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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제자교회대한성공회 제자교회

  • 2014년 1월 26일
  • 고후 9:1-15, 마태 6:19-24

     

    돈? 헌금 !

     

     

    1. 주보 간지 - 재정 보고 : 헌신에 감사, 헌금서약서 - 매년 서약하여 제출하는 것이어서인지... 올 해는 헌금서약서를 제출하신 분이 아직은 적습니다. 물론 헌금생활을 잘 하고 계신 분들은 굳이 서약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실 이유가 없다고 여기실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본인은 아직 십일조를 하지 못하고 있는데 서약서에는 십일조만 항목에 있으니 부담만 느끼고 선뜻 작성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혹 어떤 분은 성공회는 좀 다를까 했는데 여기도 역시 돈 얘기를 한다고 실망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2. 오늘은 제가 여러분에게 돈 얘기를 좀 나누려고 합니다. 돈이란 무엇인지? 기독교인은 돈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그리고 성경적인 헌금생활은 어떤 것인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3.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자본주의라고 합니다. capitalism. 여기서 capital이라는 영어 단어는 자본이라는 뜻과 함께 수도, 최고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사회란 말 그대로 자본, 돈이 최고인 사회를 말합니다.

     

    4. 기독교 진리반에서 강의하는 내용대로 세상 사람들이 행복하고자 추구하는 것들이 4P가 있습니다. pleasure 쾌락, power 권력, prestige 명예, property 돈 등, 이 중에 돈만 있으면 앞의 세 가지를 다 가질 수 있습니다. 하여 사람들은 오직 돈을 최고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작년 말 sbs에서 방영한 "최후의 권력"이라는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권력 뒤에 있는 최후의 권력은 바로 돈이라는 것입니다.

     

    5. 오늘 읽은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재물의 헬라어가 맘몬입니다. 맘몬은 신의 이름인 동시에 지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돈은 단순히 교환 수단, 또는 매개 역할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돈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그 답은 “돈은 신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돈 자체가 살아있는 하나의 신인 것입니다.

     

    6. 이렇게 돈은 살아있는 신이기에 신으로서의 최고의 자리를 요구합니다. 신적인 권력에 해당하는 대접을 받고 싶어합니다. 하여 살아계신 하느님과 경쟁하는 유일한 우상입니다. 만약 돈이 별 게 아니라면 예수님도 콕 집어서 돈을 예시하면서까지 하느님과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7. 하느님의 피조물 중에서 하느님과 다투고 하느님의 자리를 넘보고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가장 강력한 우상이 다름 아닌 돈인 것입니다. 하여 허다한 인생들이 오직 돈 많이 버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돈이 인생들의 구원자로, 주인으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분의 글, “내게 돈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면 불안해지고 끔찍하다. 그런데 하느님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렇지도 않다. 문제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8. 이렇게 돈에게는 신적인 요소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돈의 성격을 말하자면, “돈은 선이다”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 돈이 하느님과 견줄 정도의 우상이라면 “돈은 악하다”고 해야 맞는 얘기일텐데, 돈이 선하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생각해봅시다. 진짜 돈이 신일까요? 돈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생각해보면, 하느님이 창조주이시고 돈은 단지 하느님의 창조물일 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선하시기에 그 피조물인 돈도 선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시각입니다.

     

    9. 오늘 서신을 보십시오. 돈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나요? 고린토에 있는 교회들이 가난한 가운데도 힘껏 돈을 모아 어려운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 주었습니다. 여기서 돈은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는 거룩한 도구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10. 이렇듯 성경은 돈의 위험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하면서도, 돈은 하느님의 은총이며, 더 나아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수단이며 하느님의 사역에 순종하는 도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1. 그래서 오늘 서신 말씀을 보면, 고후 9:7, 하느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연애할 때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 사용하는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사람을 위해서 돈을 사용할 때 기쁩니다. 이렇듯이 나를 구원하여 주신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 가운데 자기가 지닌 돈을 사용하는 것이 기쁨이 됩니다. 이렇게 돈은 사랑, 믿음의 표현입니다.

     

    13.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 9:13, 여러분의 의연금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순종한다는 것과 예루살렘의 성도들과 그 밖의 모든 사람을 아낌없이 돕는다는 증거가 되어 그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14. 이 말씀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 선교구제헌금 감사헌금 절기헌금 등 여러분이 정성

    껏 드리는 헌금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순종한다는 것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고 하느님의 선교를 위해 아낌없이 헌신한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15. 여기서 십일조에 관해 성경으로 정리하고자 합니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던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의 세금의 성격을 지닌 십일조를 현대사회가 지키도록 하는 교회의 가르침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문제제기가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16. 원래 구약에서 십일조는 성전제사 제도, 그리고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오로지 성전과 제사제도를 섬기기 위해 열두지파 중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지 못해 생계수단이 없는 레위 지파와 가난한 이웃의 생계를 돕기 위해 제정되었던 것이 십일조입니다.

