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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년 9월 9일] 사도2:42-47, 요한 17:20-26 퍼즐 조각 맞추기
  • 청지기
    조회 수: 3703, 2007-09-09 17:49:34(2007-09-09)
  •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얼마나 자주 들어와 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온 라인을 통해 정보도 공유하고 좋은 생각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제 큰 아이를 보니까 여유 있는 주말 같은 경우에는 ‘싸이질’을 합니다. ‘싸이질’이란, 싸이 월드 미니 홈페이지에서 방문해 온 사람들의 글도 읽고 또 일촌 관계를 맺는 사람들을 한 바퀴 순회하면서 짧은 안부 글을 남기는 겁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만나지 못해도 친근함을 유지할 수 있어 좋은 것 같습니다.

    교우 여러분도 교회 홈 페이지에 자주 들어오셔서 지난주일 설교문도 읽어보시고 ‘기도 나눔란’에 들어가 올려진 기도제목으로 중보기도도 하시고 또 기도제목도 올려주시고, 자유게시판에는 살아가는 근황이나 좋은 생각과 정보 등을 남겨 주시면 참 좋겠습니다. 아멘?

    저희교회 홈페이지에 들어와 보시면 아시겠지만, 홈페이지 주필이 있습니다. 강베드로 교우님이신데, 한 주에 보통 1, 2편의 생활 나눔 글을 올리십니다. 읽어보면 잔잔한 감동이 있어 참 좋습니다.

    엊그제도 ‘어제’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주셨습니다. 내용인즉 가족과 함께 며칠 동안 1000개의 조각이 있는 퍼즐을 맞춰가는 공동의 작업을 통해 성령님이 주신 깨달음을 적은 글입니다.
    그 중 일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 퍼즐을 통해 발견하게 해 주신 교회 모습의 한 단면을 나누려합니다.

    퍼즐을 빨리 맞추는 방법 다 아시죠?
    모든 조각을 그림 쪽으로 뒤집습니다. 테두리를 찾아서 네모(테두리)를 완성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림의 원판을 보고 모양과 위치가 확실한 지형지물을 중심으로 맞춰나갑니다. 지형지물은 물론 여러 개가 선정됩니다.

    처음에는 어설펐던 것이 조금 씩 조금 씩 중심이 되는 조각에 하나씩 더해져가다가 서로 연결이 되고 벽과 만나게 되면서 원판의 모양이 갖춰지기 시작하면, 뭐랄까 알 수 없는 기쁨? 뭔가 모를 기대감? 약간의 흥분? 이런 감정들에 사로잡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열중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색깔이나 모양이 맞는 것 같아서 대보면 딱 들어맞지 않을 때도 있구요. 그럴 때면 조급증도 나서는 씩씩거리기도 하다가 하나하나 다 대어보고는 거기에 딱 들어맞는 놈을 발견했을 때는 정말이지 엔돌핀이 펑펑 쏟아진다는 거 아닙니까.

