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대한성공회 제자교회대한성공회 제자교회

  • [2007년 10월 7일] 루가 17:5-10 하느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 청지기
    조회 수: 3457, 2007-10-08 14:21:22(2007-10-08)
  • 설교 후 신자들의 기도 시간이 있지만, 말씀을 나누기 전에 마음을 모아 합심으로 기도하고 싶은 부담감이 있습니다. 환우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선옥 님 - 중환자실에 계십니다. 욕창이 너무 심해 재활치료를 받지 못하던 중에 오랜 투병으로 어려움 가운데 계십니다. 의식이 있으신 터라 외롭기도 낙심 가운데 계신 것 같습니다.
    임의성 님 - 정신은 맑고 뚜렷하신데 객관적인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최진영 님 - 파킨스 병으로 많이 힘들어 하십니다.
    서미영 님 - 위암으로 항암치료 중이신데 이제 5차 항암 치료를 준비 중에 있습니다.
    전송월 님 - 위암 판정을 받으셨는데 워낙 연로하시고 약하시어 아무런 치료 과정을 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 밖의 육체의 연약함으로 고통받는 지체들이 많습니다.
    방인순님, 임용주님, 박은경자매, 김용란님 등 등
    이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치료하시는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하게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공동체 안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지쳐있고 낙심 가운데 있는 지체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믿음이 부어지기를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하느님을 예배하지 않는 영혼들 - 냉담자들, 장기결석자들, 불신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원하고 오늘 예배의 자리로 나오지 못한 지체들이 소 대신 예배를 선택하는 예배자가 되도록 절하게 기도합시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오늘의 본문 앞에 보면, 형제들을 결코 죄짓게 하지 말고 또 형제가 잘못했을 때는 무조건적으로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교훈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가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1절에서는 ‘제자들’이라고 했는데 5절에서 ‘사도들’이라는 표현으로 바뀌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죠? 왜 일까요?

    성경의 저자는 성령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표현을 이렇게 사용하실 때는 분명한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마르코복음 3장을 보면, 7절에 ‘제자’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14절에 가서는 제자들 중에 12명을 ‘사도’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사도로 삼으신 이유를 기록하기를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마귀를 쫓아내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심은 ‘보내어’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제자는 스승과 함께 살며 배우는 사람입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스승으로부터 듣고 배운 것을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 사도입니다.

    세상 속 일상의 삶에서 남을 죄짓게도 하지 않고 오히려 남이 잘못한 것을 하루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고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사도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심은 당신의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는 지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래서 사도라는 표현을 쓰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보고 듣고 배운 그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스스로가 너무 잘 압니다. 그렇게 살아갈 능력도 용기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이러한 기도에 예수님이 반응하시는 것이 우리의 기대와 너무 다릅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하늘로부터 불이 임하고 능력이 임하도록 예수님께서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안수기도 해 주셔야 할 것 같은데, 주님은 또 다른 말씀을 교훈으로 주십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된다.”

    겨자씨는 뭐 그리 신통해 보이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작은 씨앗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은 살아있고 자라나는 것입니다. 자라나면 능히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마태오 13장에서 예수님이 천국의 비유를 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1-32,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에 비길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밭에 겨자씨를 뿌렸다.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 싹이 트고 자라나면 어느 푸성귀보다도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

    믿음은 작냐 크냐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이 겨자씨만 할지라도 그 믿음이 살아있는 것이면 그것은 자라날 것이고 나중에는 능히 위대한 것-예수의 삶을 감당케 되리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믿음의 분량만큼 하느님께 순종하게 됩니다. 순종은 살아계신 하느님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더 크게 자라납니다.
    이렇게 믿음이 자라나면서 예전에는 꿈도 꾸지 않았고 도저히 기대도 시도도 하지 않았던 삶을 살아가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우리교회 한 형제가 간증하기를 직장에서 한 주 간 틀어박혀 새 제품을 실험하는데 계속 실패를 거듭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실험에 성공하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실험을 했더니 그 때 성공했다고 합니다. 동료들은 우연이라고 말했지만, 본인은 살아계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바로 그 믿음으로 계속 주님을 신뢰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가면 그 형제는 예전에는 결코 상상조차 못했던 거룩한 삶을 살며 위대한 하느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겨자씨 믿음의 법칙입니다.

    이 믿음에서 어떤 생각을 하는가가 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내 생각 가운데 불가능하다고 여기면 애당초 믿음은 작동될 수 없습니다.  가능하다는 긍정적인 사고를 하고 꿈을 꾸고 바라보면 그 가운데 전능하신 하느님은 일하시며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뿌리가 넓고 깊게 뻗어있어 뽑기 힘든 뽕나무가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겨지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도 하느님의 역사로 가능해 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꿈을 크게 꾸어야 합니다.
    사순절에 했던 하루 7번 화살기도 중, 이런 화살기도문이 있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이 모음은 주님의 은총 안에 있사오니, 모든 것이 잘 됩니다. 온갖 일이 다 잘 됩니다.“

    구두수선공으로 일하던 윌리암 캐리는 주님을 위한 꿈을 꾸었습니다. 비록 자신이 배우지 못한 노동자일지라도 주님을 위해 선교사가 되는 꿈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인도에 가서 무려 34개의 부족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하며 복음을 전파하여 인도를 변화시킨 위대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윌리암 캐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위대한 것을 기대하고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바로 이것이 겨자씨의 믿음이며 이 믿음이 있는 자들은 아무렇게 살수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거룩한 위대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제자가 살아가야 하는 삶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어떤 종이 농사일을 하고 양치는 일을 했는데,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주인은 피곤한 종에게 가서 좀 쉬라고 하지 않고 저녁 준비를 시키고 저녁 시중을 들게 합니다. 종이 이렇게 수고를 다하였어도 주인은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왜? 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교회와 세상 속에서 여러 일들을 감당하고도 이렇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이것이 바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인간적으로 너무 한 것 아니야?’‘신앙을 비참한 노예의식으로 전락시키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애인들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종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사랑하기에 상대방에 원하는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어 하는 자발적인 노예의식이 충만하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이 이러한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에 기초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주님을 위해서 종 된 의식을 가지고 섬깁니다.  