     

    17. 오늘날 십일조의 복을 위해 가장 오해되는 본문은 말라기입니다. 며칠 전 운동하면서 틀었던 CBS에 설교가 나오는데 말라기 말씀으로 온전한 십일조를 강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말라기 3:10, 너희는 열의 하나를 바칠 때, 조금도 덜지 말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 넣어 내 집 양식으로 쓰게 하여라.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 창고의 문을 열고 갚아 주는지 갚아 주지 않는지 두고 보아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18. 유다 백성, 즉 “야곱(사기꾼)의 후손”은(말라 3:6) 생명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레위인, 가난한 이웃의 몫인 헌물과 십일조를 떼어먹어 하느님 것을 도적질합니다. 또한, 고위 제사장들은 십일조를 율법대로 모든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계와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를 위해 제대로 분배하지 않았습니다.

     

    19. 이후 유대 역사에는 많은 빈곤한 하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갈 몫을 빼돌려 부를 축적하며 호의호식을 누리던 고위 재사장들은 말라기 이후 중간기와 신약 시대에도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었습니다.

     

    20. 즉, 말라기의 십일조 문제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써야 할 십일조가 제대로 드려지지 않은 것, 고위 제사장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나머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빈곤에 처하고 가난한 이웃들이 고통받고 있던 사실 등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단순히 십일조만 바치면 개인적으로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 발생한 종교 경제적 양극화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인 것입니다.

     

    21. 신약에서는 십일조가 복음서에서만 나옵니다. 그 구절들은 모두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의 실천에 대하여 언급할 뿐이지 기독교인들의 의무를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루가 11:42; 루가 18:12). 초대 교회에서는 율법의 완성 위에 선포된 복음의 정신에 따라 십일조 제도를 지속시키지 않았습니다.

     

    22. 하지만 초대교회에서 율법에 속한 십일조 제도의 폐지는 결코 봉헌을 적게 할 명분으로 왜곡되지 않았습니다. 신약 교회에서 십일조 정신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형태인 구제봉헌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즉, 레위인들의 생계에 대한 책임과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은 목회자와 가난한 이웃을 위해 더욱 활성화되었던 것입니다.

     

    23. 이렇듯 초대교회는 재물에 대한 훨씬 헌신적인 봉헌의 자세를 보였습니다. 즉, 십일조 율법의 완성이란 차원에서 자신의 모든 재물의 주인은 오직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철저히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24. 사도행전 2장과 4장 등 예루살렘교회를 비롯한 초대교회를 보십시오. 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의 개념이 아니라 자기 재산 모두를 교회에 헌납하여 필요에 따라 나눠 쓰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신약에서 봉헌은 구약의 십일조처럼 소득의 정해진 비율에 따른 것이 아니라 순수한 동기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성에 근거합니다.

     

    25. 루가복음 19장에 등장하는 자캐오의 경우는 이런 봉헌의 자세와 액수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고 너무나 감사해서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헌납하기로 결심합니다(십의 일이 아니라 절반이다!). 그리고 자신의 부정직한 재산에 대한 회개의 의미로 토색한 자들에게 네 배의 보상을 약속합니다.

     

    26. 여기서 우리는 자캐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자신이 경제적인 손실을 입힌 자들에게 보상하는 마음이 진정한 봉헌의 자세인 것입니다.

     

    27. 이렇게 봉헌은 바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동기가 더욱 중요합니다. 나를 구원하여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몸 된 교회와 하느님의 선교에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28. 돈은 신입니다. 하느님께 견줄만한 이 시대의 우상입니다. 하지만, 돈과 하느님 둘 중에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가기를 결정할 때 돈은 생명을 살리는 거룩한 도구가 됩니다.

     

    29. 신년 초에 여러분에게 헌금서약서를 작성하고 제출하라고 하는 의미는 올 한 해 여러분이 돈과 하느님 둘 중에 누구를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갈지를 결정하라는 신앙적인 도전입니다.

     

    30. 여러분이 드리는 헌금이 여러분의 믿음의 정도입니다. 영적으로 청년인 사람이 드릴 수 있는 헌금의 정도가 십일조입니다. 영적으로 부모인 사람들에게는 그 기준이 없습니다. 자기의 재산을 팔아 헌금하여 교회 공동체 지체들을 돌본 바나바처럼, 교회와 하느님 나라의 선교를 위해서 2/10, 3/10 그 이상도 기쁨으로 봉헌합니다.

     

     

    31. 하느님은 여러분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기를 원하십니다. 아직 영적으로 어려서 헌금생활을 잘 하지 못하는 분들은 0.5/10에서 시작해 보십시오. 월정헌금으로 봉헌하시는 분들은 십일조를 결단하십시오. 이미 십일조를 하시는 분들은 그 기준에 메이지 말고 하느님의 선교를 위하여 더욱 많이 봉헌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2. 지난 20세기 최고의 전도자 였던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말해주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요한 웨슬리 신부님은 또 이렇게 말해습니다. “당신의 회개는 지갑을 여는 것으로 완성된다.”

     

    33. 신앙이 성장하는 만큼 봉헌합니다. 거꾸로 봉헌하는 만큼 신앙은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여러분은 청지기일 뿐입니다. 즐겁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힘에 겹도록 풍성하게 봉헌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재산과 수입은 하느님의 일꾼들과 소외된 이웃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하느님의 나라의 선교를 위해 주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35. 성경 한 말씀 읽어드리며 마칩니다.

    루가 6: 38,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 너희에게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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