    ‘우리 교회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어제 했습니다.
    찬양 중에 “완전하신 나의 주~” 이렇게 시작하는 찬양이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완전하다는 생각을, 그 완전하신 분께서 만드신 교회도 이미 완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완성된 퍼즐처럼 주님은 우리 교회의 모습을 이미 알고 계시다는 생각두요. 테두리를 만드는 것처럼 교회를 세우시고 그 안에 몇 사람의 섬기는 사람을 세우시고 그들을 중심으로 교회의 모습을 하나하나 짜 맞추시고 계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너의 하느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하는 찬양처럼 우리 주님께서 교회의 완성을 바라는 마음으로 기뻐하며 우리가 그 그림이 되는 것을 바라보고 계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몇 사람의 섬김으로 시작되는 것이지만, 완성은 모두가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생각을, 아무 특징도 없는 마지막 한 조각이 놓아짐으로 전체가 완성이 된다는 진리를 퍼즐놀이를 통해서 일깨우시는 친절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우리 교회가 주님의 온전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어제 수요예배 설교에도 제자가 되는 것이 곧 하느님 앞에 온전하게 되는 것이고 그 온전함을 위해 나를 버리고 세상을 등지며 주님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결코 온전함에 이를 수 없다는 선포가 있었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의 약함과 죄인 됨, 이중성을 잘 아시기 때문에 이 땅에 교회를 만드신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기를 바라시는 그 분의 마음, 그 한없는 사랑과 친절하심을 느낍니다. 나는 약하고 보잘것없지만 함께하는 우리 교회는 하느님의 온전하심이 드러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1000개 중에 단 한개도 같은 것이 없으면서 또한 가치 없는 것이 없는 것처럼 우리 교회의 모든 지체도 그렇게 교회를 이루기 원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가진 환경 그대로 그분의 부르심에 반응하고 교회공동체로 나아와 그 분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분이 나를 움직이시고 나는 아직 온전하지 못 한다 할지라도 모자란 내 모습이지만 그 분의 훌륭한 그림이 되는 그런 경험을 우리 교회가 하기 원합니다.

    결코 뒤집힌 퍼즐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를 움직이실 그 분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곳을 바라보아서는 그 분이 나를 만지시고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우님들, 우리 주님께서 이미 그리신 우리 교회의 지경(테두리)은 어느 정도일까요?

    우리는 그 분의 손길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고 순종하고 있는가요?
    혹시 뒤집혀 계시지는 않은가요?
    아니면 중요한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저 한 쪽 구석에 숨어 계신 건 아닌지요?
    음... 반대로 얼굴을 쨍쨍 드러내고 있는데 그 분이 아는 척 하지 않으신다고 화가 나 있는 분은 설마 없으시겠지요?

    다시 한 번, 있는 모습 그대로 부르시는 주님,
    합력해서 선을, 그 온전함을 이루시기를 바라시는 주님,
    무엇보다도 우리를 기뻐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향한 뜨거운 애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우리는 그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구요. 그러기에 퍼즐 맞추는 게임처럼 있어야 하는 그 자리에 그 지체가 없다면 몸은 완성되어지지 않습니다.

    지난 금요일 큐티 말씀 에페 2:21의 말씀처럼 교회는 모퉁잇돌이 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서로 연결되어지고 점점 커져서 주님의 성전을 이룬다고 합니다.

    에페 2:21, “온 건물은 이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워가는 우리 모두의 노력은 퍼즐게임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한 조각 한 조각이 연결되어져서 퍼즐을 완성하듯이 지체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연결되어져야만 예수님의 몸 된 교회는 완성되어져 갑니다.

    이렇게 퍼즐 게임같은 교회 세우기의 가장 기초기 되는 일이 소그룹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기 전날 게쎄마니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신 내용이 나와 있는데, 주님은 주님의 교회가 온전하게 하나 되기를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가 완전한 사랑으로 하나이듯이 주님을 믿는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 되어 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신 새 계명을 기억합니다.
    요한 13:34-35,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말씀에는 십자가 주님의 사랑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온전히 하나 되기를 갈망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하나 됨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죄인 된 인간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하나 됨을 이루어 가는지, 그 사랑의 능력을 교회가 보여주지 못하니까 사회도 분열되어 진채 온통 세상이 갈라져 싸우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면 너희가 내 제자인줄을 알리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기대는 주님의 핏 값으로 세우신 교회가 십자가의 사랑으로 오전한 하나 됨을 이루어서 갈라지고 분열된 사회를 치유하고 회복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주님의 기대대로 그 사랑을 경험하고 배우고 하나되는 것을 시작해 갈 수 있을까요?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가치관으로 오염되어 있는 우리가 십자가의 사랑으로 하나 됨을 배우고 훈련하는 현장이 소그룹입니다.
    왜 소그룹으로 모여야 하는지를 오늘 주보에 실린 글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소그룹은 큰 그룹들에서는 세워질 수 없는 방식으로 공동체를 세워간다. 사람들의 필요를 돌아보고 채우는 데는 소그룹이 훨씬 더 용이하다.
    왜 그런가? 우선, 큰 그룹에 비해 소그룹은 사람들의 필요, 몸부림, 정서, 고민극복의 과정 등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많은 점에서 소그룹은 더 효과적이다. 물론 그룹의 크기 역시 중요한 요소이다.

