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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년 8월 12일] 히브리 11장, 루가 12:22-31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 청지기
    조회 수: 3103, 2007-08-12 15:42:19(2007-08-12)
  • 지난주일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탐욕에도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씀하시면서 탐욕 가운데 재물을 쌓아 호의호식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던 부자에게는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 떠나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드시 죽을 그러면서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 재물을 쌓고 혼자만 잘사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간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에노스’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믿음을 갖게 되며 그 인생은 탐욕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예배하는 올바른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당신은 에노스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으며, 바른 믿음이란 무엇인가?’

    중국 한나라 선제 원년, 서북쪽에 살던 티베트계 유목민 강(姜)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진압군이 대패하고 금성일대가 반란군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다급해진 황제는 백전노장인 조충국을 불러 물었습니다.
    “장군이 이번 반란군을 토벌한다고 하면 어떤 전략을 쓰겠는가? 어느 정도의 병력이면 되겠는가?”
    노장군 조충국이 대답했습니다.
    “백문불여일견입니다. 모름지기 군사나 전투에 관해서는 실제 현장을 보지 않고서는 계획이나 규모를 제대로 세울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현장에 가서 직접 두 분으로 살펴본 뒤 도면을 펼쳐 놓고 방책을 세웠으면 합니다.”
    이에 선제의 윤허를 얻은 조충국은 반란의 현장인 금성으로 직접 가서 정세를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둔전이라는 전략을 세워, 보병 1만 명을 풀어 금성 각 지방에 골고루 침투시켰습니다.
    둔전이란 전략은 글자 그대로 군사를 농사꾼으로 기장하여 흩어 농사를 짓게 하는 계책이었습니다. 조충국 자신도 농사꾼으로 가장하여 무려 1년 동안이나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농사일에 열심이던지 반란군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1년이 지났을 때, 조충국의 명령과 동시에 반란군은 순식간에 진압이 되었습니다. 큰 인명 피해도 없이 말입니다. 이것은 노장 조충국이  백문불여일견임을 알아 현장을 직접 보고 현장의 정세에 맞는 전략을 썼기 때문입니다.

    이후 ‘백문불여일견’라는 말은 보는 것의 중요성을 언급할 때 마다 강조되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즉 백번 듣는 것보다 실제로 한번 보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은 확실하게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지만 인간이 모든 것을 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여도 인간이 보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눈은 멀리 있는 것을 보지 못하며, 아주 가까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도 보지 못합니다. 우주처럼 큰 것을 볼 수 없고 세균처럼 미세한 것도 볼 수 없습니다. 태양처럼 밝은 것은 물론이요 암흑같이 어두운 것을 또한 보지 못합니다. 시야를 차단하는 장애물이 있으면 그 너머에 무슨 일이 있는지, 무엇이 있는지를 보지 못합니다. 분명히 내 신체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내 속에 무슨 병이 들어있는지 조차 보지 못합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마음을 볼 도리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눈은 자기 인생의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습니다.

    이렇듯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사실이긴 하지만, 인간의 보는 능력은 불완전하기만 합니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 같으나, 실제로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바로 그 깨달음에서 믿음이 시작됩니다.
    이 성당을 밝게 비추는 아름다운 촛대등빛, 에어컨에서 나오는 차가운 바람은 우리가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오감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전기는 볼 수 없습니다. 이 벽안과 너머에 있는 전기가 들어오도록 해 주는 전선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전기가 있다는 것과 그것이 들어오도록 하는 전선이 어느 발전소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서로 사랑하여 내일 결혼하기로 약속한 젊은 남녀가 있다고 합시다. 내일 결혼 후에 그들의 인생이 행복할 것인지 그들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식 너머의 일입니다. 다만 그들은 누구보다도 자신들이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것을 믿고 결혼할 뿐입니다.

    이처럼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인식의 대상일 뿐이지만, 인식 너머에 있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하신 하느님을 온전하게 인식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합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하느님은 인식의 대상에 머무를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온전한 인식이 불가능하기에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믿음의 대상으로만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믿음을 떠나서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성립할 수초자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서신성경 히브리서 11장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1절)

    보이지 않고 보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이 요구된다는 말씀입니다.

    부활 하신 주님을 믿지 못하고 있던 도마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주님의 못 자국을 보고 자기 손가락을 그 못 구멍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도마를 찾아오신 주님은 토마스의 주장대로 그대로 보여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20:29,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람들은 도마처럼 본 것만을 믿으려고 합니다. 막상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하는 시력을 가진 유한한 존재임에도 말입니다. 정작 이런 자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습니다.

    2000년 전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고 부활하신 것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그분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증언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홍해 갈라지고 노예들이 해방되어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출애굽의 기적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보고서야 믿겠다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믿음과는 전혀 무관한 단순한 서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지 못했고 또 보려고 하여도 볼 수 없기에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믿음 속에서 모든 것이 확연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 사건들이 실제 거울을 보는 것처럼 뚜렷하게 보이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토마스에게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바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볼 수 없는 것이면 무조건 믿음의 대상이 된다는 말일까요?
    무조건이란 맹신을 말합니다. 기독교의 믿음에는 맹신이 없습니다.
    맹신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맹신으로 믿으면 믿을수록 인간은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게 됩니다. 수많은 이단의 믿음이 이렇습니다.

