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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년 7월 15일] 루가 10:25-37 정녕 영생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 청지기
    조회 수: 2871, 2007-07-20 13:02:52(2007-07-20)
  • 어느 날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와서는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성경이 뭐라고 말하고 있고 너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반문하셨습니다.
    이에 율법학자는 구약의 성경을 집대성한 황금률로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말씀대로 행하면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다시 율법학자는 자신이 상당히 훌륭한 대답을 한 것에 우쭐하고 평소에 어느 정도 그렇게 살고 있다는 자부심에 다시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들은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나름대로 열심을 가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철저한 십일조와 금식, 구제의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는 ‘난 이 정도로 말씀을 지키는데’라는 교만한 생각이 있었고 말씀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늘 비판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비난을 받은 사람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키기 보다는 그 말씀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율법학자들은 안식일을 지키느라 생명을 구하는 일도 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율법보다 생명이 중요하다는 주님의 정신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자기 의에 교만했던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강도만한 사람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서 거의 죽게 되었다. 이 때 사제가 그 옆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냥 지나쳐 갔다. 이어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 사람을 보고는 그냥 지나쳐 버렸다.

    대학 시절에 읽었던 책이 기억났습니다. 지금은 중 2 교과서에 나오는 ‘지나쳐간 사람들’이라는 어른 동화책입니다.

    <유난히 풍랑이 거칠던 날, 물고기 한 마리가 바람에 밀려 바닷가 모래밭으로 나오게 되었다. 마침 한 남자가 지나가다가 도움을 구하는 물고기에게 말했다.
    “도와주고 싶지만 안 되겠네. 난 지금 어부들의 미망인들을 도우려고 모임에 가는 길인데 늦었어.”

    물고기는 또 다음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 두 번째 사람은 무언가 곰곰 생각하면서 오고 있었다. 바다에 넣어 달라는 물고기의 간청에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글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가만 있자. 내가 이 물고기를 물속으로 다시 던져 준다 해도 또다시 밀려나와서 허우적거리겠지... 그렇다고 당장 도와주지 않으면 그는 아마... 젠장, 나도 모르겠다.”
    그 남자는 생각만 하고 지나쳐 가고 말았다.
    물고기는 숨이 가빠 왔다. 거의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 한 여자가 다가왔다.
    “저 좀 살려 주세요. 저는 꼼짝도 할 수 없어요. 빨리...서둘러 주세요.”
    그녀는 말할 힘도 없는 물고기에게 사정을 이야기해 보라고 다그쳤다. 있는 힘을 다해 자기의 사정을 이야기한 물고기에게 그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자, 그러니 어떻게 하면 되죠?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몇 가지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이렇게 된 것은 신의 탓이니 스스로 이겨내도록 하세요.”
    물고기는 숨이 차서 죽어 버리고 말았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나 레위 사람의 모습이 동화에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과 똑 같습니다.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에서 세 번째로 등장한 사마리아 사람은 사제나 레위인 만큼 사회적인 지위도 없고 유대인들로부터는 개 취급받을 정도로 업신여김을 받았지만 그 강도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을 그대로 읽어보면, 33-35,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자 그 마음에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도 그를 보았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귀찮은 생각이 들어서 지나쳐 버렸는데.....

    가엾이 여기는 이 마음이 중요합니다. 이 마음이 사랑입니다.
    마음은 세상을 보는 창인데, 이 마음이 없으면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 - 강도만난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강도만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땅의 논리가 약육강식이기에 힘없는 사람들은 눌리고 빼앗긴 채 살아갑니다. 강대국에 눌린 약소국가들도 그렇습니다.
    마치 강도만난 사람처럼 빼앗기고 죽어가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예배에 오셨던 아마존 밀림선교를 하시는 강명관 선교사님이 인디언들이 왜 밀림에 들어가 살게 되었는지를 씀해 주더군요. 영화 미션에서 보았듯이 유럽의 제국주의 강대국들이 인디언들을 인종사냥하고 죽였기 때문에 강압적인 폭력을 피해 숨다 보니 밀림 속 깊이 들어가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밀림 속에서 원시적으로 살아가는 인디언들은 사실 살기 좋은 자기의 땅을 백인종들에게 빼앗긴 강도만난 사람들인 것입니다.

    굶주림과 억압 속에서 신음하고 죽음을 감당하더라도 탈북을 감행하는 북한 동포는 어떻습니까?
    일제의 만행에 정신대로 끌려가 인생을 망쳐버린 이 땅의 여인들은 어떻습니까?
    한미 FTA가 발효되면 막강한 자본의 논리로 농민들을 비롯한 수많은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이 더 몰리고 신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면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강도만난 사람처럼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강도만난 사람 같은 우리의 이웃을 보면서도 지나쳐 버리는 사람이 됩니다.