    일반적으로 소그룹에서 구성원들은 서로 직접 영향을 주고받을 기회를 갖는다. 그룹이 작을수록, 구성원들은 더 깊이 참여하게 되고 구성원간의 상호작용도 더 강화된다. 그 이유는 인격적인 접촉의 빈도가 높기 때문이다.
    그룹이 작을수록, 각 사람은 표피적인 관계를 넘어 서로의 필요를 더 잘 알게 된다. 이런 일은 기도 요청이 받아들여지는 그룹에서 발견될 수 있다. 서로 더 친밀하게 관심을 나누는 것은 소그룹에서 그리 생소한 일이 아니다: 부모 자식 간의 혹은 다른 관계들의 회복, 과식이나 침체에 빠진 사람을 도움, 죄의 고백, 개인적인 또는 영적인 싸움에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소그룹에서는 서로 모든 종류의 필요를 채울 수 있다. 어떤 가정이 어려움을 겪게 되면 소그룹 구성원들은 가족 이상으로 아픔을 함께 하며 그 가정의 짐을 나눠지는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추상적인 교제가 아니라 감정적인 지원과 아울러 물질적인 필요까지도 채워주면서 초대교회가 보여준 공동체의 본질을 회복하게 된다.
    소그룹은 친교에 있어서도 매우 효과적이다. 우리를 세상과 단절시키는 워크맨, 휴대폰, 컴퓨터와 같은 문명의 이기들이 널브러진 분주하고 산만한 세상에서 우리는 교제를 갈망한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떨어져 살고 있다. 우리는 어디엔가 소속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더 친밀하게 서로 알게 되고 또 알려져야 한다.

    많은 교회들이 세상과 같이 분주하고 산만하다. 사람들은 일방 통행식의 태도를 품고 줄지어 모인다. 그들은 일요일 아침에 예배와 성경공부로 두 세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지체들과 아무런 교제 없이 한 주간을 보낸다. 참된 공동체는 그런 상태로는 발육하지 못한다. 우리가 서로 그리고 주와 대면할 때 비로소 교제가 일어난다.>


    ‘사람들의 필요, 몸부림, 정서, 고민극복의 과정 등을 더 잘 파악하고 그 필요를 구체적으로 채워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자기중심적이 이기적인 자아는 깨어지는 영적인 성숙이 이루어지며 사랑의 공동체가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서신 사도행전의 말씀으로 소그룹의 목적을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성도가 소그룹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사도 5:42, “날마다 성전과 이 집 저 집에서 쉬지 않고 가르치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선포하였다.”
    로마 16:5, “그들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 여러분에게 문안해 주십시오.”
    초대교회는 먼저 집에서 모이는 소그룹 가정교회였습니다.
    물론 성전에서 다함께 모이기도 했습니다. 기본은 소그룹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소그룹과 대그룹이라는 두 날개로 바상한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소그룹으로 모여서 했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말씀공부 -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사도 2:42上
    2. 구제 - “서로 도와주며”, 사도 2:42中
    3. 성찬 - “빵을 나누며”, 사도 2:42中
    4. 기도 -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사도 2:42下
    5. 상통 -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사도 2:45
    6. 친교 -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사도 2:46
    7. 찬양 -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게 되었다”, 사도 2:47
    8. 전도 - “주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  사도 2:47

    소그룹 공동체의 본질을 회복하면,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 되는 예수의 가족공동체로 회복되어지면, 사랑에 굶주린 영혼들이 교회로 찾아오는 자연적인 성장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우리는 예루살렘교회 비전이라고 부르고 이 일이 우리 교회를 통해 다시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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