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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년 8월 5일] 루가 12:13-21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 청지기
    조회 수: 3354, 2007-08-06 10:21:00(2007-08-06)
  • 여러 차례 광고가 나갔듯이 8월 17일 금요일 밤부터 19일 주일까지 교회가족수련회를 갖습니다. 19일 당일 본 성당에서는 11시 예배만 드리니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한 하느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가족이고 가족의 본질은 사랑으로 하나 됨에 있기에 주님 안에서 같이 자고 먹고 놀면서 깊은 사귐과 일치를 이루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여러분 모두 참석하시길 바랍니다. ‘물론 난 참여하지’ 하시면서도 신청서를 제출 안하시는 교우들이 많이 계셔서 잠시 신청서를 기록하는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오늘날 우리는 극도의 물질주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으로 무슨 문제이든 해결할 수 있고, 돈으로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얼마 전, 이런 광고가 난적 있습니다. 40대 초반의 대학 강사인 딸의 신랑감을 찾는 광고였습니다. 그 광고에 부모인 자신들이 100억대가 넘는 재산이 있다는 내용이 실렸습니다. 사위감의 여러 자격 조건 중에 크리스챤이어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습니다. 이에 수백 명의 남자들이 신랑감으로 지원했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이렇게 사위를 구했을까 생각되지만, 크리스챤이라고 밝힌 그들이 성경이 말하는 방법이 아닌 돈으로 사위를 구하는 것 같아서 씁쓸했습니다. 지원하는 사람들도 그 부모가 가진 돈을 보고 지원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이 시대 돈이면 다 된다는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을 보여주는 단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도 돈이 주제가 되는 가르침이 꽤 많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당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상은 하느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돈을 더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복음 성경도 군중 속에서 나온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부탁한 말 때문에 돈이 주제가 되는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13, “군중 속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 제 형더러 저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주십시오." 하고 부탁하자”

    당대 모세 율법에 의하면 형은 2/3, 동생은 1/3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어 있습니다. 형제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이후 형제는 아버지의 죽음이 주는 슬픔 보다는 남겨진 재산의 분배에 대해 관심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형이 재산 분배를 미루고 있었던지 아니면 법으로 정해진 것보다는 적게 주었든지 유산으로 인해 형제간에 갈들이 있었고 이에 동생이 예수님께 이 문제의 해결을 요청해 왔습니다.

    오늘날에도 부모가 유산을 남기고 돌아가시면 유산분배 때문에 싸우거나 갈등하지 않는 가정들을 보기 힘듭니다. 심지어는 조의금의 분배를 놓고도 의를 상하는 가정들을 심심치 않게 봅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어머님의 유지에 따라 수백억을 고대병원에 사회환원한 자손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크리스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우리 크리스챤들이 자식들에게 유산을 상속시키기보다 사회에 환원하는 모범을 보이는 이 시대의 빛이 되어야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다사회에서는 불공정한 유산분배에 대해서는 랍비들에게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 나온 이 사람도 랍비 이상으로 유명한 예수님의 명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몫을 챙기려고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하십니까?
    14, “예수께서는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재산 분배자로 세웠단 말이냐?" 하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성경 속에 예수님은 자주 부탁을 거절하십니다.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문제 해결, 소원 성취에 있지만, 인생을 향한 예수님의 관심은 생명과 영적인 원리를 알게 하는 신앙의 본질에 있기에 그것을 깨닫도록 하시고자 우리의 부탁을 거절하십니다.

    두 주 전에 보았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그토록 사랑하던 마르다의 부탁도 거절하셨습니다. 마르타로 하여금 주님과의 관계에서 본질은 ‘더 좋은 몫을 택해가는 우선순위와 신앙의 균형’ 임을 가르쳐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주님은 종종 우리의 애끓는 기도에도 이렇게 거절하십니다. 바로 그 때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의중이 드러나는 때입니다. 우리는 나의 간구가 응답되지 않고 있을 때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신실하신 주님의 의중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영적인 민감함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주님은 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시면서 영적인 원리를 가르치십니다.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하시고는”

    친절하신 주님은 비유를 들어가며 우리가 알기를 원하는 영적인 원리를 설명해주십니다  비유 말씀을 성경 그대로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눈을 감고 마음에 새기며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16-19,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얻게 되어 '이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며 혼자 궁리하다가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내 창고를 헐고 더 큰 것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산을 넣어두어야지.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영혼아, 많은 재산을 쌓아두었으니 너는 이제 몇 년 동안 걱정할 것 없다. 그러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 하고 말했다.”