    당장 영양실조에 신음하고 굶어 죽어가는 북한 동포들이 있는데도, ‘식량을 주면 군량미로 간다. 김정일 정권만 도와주는 거다’ 등등의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원조를 반대하고 마치 우리가 이용만 당하고 손해 보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당장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보면서도, 마치 모래밭에 밀려나온 물고기를 보고 그냥 지나쳐간 사람들처럼, 강도만난 사람들을 보고는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처럼,’, ‘가난은 나라도 어쩔 수 없다는데,’ ‘저 사람들은 원채 게으르고 삶의 태도가 잘못되었으니 그렇게 살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야’ 등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외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보자마자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으로 가까이 갔습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며 응급조치를 했습니다.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까지 데려가 간호를 해 주었습니다(34).

    나귀에 태울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반 쯤 죽어 축 늘어진 사람은 일으켜 들어 메고는 나귀에 실을 때 땀이 흐르고 아마 피도 많이 흘리고 있을 텐데 그 사람을 부둥켜 않고 메니 그 피가 자기 옷과 손과 얼굴에 묻는 등..

    목요일 저녁에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이 본문을 읽고 나눴습니다. 둘째 딸이 제게 묻더군요.
    “아빠도 사제인데 그냥 지나쳐 가버리는 거 아니냐?”
    만약에 노숙자가 길에 누워 이렇게 신음하고 있다면 아빠는 차에 태워주고 사마리아 사람처럼 돌 봐 줄 수 있겠냐고요.
    “그럼. 물론 그렇게 해야지”라고 대답은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짜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더 진행되고 있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극진히 간호해 준 사마리아 사람은 그 다음날자기 갈 길을 가면서 여관 주인에게 부탁을 합니다(35).
    당시 로마의 하루 숙박비가 1/32데나리온 이었다고 하는데, 두 데나리온이나 주고, 즉 두 달 치 숙박비를 선불로 치르고 또 이후에 와서 돈이 더 들면 그 값을 담당하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이 보여주는 행동을 보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1.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이웃사랑을 나타나는 것이다.
    2. 이웃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논리적으로 계산하고 따지지 않는다. 어떤 보상을 바라지도 않는다.
    3. 그 사랑은 구체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의 물질과 시간이 사용된다. 당연히 손과 발의 수고가 따른다. 몸으로 힘을 쓰기에 땀을 흘려야 한다.
    4. 플러스알파의 사랑이다.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적당한 선을 긋지 않는 것이다.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결정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

    이 이야기를 읽고 듣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죠.

    “누가 내 이웃이냐고 생각만 하지 말고 지금 당장 네 주변에 가난하고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어라”
    “너는 지금 누구의 이웃이 되어 이런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고 있냐?”

    사랑의 사도 요한은 1요한 3:17-18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우리는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어떠세요. 여러분? 혹 우리가 이제까지 지나쳐간 사람들이었다면, 이제는 가까이 다가서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주님! 우리에게 고통 받는 이웃을 조건 없이 섬기는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데 오늘 설교를 여기서 멈출 수가 없습니다.
    한 가지 더 돌아봐야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하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묻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연결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28, 37절에서 주님은 ‘황금률대로 그대로 살아야만 영원한 생명 을 얻는다’고 ‘사마리아 사람처럼 그대로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안에 그렇게 살아갈 능력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마더 테레사 수녀님처럼 살아간 믿음의 사람들이 간혹 있지만, 솔직하게 우리에게는 사마리아 사람 같은 사랑의 마음이 없습니다. 아니 있는 것 같아도 쪼끔 있습니다.
    흉내는 내도, 사랑의 마음보다는 자기 의나 체면 때문에 하는 경우도 많고, 플러스알파까지는 엄두도 못 냅니다.

    주님의 수준은 일흔 번에 일곱 번인데, 우리의 수준은 일곱 번까지만 하는 수준입니다. 그러면서도 언제까지 내가 이렇게 내가 계속 이렇게 섬겨야만 되는 거냐고 불만이 목에 차오릅니다.

    도무지 황금률대로, 사마리아 사람처럼 살 수 없는 내 꼬라지를 보면 나는 애당초 구원의 길에서는 먼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니 ‘너도 그렇게 살아라.’는 주님의 말씀은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꼭 그렇게 살아야만 하냐?’고 반항도 하고 싶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 한없이 초라하기만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관점은 자꾸 행위에 가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뭔가 하면 자기 의에 우쭐거리고, 하지 못하면 죄책감과 부담감에 쪼라해 지기만 하고...
    주님의 관점은 행위 이전에 믿음에 있습니다.
    요한 6:28-29,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을 때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에 이를 수 없는 죄인임을 알고, 그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하여 주셨다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 안에는 나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들어와 그 사랑의 능력으로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을 사랑하되 조건 없이 그의 필요를 채워주며 플러스알파까지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 십자가에서 흘러 나오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나를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강도만난 이웃들에게 다가가 그 사랑을 흘러 보내야 합니다.

    요한 13:34,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요한 3:16,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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