를 유발하게 될 것입니다.

    사회적 편견과 이기심이 만연하고 끝없는 경쟁 속에서 긴장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이 역시 평화가 아닐 것입니다. 영혼에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바라는 통일은 정치적 군사적인 문제만이 아닙니다. 통일이 된 뒤 어떤 ‘정치가의 힘’으로 됐다고 생각하거나, 어떤 ‘군사력의 힘’으로 됐다고, 혹은 ‘경제의 힘’으로 됐다고 생각하면 통일 후에 생기는 문제가 훨씬 클 것입니다. 통일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정치세력이나 기업, 혹은 개인이 통일 기득권을 주장하며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는 모습이 펼쳐질 게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혼에 기쁨을 주는 참된 평화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로 북한 사회를 무너뜨리고 흡수하려고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독일의 통일을 바라본 많은 이들이 이러한 흡수 통일은 극심한 혼란과 엄청난 비용과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사랑하는 것보다 물질과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때문에 역사의 비극은 항상 사랑이 없을 때, 사랑할 자신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초래되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통일을 바라보고 평화를 가슴 절절하게 희망한다면 우리 자신의 영성과 생활을 돌이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평화와 통일을 수없이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굳건한 믿음과 노력이 있었는가를 돌이켜 봐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베짜타 연못에 38년 동안이나 누워있던 병자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오랜 세월을 앓아누웠던 병자에게 이런 질문을 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네가 정말로 낫기를 원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진심으로 낫기를 원한다면 일어나 가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병자는 치유되었고 그 오랜 세월 깔고 누웠던 요를 걷어들고 갔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확신입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믿음입니다. 인간은 미약하지만 신앙은 강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젠 다 틀렸다’고 절망하는 순간에도 신앙인들은 한 가닥의 믿음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배척하고 멸시하는 그 어떤 대상도 신앙인의 가슴으로는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성서에 예언자들은 시대의 징조를 먼저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먼저 아파하고 먼저 슬퍼했습니다. 그리고서 깨어 일어나 잠든 사람들을 깨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부르신 평화의 사도들입니다. 먼저 평화의 푯대를 향해 길을 열어야 합니다. 정치인들보다, 기업인들보다 먼저 가야 합니다. 어떤 이해관계 없이 참된 평화의 길을 먼저 닦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평화를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신앙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1980년대 후반에 아직 남북 교류가 원활하지 않을 때, 교회는 남북 교류와 평화통일의 길을 열었습니다. 세계기독교 교회협의회의 도움으로 스위스 글리온이라는 곳에서 김성수 주교님을 비롯한 남쪽 기독교 대표들과 북쪽의 대표들이 만나 해마다 평화통일 기도주간을 실행하기로 결정하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그 결과 오늘의 남북교류 협력의 물꼬를 트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한 믿음으로 기도하고 협력한다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평화와 통일의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어두운 먹구름이 하늘을 가려도 태양은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희망의 빛은 반드시 세계사에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가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줄 것입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태5:9)




    * 88년 김성수 주교님을 비롯한 남한 교회 대표11명과 북쪽 교회 대표 7명이 스위스 글리온에 모여 합의한 평화통일을 위한 원칙은 다음과 같은 절절한 호소문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외세의 점령과 제국주의의 고통을 견디어 왔습니다. 그들은 동족상잔의 엄청난 파괴와 잔인한 전쟁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잘못 아닌 민족분단에 의해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오! 사랑의 하나님, 언제까지 남과 북의 동포들이 서로 원수가 되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그들이 서로 자유롭게 만나지 못해야 합니까? 언제까지 1천만 이산가족들이 서로를 찾지 못한 채 있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그들의 운명이 외세와 남들의 이념 때문에 좌우되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합니까? 언제까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인간의 존엄을 빼앗기고 살아야 합니까? 언제까지 자유와 정의와 평화에 대한 권리와 책임을 포기하고 살아야 합니까? 오! 주여 우리들의 부르짖음과 기도를 들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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