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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년 9월 2일] 루가 14:7-11 여보게, 저 윗자리로 올라앉게
  • 청지기
    조회 수: 3255, 2007-09-04 00:06:57(2007-09-04)
  • 우리는 서울 대성당을 주교좌성당이라고 부릅니다. 주교좌, ‘주교의 자리가 있는 성당’이라는 뜻입니다. 주교의 자리가 있는 성당이기에 대성당이라고도 부르고 교구의 중심이 되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듯 자리는 어떤 사람의 권위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공식적인 회의나 모임을 하면 자리를 지정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사람의 지위에 따라서 중앙에서부터 자리를 배치하게 됩니다. 이럴 때 중앙에서 멀리 있는 자리에 앉게 되면 괜히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갖게 되기도 하고 중앙으로 가까이 있는 자리를 앉게 되면 괜히 으쓱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서에 예수님이 계신 그 현장에 이런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이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드시게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식사 자리는 ‘ㄷ’자형으로 되어 있어서 주인이 중앙에 앉고 주인의 오른편이 가장 윗자리였습니다. 개역성경에는 상석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시니까 초대받은 다른 손님들이 저마다 윗자리-상석를 차지하려고 신경전을 벌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윗자리-상석에 앉고 싶은 사람의 마음이 다 인지상정이지만, 왜 이런 마음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일까요?

    ‘상석-윗자리’란 인정받고 싶고 자기를 과시하고 싶은 사람의 욕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편 ‘적어도 내가 이 정도의 자리에는 앉아야 맞는 것 아니야’ 생각도 나타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허영심과 교만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허영심과 교만한 마음은 우리의 생각과 삶의 모습을 규정해가는 행동 요인이 됩니다.

    허영심이나 교만한 사람들은 조금만 은혜를 받거나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열심을 나타냅니다. 보여주는 신앙적인 열심을 통해서 인정도 받고 싶고 자기를 과시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은혜가 식거나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 것 같으면 이내 풀이 죽어버립니다. 안정감이 없습니다.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밀양’이라는 영화에서 전도연이 보여준 캐랙터의 모습이 이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쓴 영화평론을 읽어보았는데, 전도연이 남편이 죽은 후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가 피아노 학원을 합니다. 그런데 시골 도시 밀양에서 자기 아들을 부잣집 아들처럼 차려 입힙니다. 이 과시욕과 허영심이 아들의 유괴를 불러오고 유괴당한 아들이 죽게 됩니다.
    비탄과 고통 속에서 카센터 사장의 인도로 교회를 나갑니다. 짧은 시간 안에 신앙에 불이 붙고 노방전도도 하고 철야기도도 나가며 살인범을 용서했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는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면회를 갑니다.
    그런데 살인범 역시 교도소 안에서 신앙을 갖고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평안해 하는 모습을 보고는 신앙적인 회의를 깆고 고통에 다시 빠지게 됩니다. 이후 장로를 유혹하고 신앙활동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전도 기도 등의 신앙적인 열심, 살인범을 용서했다고 찾아가는 면회 등도 다 허영심이 빚어내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비롯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허영심이나 교만함으로 움직여 지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영화였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녀 양육도 아이의 내면세계, 신앙이나 인격보다는 성적에 더 신경을 쓰고, 다른 아이들과 비교로 도가 넘어가는 집착을 하는 것을 봅니다.
    더 큰 집, 더 좋은 차, 명품 브랜드를 찾습니다.
    인간관계도 왜소하게 보이는 사람들하고는 잘 어울리려고도 하지 않고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 누가 14:12 이후를 보면, 바리사이파사람들이 어울리는 사람은 친구, 형제, 친척, 잘 사는 이웃 사람 등이었고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과는 상종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학력 위조 사건들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허영심이 만들어낸 단적인 예입니다. 학력, 인맥, 재력, 지위 등이 능력을 앞질러 평가받는 사회. 허영심과 교만으로 인해 윗자리로만 올라가려는 사람들로 인해 우리 사회가 다 병들어 버린 것입니다.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학력을 논하지 말아야 합니다. 최종학력이 어떤가, 재산 정도나 사회적 지위가 어떤가로 서로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받고 존중받는 곳이어야 합니다.  