    오늘 종의 의무로 믿음을 가르치시는 주님의 말씀이 거슬리고 이런 저런 비판이 일어나는 분들은 십자가 앞에 깊이 머물러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는지를 돌아보십시오.
    우리의 구원은 죄로 인한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죄의 대가로 당연히 가게 될 영원한 형벌인 지옥으로부터의 천국으로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죄와 죽음의 세력인 사탄의 노예로부터의 하느님의 자녀가 된 구원입니다. 믿습니까?

    바로 이 구원의 확신이 있는 자는 자신을 구원하시고자 하느님이 치르신 그 엄청난 희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을 아는 자입니다.
    그 사랑을 아는 자는 나를 영원한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시고자 그 아들까지 내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자발적인 순종과 헌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전도를 하는데, “나는 예수님의 바보입니다”라고 쓴 포스터를 가슴에 붙이고 서있었다고 합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비웃으며 지나가다가 등판에 붙어있는 표어를 보았다고 합니다.
    “당신은 누구의 바보입니까?”그 사람은 이 말에 도전이 되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바보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표현을 이렇게 바꿔볼 수 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당신의 누구의 무엇의 종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이 모든 크리스챤의 정체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자발적인 순종과 헌신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마음 깊이 새기며  밭일, 양치는 일, 저녁을 준비하고 시중드는 일 등 등 하루 종일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도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가운데 샘솟는 기쁨을 경험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한 가지도 섬기지 못하고 원망 불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래 다니지 않았어도 기쁨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감당하며 주님을 섬기는 사람을 봅니다. 바로 이 사람이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믿음이 자라나면 누구라도 예수님 말씀대로 살아갈 것이고 하느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위대한 일을 시도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축복식을 끝낸 선교비전센타를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믿음이 아직 자라나지 않은 교우에게 센타는 짐이 될 것입니다. 센타로 인해서 일이 늘었습니다. 당장 청소하고 관리하는 일들입니다. 책임져야 하는 재정도 늘어났습니다. 전기세만 기본 50만이 나오고 콜롬바장학기금을 매달 200만원씩 출연해야 합니다. 짐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자라난 사람에게는 비전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기대를 갖게 되고 꿈을 꾸게 됩니다.  우리 교회의 6대 비전이 더 활성화되어 주님께 영광 돌리게 되는 꿈을 꿉니다.
    그래서 그 비전을 이루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고 헌신하게 됩니다. 땀 흘리며 청소하고 관리하는 몸의 봉사도 기쁘고 그곳을 통해 하느님의 새 일이 이루어지도록 중보하고 기꺼이 물질을 드려 책임지는 헌신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선교비전센타를 통해서 새 일을 행하실 주님을 신뢰하고 위대한 일을 시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난주일 축복식을 치르면서 마음 깊이로부터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 공동체의 믿음이 살아 있고 많이 자라나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축복식을 준비하고자 온 교우들이 한 마음이 되어 청소하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섬기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축복식을 다 마치고 손님들이 거의 가셨을 때 제 큰 매형이 저에게‘김신부 교회 교우들의 표정이 한결같이 밝고 환해서 보기 좋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마음에 있는 것은 얼굴로 나타나는데, 여러분의 마음에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비전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겠죠.

    마음은 물질로도 표현되는 것인데, 선교비전센타 시설 구비를 위한 목적헌금을 정성껏 봉헌해 주셨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시설 구비를 하면서 빚을 진 것에 대해 부담감이 컸었는데 대출금 4500만원 중 영통에 있는 교회 부지 세금으로 낸 2300만원은 남아 있더라도 나머지 2200만원을 거의 갚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라’고 고백하며 몸의 수고로, 물질로, 마음을 다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김에 감사를 드립니다. 아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니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감사도 누가 되는 줄로 압니다.

    이제 이 마음과 자세로 계속 교회를 섬겨나가 주님이 우리 교회를 통해서 하실 위대한 일을 이 땅에 이루어가는 위대한 인생, 위대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예언을 기억하십니까?
    1. 성공회제자교회가 사람을 훈련하는 베이스가 될 것이다.  
    2. 성공회제자교회가 찬양의 장소가 될 것이다. 
    3. 성공회제자교회가 좋은 영향력을 주게 될 것이다.  
    4. 성공회제자교회에 부족함이 없게 될 것이다. 
    5. 성공회제자교회에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들이 계발되고 은혜를 받는 곳이 될 뿐만 아니라 은혜를 흘려보내는 사역을 하게 될 것이다.
    6. 성공회제자교회에서 훈련받은 사람들 중에는 다른 곳으로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제자교회에 남아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위대한 주님의 일이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함께 찬양합시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찬양으로 영광을 올려드립시다. “우리 보좌 앞에 모였네”

댓글 0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98 청지기 2933 2007-12-09
197 청지기 3050 2007-12-03
196 청지기 3142 2007-11-26
195 청지기 2549 2007-11-20
194 청지기 3546 2007-11-12
193 청지기 3443 2007-11-04
192 청지기 2914 2007-10-29
191 청지기 2704 2007-10-22
190 청지기 2483 2007-10-15
청지기 3457 2007-10-08
태그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