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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년 9월 12일]루가 15:1-10 회개하는 그 한 사람이길...
  • 청지기
    조회 수: 1848, 2010-09-13 11:50:16(2010-09-13)
  •   형제교회 도봉교회 주일 9시 예배에는 노숙인과 동네 노인분들이 70, 80명이 참석합니다. 예배가 끝나면 1000원과 야구르트 하나를 드리는 것을 받으러 오는 것입니다. 벌써 수년째 계속되는 사역입니다. 이 사역이 안 개신교 신자분이 사역에 쓰라고 년 500만원씩 봉헌합니다.

      한 때 교회 내에서 이 문제로 논쟁이 있었습니다. ‘꼭 예배를 참석시키고 구제해야 하는가? 그냥 순수하게 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입장과 ‘그래도 그들이 예배에 참석해 복음을 듣고 하느님을 알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 아니냐?’는 입장의 차이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모든 논쟁을 마무리하고 기존대로 함께 예배드리고 구제헌금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에 참석하지 않아도 그냥 돈을 주자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의 생각 밑바닥에는 이런 입장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다녀가면 성당에 악취가 배인다.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용변을 보고가면 지저분해진다. 자녀들들 보기에 안 좋고 위생 문제도 있다. 그러니 예배 참석하지 않아도 구제하도록 하자. 그러면 그들도 자유하고 우리도 자유하지 않은가? 이게 더 합리적이지 않은가?’

      사실 우리 안에는 이렇게 합리성을 말하면서 사람들을 구분하고 선 긋고 차별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다인종사회, 다문화사회로 접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주로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 가정을 꾸려서 정착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선을 긋고 업신여기는 마음으로 이들을 보는 차별의 시선이 있습니다.

      두 주 전 복음 14장 7절을 기억해 봅시다. 서로 윗자리에 앉으려고 했던 밥상에서 벌어진 사건 말입니다.

      밥상에 함께 둘러 앉아 밥을 먹는다는 것은 그들과 내가 동등한 사람으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개 우리들은 나보다는 더 나은 사람들과 함께 자리를 하고 어울리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는 사람을 차별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입니다. 이런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주님이 말씀하셨죠.

      루가 14:11,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유대인들은 사람들과 선을 긋고 차별하는 마음들을 세부적인 율법으로 만들어 차별의 문화를 정당화했습니다. 유대교의 음식법(kosher law)이 그것입니다. 이 법에 의하면, 식탁을 공유하는 자들은 모두 같은 동류로 여겼으므로 죄인들과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을 철저히 금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이 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죄인으로 낙인찍은 사람들하고는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안에는 분명히 사람들에 대해서 판단하고 정죄하고 선을 긋고 업신여기는 악한 마음이 있었는데도, 음식법을 지키는 것이기에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기는 법을 잘 지키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자기 의만 키워갔습니다.

      사실 한 사회의 법이 이런 경우가 허다합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을 옹호해주고 그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1825년 윌버포스에 의해서 노예제가 폐기되기까지 노예법은 영국 사람들의 안락한 삶을 보장해주고 반대로 아프리카 흑인들의 삶의 인권을 철저히 억압하는 장치로 역할을 했습니다.

      윌버포스는 영국의회 의원이 되어 신앙의 양심과 하느님의 사랑으로 전 생애동안, 노예법을 폐지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습니다. 그가 죽은 지 1년이 지나 1825년 드디어 영국에서 노예법을 폐지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알게 모르게 이런 법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에 입각하여 보다 공의로운 사회가 되도록 연구하고 공정한 법을 세우는 일에 기도하고 헌신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서 윌버포스같은 국회의원이 나와야 합니다.
      교회는 윌버포스같은 국회의원을 배출해야 합니다.

      윌버포스도 오늘 본문을 읽고 묵상했겠죠?

      똑같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인데 음식법이라는 율법에 의해 차별의 선이 그어지고 그 한 가운데 우뚝 서 계시는 예수님을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열려계시고 환대하시는 분이십니다. 세리나 죄인도,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도 사랑하시고 환영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는 그들이 지닌 율법에 따라 세리와 죄인과는 선을 긋고 그들이 있는 자리에는 동석하지 않았으니,  예수님의 주변에는 언제나 세리와 죄인들만 모여들었습니다.

      루가 15: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

      그래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루가 7:34,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한다.”  
      개역개정 -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들은 그 주변에서 그런 예수를 바라보며  비판만 했습니다.

      루가 15:2절,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하며 못마땅해 하였다.”

      무슨 말입니까? 저 사람 - 예수, 그래도 성경에 능통해보이고 기적도 행하는 랍비로 불리는 괜찮은 사람인데, 우리하고만 어울려야지... 왜 세리와 죄인들을 맞아주고 어울려주고 함께 먹고 마시는 거야? 불경한 사람이군....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99마리의 양을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의 비유.
      은전 한 닢을 잃어버려 집안을 온통 쓸며 그 돈을 찾기까지 샅샅이 뒤지는 여인의 비유.