    이제 다시 성경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오늘 복음성경에 루가 14장 1절과 7절에 지금 식사자리에서 예수님의 행동을 나타내는 표현이 나옵니다.
    1절, ‘지켜보고 있었다’, 7절 ‘보시고’.

    여기서 ‘본다’는 단어의 뜻은 ‘무심코 멍하니 보는 것’이 아니라, ‘유심히 살펴본다.’는 것입니다.

    ‘왜 저렇게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인지’ 마음의 동기와 생각을 보는 것이죠.
    주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사무엘 16:7,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
    시편 139:1-3, “야훼여, 당신께서는 나를 환히 아십니다. 내가 앉아도 아시고 서 있어도 아십니다. 멀리 있어도 당신은 내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걸어갈 때나 누웠을 때나 환히 아시고, 내 모든 행실을 당신은 매양 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도 유심히 살펴보고 계십니다. 마음 깊이를 보고 계십니다.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고 계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유심히 살펴보신다.’는 말이 위로가 되고 든든하기도 하지만, 내 안에도 상석에 앉고자 하는 허영심과 교만함이 있기에 부끄럽기만 합니다.

    나를 유심히 보고 계시는 주님을 인정하는 사람은 삼가 자기의 생각과 마음을 잘 살피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시던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 하십니다.

    ‘스스로 윗자리-상석를 차지했다가는 주인에게서 말석으로 쫓겨나는 창피함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끝자리-말석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주인이 와서 윗자리-상석에 앉혀줄 것이고 사람들이 너를 영예롭게 볼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8:12, “교만에는 재난이 따르고 겸손에는 영광이 따른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개역)
    온통 다 윗자리로만 올라가려고 싸우는 세상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신자로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석을 감당하는 겸손함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를 높여 주시고 사람들 앞에서 영예롭게 세워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겸손이라는 덕목을 가르쳐 주시려고 이 말씀을 하신 걸까? 왜 혼인잔치를 비유로 말씀하신 걸까?’

    성경을 연구하며 묵상하는 가운데 오늘 복음말씀은 단순히 겸손이라는 덕목만을 가르치는 윤리적인 교훈이 아니라, 천국의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는 복음 선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혼인잔치는 천국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마태오 22:2, “하늘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
    묵시록 19:9,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행복하다.”
    묵시록 21:1-2, “그 뒤에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맞을 신부가 단장한 것처럼 차리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 성경 15절에도 ‘하느님 나라에서 잔치 자리에 앉을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겠습니다.’라고 바리사이파 사람이 묻고 있습니다.

    주님은 천국잔치에 모든 인생을 초대하셨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 천국잔치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마르코 1:15,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알고 마음을 돌이켜 예수님을 믿는 사람 말입니다.

    그런데 상석을 차지하려는 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허영심과 교만으로 가득 차 있어서 도대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상석에 앉는 것이 합당하고 여기듯이 자기들은 당연히 천국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24절을 보면, ‘처음에 초대받았던 사람들 중에는 내 잔치에 참여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아무리 유다인 종교지도자 바리사이파 사람일지라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주님은 ‘맨 끝자리에 앉으라.’고 ‘스스로 낮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겸손하게 회개하고 십자가 앞에 나오라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초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던 인생, 허영심과 교만함으로 내가 주인 되었던 인생에서 돌이켜 예수님을 내 인생의 보좌에 모시라는 천국 초대의 선포인 것입니다.

    요한 1:11-13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유다인, 종교지도자 -바리사이파라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오고 겉으로 보이기에 신앙적인 모습을 살아간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말석으로 내려와 내 인생의 상석-보좌를 주님께 내어드릴 때 구원이 있고 천국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여전히 윗자리를 원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내 인생의 상석에 내가 앉아 주인 되어 살고 있습니까?

    상석의 자리에서 내려오십시오.
    이제 말석으로 내려가십시오.

    내 인생의 보좌를 예수님께 내어 드리십시오.
    이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여보게, 저 윗자리로 올라앉게.’  
    “벗이여 올라앉으라.”

    내 인생의 보좌에 겸손히 주님을 영접하게 사람을 주님은 친구라고 부르시고 주님과 가장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윗자리에 앉혀주십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이 누리는 가장 큰 행복이고 영광입니다.

    이 시간, 내 인생의 보좌를 주님께 내어드리는 결단을 드리며 찬양합시다.

    ‘주 거룩한 보좌로 내 맘에 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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