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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년 7월 29일] 루가 11:1-13 기도-하느님을 기다림
  • 청지기
    조회 수: 2889, 2007-07-29 19:23:33(2007-07-29)
  • 먼저 아프카니스탄에서 순교하신 배형규 목사님의 영혼을 위하여, 억류되어 있는 지체들의 안전과 무사귀환을 위하여 잠시 기도합시다.

    오늘은 전진건선교사 후원주일입니다. 특별히 전진건 선교사가 배형규 목사님의 죽음을 보며 홈페이지에 적은 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5년 전 제자 교회의 파송을 받고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교단 내에 선교에 관해 의논을 하거나 배울 곳도 없었고 더군다나 주님께 받았다는 소명, “더 많은 선교사를 일으키고 보내라”는 선교 동원 비전도 과연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하는 마음이 들어 말조차 꺼내지 못했었습니다.  

    결혼할 당시부터 아무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이었기에 떠날 때 원룸 보증금과 아내가 직장생활 하면서 모아두었던 돈을 탁탁 털어 선교 동원을 배우겠다고 선교사들을 일으켜 보겠다고 지금 몸을 담고 있는 글로벌팀즈로 왔습니다. 모교회의 후원을 받고 있었지만 첫 일 년 동안의 훈련과 실습기간 후에 거의 가지고 온 돈을 다 썼고 통장에 한국 돈으로 50만원 정도가 남아있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거처를 줄 수 있는 미국 성도들 집들을 옮겨 다니며 살아야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은혜라고 말할 분들도 있을 수도 있지만 문화가 다른 미국 가정에서 한 지붕 두 가족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 2년 동안 아내도 제가 모르는 많은 힘든 일들을 겪었고 회복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것도 사실입니다. ‘주님은 왜 이런 상황으로 내모시는가?’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었고 짐을 쌓다가 풀었다가 한 적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선교사로 산다는 것, 그리고 저보다 더 힘들게 살 선교사들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 깊이 부담이 되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순교한 배형규 목사님과 같은 선교사들의 순교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나는 순교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제 자신을 돌이켜 보게 되고 ‘그렇게 순교할 사람들을 나는 일으키려고 하는가’하는 이중의 고민으로 찹찹한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김은하 자매가 파키스탄으로 단기 훈련을 떠나서 여러 힘든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주님께서 그 자매를 향한 계획 속에서 인도하셨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그런 힘든 선교지로는 다시는 사람들을 보내지 말아야지 하는 안일한 생각도 했었습니다.

    선교단체에 5년 동안 몸을 담아 오면서 그리 많은 시간은 아니지만 선교 현실과 선교사의 삶을 이해하는 데는 부족한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선교지를 방문했을 때 사귄 형제들이 당하는 핍박과 그들을 향한 살해 위협들, 선교사들 간의 갈등 등 이런 저런 선교사들의 문제들을 우리 단체 속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경로들을 통해서 듣고 보게 됩니다.  

    미국에서 사역을 하고 있어서 그럴까요. 가끔 젊은 친구들이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말을 저에게 하면 기쁨이 앞서기 보다는 보다는 “왜? 선교사를?” “저들은 자신이 치루어야 할 대가가 뭔지 알까?”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 솔직한 마음입니다.

    장기 단기 선교사들을 훈련하고 파송하는 것은 정말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먼저 돈이 무지 들어가는 일인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거룩한 구걸자”라는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일부인지 다수인지는 잘 모르지만요). 현지어를 잘 구사할 줄 알고 현지인들의 정서를 잘 알고 복음을 나눌 수 있는 관계를 만들 수 있을 때까지 적어도 5년 이상이 소요됩니다. 그 시간이 되기 전에 선교사 자신과 교회의 서로 다른 기대가 가져오는 갈등과 어려움도 만만치 않습니다.  

    선교는 감언이설로 선동해서 될 일도 장미빛 낭만적인 사역이 절대 아닙니다. 더더욱 선교는 교회 부흥을 위한 도구도 아닙니다.
    “과연 우리는 이런 선교 현실을 인식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인식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그 열방을 향한 마음을 알아서 그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도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우리 모두가 자성해 볼 시간이라 생각됩니다.

    성공회의 선교사들을 일으키고 사역자들을 일으키는 선교센터의 완공과 앞으로의 비전들을 세워가는 우리 제자교회에게 아프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정말 그 일을 하려는가?”

    마태복음 14장에서 베드로가 제자들과 함께 폭풍 속 파도와 싸우고 있을 때 유유히 물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주님께 자신도 물위를 걷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걸어오라는 말씀을 듣고 배 밖으로 나와 걸음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성난 폭풍을 보고 물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주님께 배 밖으로 나와서 물위를 걷게 해 주시도록 청하기 전에 그 물 위를 걸을 때 우리가 마주해야 할 폭풍이 어떠할지를  미리 마음으로 준비했다면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현실을 꼼꼼히 따져보고 계산기를 두들겨 보는 것을 주님께서 탓하신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현실들을 따져보지도 않고 믿음으로 그 발걸음을 시작했다가 오히려 예상하지도 않은 어려움에 실족하는 것을 탓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계산기를 두들겨보고 모든 현실적으로 부닥치게 될 모든 문제들을 따져보고서도 주님께서 배 밖으로 나와 물위를 걸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오라’는 말씀을 해 주시길 간청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초대교회는 새신자라고 순교에 관해 쉬쉬 하지 않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새신자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치루어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는 믿음의 강약에 상관없이 목도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새신자라지만 지금의 헌신자들보다도 더 큰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언론 매체와 인터넷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치루어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는 보도가 우리의 귀에 선명하게 매일 매일 전해지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고난을 말하길 꺼려하는 교회들에게 주님은 세상의 매체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지 생각하게 됩니다.