      이 비유를 통해서 그들이 알지 못하는 하느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셨습니다.

      “너희가 그토록 엎신 여기며 죄인이라고 무시하는 저 사람들 - 세리, 죄인들이 하느님께는 너희들과 똑같이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들이다.
      손가락질 받고 무시당하고 엎신여김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죄인들이 아니라, 어떤 수고와 희생을 치르더라도 함께 해야 하는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다.
      너희가 하느님을 경외한다고 애써 율법을 지키며 최선의 노력을 다해 살아가고 있지만, 이런 하느님의 마음을 모르고 있구나.“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이런 하느님의 마음을 알고 회개하는 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7. “잘 들어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10. “잘 들어두어라.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에게 하실 때 세리나 죄인들도 이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회개란 무엇일까요?

      먼저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에게 주님이 바라시는 회개는 이런 하느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조문에 메여 그것을 지키는 삶이 전부인 줄 알고 사는 그들도 실상 하느님의 사랑의 마음을 알지 못한 죄인임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리나 죄인들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귀한 사람들임을 인식하고 율법을 뛰어 넘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고 그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토록 철저히 지킨 십일조와 구제도 그렇습니다. 율법을 지키고자 물질을 바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가난한 죄인들의 삶의 회복시켜주기 위해서 하느님이 사랑으로 주신 명령임을 알고 율법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금식하고 힘써 기도하는 것도 남에게 보이기 위해,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에 더 담기 위해서, 어찌하든지 더 하느님의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금식하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에게 회개란 자신이 얼마나 하느님께 존귀한 존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평생 못 배우고 가난하고 무식해서 율법을 잘 지키지도 못하며   죄인 취급받으며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는데.....  내가 세금을 거둬 로마에 갖다 바치는 세리가 되어,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라는 죄책감과 소외감이 내 마음을 누르고  고개도 못들고 살았는데...  이런 나를 하느님이 존귀히 여기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랑받는 존재임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창조주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귀한 존재임을 알아 누가 나를 엎신여기거나 배척해도 이제는 더 이상 상처받지도 않고 비굴하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고 사는 것으로 인해 더 이상 비겁하게 굽신거리지 않고 정직하게 살고 때때로 율법을 지키지 못해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으로 인해 다시 일어나 당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자화상을 가진 사람들로 회복되는 것이 회개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혹 우리가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고 자위하면서 내 안에 사람을 엎신여기는 마음, 판단하는 마음, 차별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사람으로 회복되어야합니다.
      혹 내가 늘 죄책감과 무가치한 존재라는 열등감으로 살고 있다면 내가 얼마나 존귀하고 사랑받는 존재인지를 알아야합니다.
      
      사실 모든 크리스챤들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래서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골로사이 3장 12절에 이런 우리의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뽑아주신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성도들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입니다.”

      신자들의 정체성을 표현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 표현 중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이라눈 표현이 있습니다. 영어로 ‘dearly loved’라고 합니다.

      여기서 ‘dearly’라는 말은 ‘애정을 가지고, 사랑스럽게, 극진히, 고가로, 많은 희생을 치르고, 대가를 지불하고‘라는 뜻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이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이 존귀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나를 극진히 여기시고 나를 존귀히 여기시기에 나를 하느님의 자녀 삼으시고자 많은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그분의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대속의 희생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요한 3:16,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모든 사람이 멸망하지 않도록” - 내가 멸망하지 않도록 하시고자...
      
      길 잃은 양의 결국은 무엇일까요?
      죽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모른 채 살아가는 영적인 죽음, 그렇게 살다가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한 후에 영원히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멸망의 실체입니다.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은 어떤 신세가 될까요?
      집안 구석에 처박혀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가치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어 하느님을 알지 못한 채, 가치없는 한 평생을 살다가 영원히 죽게되는 우리였는데,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 안에서 가치있는 인생을 살도록 하시고자 예수님은 자기의 목숨을 십자가에 바치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dearly loved’ 사람들입니다.

      로마 5:8,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사도바울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율법에 열심을 내며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정죄하며 율법의 반역자인 예수도당을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사울이 이제 이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는 자신이 누구보다도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딤전 1: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틀림없는 것이고 누구나 받아들일 만한 사실입니다. 나는 죄인들 중에서 가장 큰 죄인입니다.”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해주시고 하느님의 존귀한 자녀로 구원하여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도 바울은 그 사랑에 매여 그 사랑 -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하느님의 사랑을 아시나요?
      내가 하느님의 dearly love를 받은 존귀한 존재임을 아시나요?
      그 사랑으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사랑하시나요?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시나요?
      이 사랑을 알지못한채 무가치한 인생을 살다가 영원히 죽을 길 잃은 양들에게 이 놀라운 하느님의 사랑을 알리고 보여주고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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