    비유에 나오는 부자가 취하고 있는 행동들이 여러분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시나요?

    세상적인 시각으로 볼 때 뭐 그리 잘못된 게 없어 보입니다. 열심히 일했고 그 결과로 많은 소출을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더 큰 창고를 짓는 것, 상식적인 생각입니다.

    이 부자가 자기 영혼에게 하는 말을 보아서 이런 생각도 해봄직 합니다. ‘나는 성공해서 번창하고 있다구. 이건 하느님이 내게 복을 내리셨다는 증거란 말이지. 하느님이 이런 축복을 주신 것을 보니 아~ 그건 내가 그 만큼 열심히 살아온 것에 대한 보상이라구.’
    그리 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생각 같습니다.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기리라.’
    노후를 이렇게 살고 싶고 이렇게 살면 복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평가는 다릅니다.
    20-21,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하셨다.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

    많은 소출을 거두어 큰 창고에 가득 쌓아두고 이제는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기며 살려고 했는데, 그 날 밤에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이냐는 것입니다.
    전라도 익산에 어떤 여자 분이 있었습니다.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땅을 많이 가진 부자가 되겠다는 꿈으로 열심히 공부했고 사회에 나온 후에 의사를 만나서 결혼했습니다. 이후로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열심히 땅만 샀다고 합니다. 돈 많이 버는 의사 남편을 두었음에도 좋은 옷도 입지 않고 허름한 집에 살면서 자가용도 없이 지내며 평생 땅만 샀습니다. 사람마다 그 여자를 보면 그 여자가 얼마나 땅이 많은 지 부러워했습니다. 많은 소작인을 두며 땅땅 거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 늙지 않은 나이에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부인이 죽은 지 채 1년이 안되어 젊은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젊은 여자가 ‘아잉~’하는 애교소리가 한번 할 때마다 땅이 하나씩 팔려 나갔습니다. 젊은 부인은 고급 아파트에 좋은 자가용을 굴리며 온갖 사치를 다 누리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땅만 사다가 죽은 여인의 인생이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입니까? 얼마나 불쌍한 인생입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느님 없이 돈 많고 잘사는 부자들을 볼 때 어떤 마음이 드시나요? 부러운 마음이 드십니까? 아니면 참 어리석고  불쌍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주님은 우리가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않기를 원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주님이 말하는 ‘어떤 탐욕’이란 무엇일까요?

    한나라 고조황제, 그의 아내 황후, 한신장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황후가 이르길 자기는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의 아내이지만 조공을 바치러 오는 젊은 남자를 보면 마음이 움직인다고 했다. 여인에게 음욕은 피할 수 없는 가장 큰 욕망이다.
    한신은 천하에 대장군이지만 황제를 배알할 때 그 자리에 눈이 자꾸?간다고 했다. 권력의 욕망은 그러한 것이다. 불꽃과 같이 위로만 향한다.
    그러면 만국의 통치자요. 제황인 한고조는 무어라 했을까?
    모든 나라의 금은보화와 사람이 황제에 속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도 황제를 배알하러 올 때 무엇인지를 들고 오는 사람에게 더 호감이 간다고 했다.
    색욕과 명예욕과 재물욕의 욕망은 본능이 추구하는 탐욕의 세 가지 수레바퀴이다.”

    골로사이 3:5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죽이십시오. 음행과 더러운 행위와 욕정과 못된 욕심과 우상 숭배나 다름없는 탐욕 따위의 욕망은”

    오늘 복음은 탐욕이 인생들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가게 하는지를 보여 보여줍니다.