    ‘상처입은 치유자’ 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교회 안의 수많은 문제들과 해결해야 할 선교과제들이 있지만, 그것을 넘어 열방을 치유하고 섬겨야 할 부르심이 우리에게 동시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과 교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과 상처 속에서도 주님께 우리에게 그 배 밖으로 부르시는 그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두서가 있게 쓰려고 애를 썼는데도 두서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베드로 교우님의 속 깊은 나눔에 저 역시 도전이 되어서 작금의 우리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제자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로서 며칠 동안 제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을 뿌리칠 수 없어서 긴 글을 적었습니다. 용서하시고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육적 존재인 사람이 영적인 존재인 하느님과 만나는 방법이 두 가지 있는데, 그것은 기도와 말씀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처음과 끝은 기도와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배를 타고 노를 저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이 아래로 흘러내려가도 믿음의 사람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강물을 거슬러 전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이라는 두 개의 노를 힘차게 젓지 않으면 그 배는 세상이라는 물줄기를 따라 흘러 내려가게 되고 결국 폭로 아래로 떨어지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지난 주일 주님 발치에 앉아 있는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우리 삶의 가장 우선순위에 있음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기도에 관해서 살펴 보도록 하십니다.

    기도에 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첫 번째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 자신이 언제나 기도하시는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기도는 삶의 최우선순위였습니다.
    “예수께서 하루는 어떤 곳에서 기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루가보음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과 기도에 삶에 얼마나 철저히 우선순위를 지키셨는지를 보여 주는 표현이 있습니다.

    루가 4:16,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난 나자렛에 가셔서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서를 읽으시려고 일어서서”  
    -예배와 말씀생활의 모범.

    루가 22:39, “예수께서 늘 하시던 대로 밖으로 나가 올리브 산으로 가시자 제자들도 뒤따라갔다.” -기도생활의 모범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고백하는 신자들의 본분은 마땅히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공회 사제수칙에는 ‘성무일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제가 마땅히 살아야 하는 일상의 예배를 말하는 것으로, 매일 드리는 ‘조도와 만도’를 말합니다.
    며칠 후면 벌써 타계하신지 5주기를 맞이하게 되는 고(故)대천덕신부님은 어디를 가시든지 공도문을 가지고 다니시며 조만도를 드리셨습니다.

    지난주일 주님의 말씀이 기억나시죠?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루가10:42)

    어떠한 경우에도 주님 앞에 머무르는 시간을 결코 빼앗기지 않는 거룩한 습관의 모범입니다.

    성경은 안수 받은 성직자만 사제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세상을 하느님과 화해시키는 사명을 가진 사제라고 하십니다.
    벧전 2:9,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두운 데서 여러분을 불러내어 그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널리 찬양해야 합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신 여러분, 아무리 바쁘고 힘이 들어도 조만도의 성무일과를 지키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 이상으로 바쁘고 피곤한 일상을 사셨습니다. 하지만, 절대 기도의 시간을 빼앗기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 그분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권능을 받아 다시 세상을 나가 병들고 상한 심령들을 섬기시는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마르코 1:35, “다음날 새벽 예수께서는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시어 기도하고 계셨다.”
    우선순위와 균형의 삶의 모범이 우리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에 관해서 알아야 하는 두 번째 사실은 기도란 주님만을 의지한다는 믿음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성당에만 와있지 계룡산에서 기도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기도를 하게 되는 우를 범합니다.
    마태 6:7,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줄 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마태 6:8, “그러니 그들을 본받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또한 더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아버지십니다.
    루가 11:13,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물론 가장 좋은 것은 당신 자신이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셨고 성령을 보내주시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느님이 먼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더 좋은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믿는다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염려할 것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오늘 성경의 말씀은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라는 강력한 주님의 권고입니다.

    오늘 시편에서 하느님의 사람 다윗은 그 믿음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 도다.”(개역개정)

    우리 인생에 많은 어려움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고 두려움과 걱정 속에서 내가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면 이삭, 조급        하면 이스마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날 인류의 문제는 아브라함이 조급함으로 인해 인간적인 방법으로 출산한 이스마엘의 후예들과 믿음의 아들 이삭의 후예들 간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입니다.
    결국 이 갈등은 이삭의 자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들을 섬길 때 해결되는 것일텐데, 여전히 인간적인 방법들이 동원되기에 여전히 미궁에 빠져 헤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그 어떤 것에도 기도의 시간을 빼앗기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만을 의지함으로 바라보고 기다림으로 주님만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 일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레미야 애가 3:26, “야훼께서 건져주시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좋은 일이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개역성경)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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