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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제자교회대한성공회 제자교회

  • [2009년 3월 1일] 1베드 3:18-22, 마르 1:9-15죄의 심각성
  • 청지기
    조회 수: 1717, 2009-03-02 08:44:47(2009-03-02)
  •   지난 수요일 성회축복예배를 드리면서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기도 극기 자선 등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여정을 시작한 것입니다.

      새벽기도, 하루 7번 화살기도, 금식기도, 성경쓰기, 극기헌금 등 일반적인 실천 사항과 함께 전도대상자의 영혼 구원을 위한 기도와 섬김이 있기를 바라고 각자가 영적인 성숙을 위한 다짐 들이 잘 실천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삼일절입니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살던 선조들이 자유와  해방을 부르짖고 투쟁하던 날입니다. 우리 민족은 여전히 미완의 해방으로 고통 중에 있습니다. 해방은 남과 북의 분단으로 이어져 여전히 남과 북이 가져오는 민족의 고통은 크기만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조국의 해방을 위한 독립운동에 삼일 만세운동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자리에 학생 청년들이 많이 있는데 평화와 통일을 위한 고민이 있고 기도가 있고 실천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기독교가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이 민족에게 희망을 주고 희망이 되는 교회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다음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마돈나, 로빈 윌리암스, 교황, 그리고 저 엘리야신부?

      십자가를 달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모양의 목걸이 귀걸이 등을 하고 다닙니다. 집마다 방마다 차에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나무 십자가, 철 십자가, 금으로도 만든 십자가로 목걸이 귀걸이 등 액세서리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교수대를 목걸이로 귀걸리로 걸고 다니고 집 거실 한 가운데에 비치하고 있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을 할까요?  

      십자가는 로마 시대 당대 사형 집행 도구였습니다.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잔인한 사형 방법 중에 하나였습니다. 로마인조차도 너무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사형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337년에 폐지되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사형당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기독교는 예수님의 죽음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니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복음서의 1/3이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신약성경 대부분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매주일 갖게 되는 성찬식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교회의 건축양식조차도 종종 십자가 모양입니다. 서울대성당의 모양이 그렇습니다.

      국가적인 영향력을 지녔거나 혹은 세계를 변화시킨 지도자들은 그 시대에 여향을 끼친 그들의 삶과 가르침으로 인해 기억되고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그 누구보다도 더 크게 세계 역사를 뒤 바꾸어 놓은 분이시지만, 예수님은 그 분의 삶과 가르침보다는 그분의 죽음으로 인하여 기억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의 죽음에 그토록 주목하는 걸까요?  그분의 죽음이 소크라테스나 부다, 공자나 순교자들, 혹은 전쟁 영웅의 죽음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오늘 서신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느님께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으로는 죽으셨지만 영적으로는 다시 사셨습니다.

      죄가 나에게 가져오는 결과가 무엇이기에 죄 없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을까요?

      종종 사람들은 말하기를 “나는 기독교가 필요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나는 행복해요. 이대로가 좋아요. 내 삶은 풍족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려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죠.”라고 말랍니다. 분명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에게 아름답고 고상한 면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또 다른 면이 있습니다. 어두운 면말입니다. 우리가 잘못인 줄 알면서도 행하는 말과 행동들 말입니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우리는 스스로 잘못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범한 일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정직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로마 3: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잘못이야’라고 말하기를 참 어려워합니다. 나는 잘못과 연약함이 있는 죄인이라는 생각보다는 이만하면 괜찮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교통사고가 나면, ‘내 잘못 때문이다.’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합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인정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다들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중요한 것은 누구와 비교하느냐입니다.

      주일오후에 남자 교우들이 탁구들을 많이 칩니다. 저도 웬만큼 사람들과 맞춰서 칠 수 있는 괜찮은 실력입니다. 아마 저보다 실력이 조금 부족한 사람들하고만 치면 스스로 잘 치는 실력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임용우 교우와 시합을 하면 여지없이 깨집니다. 상대가 안됩니다. 그러면 임용우 교우께서 청소년 대표와 시합을 하면 어떨까요? 국가대표와 시합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한 점도 얻지 못하고 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계정상급의 선수들이 하는 탁구 경기를 보면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이 말은 하느님의 기준에서 보면 우리는 한참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에 비추어 보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영국성공회 신부님이 적은 글을 보았습니다.
      신부님이 자신 만만한 어떤 청년과의 면담을 했다고 한다.
      청년 - ‘저는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필요 없습니다.’
      신부 - 여기 이때까지 산 사람들을 비교하는 척도가 있다고 합시다. 나쁜 사람은 저 아래쪽에 그리고 훌륭하게 산 사람은 저 위쪽에 표를 한다면 저 아래 쪽에 는 누가 기록될까요?
      청년 - 스탈린 히틀러 등.
      신부 - 그러면 저 위쪽에는 누구?
      청년 - 마더 테레사 같은 사람.
      신부 - 동의하시겠지만 우리 모두는 어디 중간쯤에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마 저 아래 쪽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저 위쪽에 있을 것입니다.
      청년 -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라고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고 합니다.
      신부 - 그럼 그 기준은 어디일까요?
      청년 - 천장?
      신부 - 이 구절을 보십시오. 그 기준은 하늘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기준에 도저히 다다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삶이란 다 그런 것 아니에요? 모두 같은 운명의 배를 타고 있다면 그게 문제될 것이 있나요?” 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심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지은 죄의 대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란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는 삶의 태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SIN, GUILT, CRIME, PRIDE...
      죄의 근원은 하느님과의 깨어진 관계입니다. 창세기 3장의 이야기입니다. 그 죄의 결과가 가져오는 결과, 즉 그 대가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심각하기만 합니다. 이제 이 죄가 나에게 가져온 대가를 네 가지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