    첫째, 탐욕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군중 속에 있던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부를 때 ‘선생님’이라고 합니다. 그의 의식 속에 예수님은 단지 권위있게 가르치는 선생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 하는 재판관이나 재산분배자 같은 도구로 여겼을 뿐이었습니다.
    우상숭배와 기독교의 차이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고자 하느님을 조정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기독교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내 욕망의 도구로 이용하고자 한다면 비록 교회를 다닐지라도 신자가 아닌 군중 중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신자입니까? 군중입니까?

    둘째, 탐심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비유에 나오는 부자의 표현에 ‘내 창고(18절)’, ‘내 모든 곡식과 재산(18절)’, ‘내 영혼(19절)’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모든 내 것입니다.
    그리고 ‘혼자 궁리하다가 좋은 수가 있다고 생각하며’ 자기 꾀로 살아갑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란 자기중심의 생각과 태도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부자는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 서 있습니다.  
    곡식과 재산, 영혼이 내 것입니까? 풍성한 결실이 있기까지, 때에 맞는 비와 햇볕을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은 누구입니까?

    청지기정신이라는 기독교의 중요한 사상이 있습니다. 청지기란 성경에서 ‘오이코노모스’라는 헬라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오이코노모스’라는 말은 ‘주인으로부터 신임을 얻어 주인의 경영을 위탁받아 돌보는 하인’을 일컬을 때에 쓰는 말입니다.
    청지기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나는 다만 그것을 관리하는 일꾼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청지기입니까?

    셋째, 탐욕은 하느님께 인색하게 만듭니다.
    신자의 삶이란 골로사이서 3장 2절, ‘지상의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대로 사는 자인데, 탐욕은 오히려 지상의 것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땅의 것만을 추구하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만 염려하게 하고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늪에 빠져 하느님의 것을 구별하여 드릴 줄도 모르고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며 나누지 않는 인색함으로 살게 됩니다.

    세상은 이렇게 말합니다. ‘공부하면 남주냐?’ ‘돈 벌어 남주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공부해서 남주자.’ ‘돈 벌어 남 주자.’
    넷째, 탐욕은 하느님의 진노를 받게 합니다.
    골로사이 3:5-6, “여러분은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죽이십시오. 음행과 더러운 행위와 욕정과 못된 욕심과 우상 숭배나 다름없는 탐욕 따위의 욕망은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느님의 진노를 살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도 탐욕가운데 사는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32절).
    하느님의 진노로 받게되는 죽음의 실체는 지옥의 영원한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탐욕을 버리지 못한 인생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가치관으로 하느님과 이웃에 인색하게 살다가 결국 영원히 죽게 되는 사람이기에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런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골로사이 3장 10절의 말씀처럼 새 인간으로 참된 지식을 소유해야 합니다.
    “새 인간으로 갈아입었기 때문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어리석음은 분별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 반대말은 지혜로움입니다. 지혜로움은 자기 본문을 깨달아 알아 적절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장례예배 때 자주 교독하는 시편 90편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모세가 지은 시로 12절에 보면, ‘날수를 제대로 헤아릴 줄 아는 것이 지혜’라고 합니다. 즉, 내가 죽을 존재임을 아는 자입니다.

    인간 생명의 한계를 깨달아 알 때 비로소 바른 믿음이 시작됩니다.
    오늘 교독한 시편에서도 ‘저승 길 가지 않고 영원히 살리라는 생각도 마라’(9절)고 ‘사람은 제아무리 영화를 누려도 잠깐 살다 죽고 마는 짐승과 같다.’(12절)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반드시 죽는다는 자각이 있는 사람은 생명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아는 자이고 죽음 뒤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우리가 죽는 존재라는 것, 오늘 밤이라도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 때에만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느님을 비로소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죽음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그분이 보내신 생명 되신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창세기 4장 26절을 보면, ‘셋도 아들을 얻고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어 불렀다. 그 때 에노스가 비로소 야훼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였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이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야훼 하느님을 찾은 적이 없습니다. 창세기 4장 26절에 가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하느님을 부른 것입니다. 그 때가 에노스의 때입니다.

    에노스라는 단어를 히브리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언제 하느님을 찾았습니까?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과 죽음이 남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며 오늘 밤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찾아 왔습니다.

    이렇게 인간 생명의 한계를 바로 알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함으로 모든 탐욕에서 해방된 하느님의 올바른 청지기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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