    볼 수 없는 그 자리에서 믿음이 출발하지만, 그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의 근거로 실재가 있음으로 비로소 믿음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나왔다.’는 히브리서 1장 3절의 증언이 바로 이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실재’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바로 보이지 않는 실재를 믿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촛대등의 빛이 나오도록 전원을 키는 것,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이 나오도록 전원을 키는 이유는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실재, 전기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선도 연결해 놓지 않고 전원 스위치를 올리는 사람은 제정신이 안 사람입니다.

    내일 결혼하는 남녀가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것은 그들이 실제 결혼을 약속하는 사랑하는 사이이고 내일 결혼하여 한 가정을 꾸리게 될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약혼자도 없는 솔로인 사람이 ‘나는 내일 결혼할 것이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제 정신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렇듯 바른 믿음은 비록 우리의 불완전한 인식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실재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고 볼 수 없는 하느님도 그분이 실재하심을 믿기 때문에 이 믿음 속에서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깊게 해 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조건 믿을 것을 절대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인격적인 하느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무조건이란 인격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유한한 우리가 무한하신 당신을 바르게 믿을 수 있도록, 참 믿음을 위한 인식의 근거를 먼저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해하도록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성경으로 기록하시어 우리는 인식 가능한 성경 말씀의 근거 위에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뵈면서 무한하신 그분에 대한 바른 믿음의 세계를 바르게 펼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 믿지 말고 성경을 펴놓고 믿어라.”

    올바른 믿음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이 보이지 않는 약속의 땅을 향해 고향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인데, 그 믿음으로 ‘떠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본향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며 이 지상에서는 타향 사람이며 나그네 사람임을 인정하며 살아갔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내가 볼 수도 없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실재하고 계심을 믿으며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성경에서 예수님은 바로 이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과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대조하여 보여 주십니다.

    먼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22절, 29절의 말씀처럼, ‘무엇을 먹고 살아갈까, 또 몸에다 무엇을 걸칠까 염려하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왜 이렇게 믿음 없이 살게 되는 것일까요?

    영어 성경으로 보면 그 마음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대한 생각에 쏠려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And do not set your heart on what you will eat or drink;’

    그런데 그 마음에 그 생각이 가득 차게 되는 이유는 그것만을 보고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For the pagan world runs after all such things,

    견물생심, 무엇을 보는가가 마음에 들어와 자리 잡습니다. 걱정이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만을 바라보며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면 걱정거리만 눈에 들어오고 그것만을 마음에 담아 두기에 걱정하게 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애쓰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어떤 상황이든지 무엇을 보든지 루가 12:30의 말씀대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어떤 처지에서든지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24절, “저 까마귀들을 생각해 보아라. 그것들은 씨도 뿌리지 않고 거두어들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곳간도 창고도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먹여주신다. 너희는 저 날짐승들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으냐?”

    27절, “저 꽃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결코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는 못하였다.”

    까마귀를 보고도, 들꽃들을 보면서 창조주 하느님을 보고 그분이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아버지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보고 살아가십니까?
    보여지는 세상만을 바라보며 걱정 가운데 메여있으신가요?
    볼 수도 없고 보이지 않지만 믿음의 눈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보고 살아가시는지요?

    혹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보이는 이 세상만을 바라보면서 한숨짓고 걱정 가운데 살아가도 있다면 회개하시고 믿음을 바로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28절, “너희는 왜 그렇게도 믿음이 적으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에게야 얼마나 더 잘 입혀주시겠느냐?”

    무엇을 보느냐가 믿음을 결정합니다.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태산을 보고 걱정하지 말고, 태산을 만드신 하느님을 바라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기에 하느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내가 살아보겠다면 걱정에 짓눌려 살아갑니다.
    태산을 만드신 하느님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태산을 만드신 하느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하느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오늘의 시편은 바로 이 믿음의 사람이 노래한 것입니다.
    “20 야훼는 우리의 도움, 우리의 방패, 우리는 애타게 그분을 기다린다.
    21 그분 안에 우리의 기쁨이 있고 우리의 믿음은 거룩하신 그 이름에 있다. 22 우리가 이렇게 당신만을 기다리오니, 야훼여, 한결같은 당신 사랑 베푸소서.”
    예수님께서도 주기도문을 통해서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우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필립비 4:6-7)

    까마귀를 먹이시고 꽃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시는 위대한 창조주 하느님을 바라보시며 기도 가운데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주를 찬양할지라.
    주는 너의 큰 상급 큰 도움이시라.
    주의 얼굴 구할 때 주의 영을 부으사
    크신 사랑 안에서 주를 보게 하소서.
    내 영혼이 확정되고 확정되었사오니
    믿음의 눈 들어 주를 바라봅니다.
    주를 찬양할 때 주의 나라 임했네.
    영원한 나라 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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