      1. 죄의 오염성
      마르 7:20-23,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안에서 나오는 것은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다. 이런 악한 것들은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이런 것들이 나의 삶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일들을 하지 않는데요.”라고 당신이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들 중에 단 하나만이라도 우리의 삶을 망가뜨리기에 충분합니다.
      십계명이 시험 문제처럼, 그중에 ‘세 가지 만을 골라서 시도하는 것’이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만약 우리가 율법을 하나라도 어기면 전부를 어기는 죄를 짓는다고 말한다.
      야고 2:10, 누구든지 계명을 다 지키다가도 한 조목을 어기면 계명 전체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한번이라도 교통법규를 어기면 그린카드는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한 번의 위반이 우리의 삶을 더럽힙니다.

      우리는 죄에 오염되어 일그러지고 깨어진 하느님의 형상이 우리의 모습인 줄을 알고 살고 있습니다.

      2. 죄의 권세, 중독성
      나쁜 짓은 중독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8:34, "정말 잘 들어두어라.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이다.

      이것은 자신의 경우보다 타인의 경우를 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약을 자주 사용하면 그것에 곧 중독된다는 것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술을 자주 즐기다 보면 알콜 중독에 걸립니다.

      자기중심성의 중독. 고약한 성미, 질투, 오만, 자랑, 이기심, 중상모략 혹은 성적인 방탕에 중독되는 것 역시 가능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깨뜨릴 수 없는 사고방식이나 습관적인 행동에도 중독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죄의 종이 된 상태입니다.

      리버풀 주교를 지낸 J.C. 라일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모든 죄는 손과 발이 사슬에 매인 불행한 죄수들의 무리를 거느리고 있다. 그 불쌍한 죄수들은 때로 자신들이 대단히 자유롭다고 우쭐거린다. 이런 노예생활은 어디에도 없다. 죄는 진실로 가장 고약한 주인이다. 도중에는 비참함과 실망, 결국에는 절망과 지옥, 이것이 죄가 자기의 종들에게 주는 유일한 품삯이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오간데없고 죄의 종이 인간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3. 죄의 형벌성
      인간의 본성에는 정의를 갈망하는 무엇인가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강효순 같은 살인마는 당연히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아동 성추행범을 보면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하는 인간 잡종이라고 분노합니다.

      내 안에 있는 정의심이 일으키는 복수심같은 정서가 분노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분노입니다. 죄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느끼는 것은 옳은 것이며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이 벌을 교묘히 피해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 당사자가 ‘나’라면 다릅니다. 피해가고 싶습니다. 내 안에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모습이 팽배합니다.

      저는 월요일마다 동백지구에 있는 신학전문대학원 다녀옵니다. 올 때 민속촌 앞에서 좌회전을 받아야 합니다. 3개의 차선 중에 두 개 차선이 좌회전 차선이고 하나는 우회전 차선입니다. 대개 좌회전 두 개 차선에 차들이 길게 늘어서도 우회전 차선은 비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좌회전  신호가 떨어지면 옆 우회전 차선에 있는 차들이 좌회전을 하며 끼어들어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이런 것들은 사진을 찍어서 벌점과 벌금을 물려야 하는데, 왜 경찰은 없는거야...

      제가 우회전 차선에 서 있다가 좌회전 신호를 받아 끼어들 때가 있습니다. 약속이 있어서 빨리 가야한다는 제 나름대로의 다급함이 스스로의 명분이 되어 차선을 위반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라는 말이 있는 위선적인 사회입니다.

      벌을 받아 마땅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죄뿐만이 아닙니다. 나의 죄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범한 죄도 공의로우신 하느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좀 길지만 성경을 읽어봅시다.
      로마 1:21-32, 32, 그런 모양으로 사는 자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
      이 죄의 대가는 죽음입니다.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4. 죄의 분리성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할 때, 바울이 말하는 죽음은 육체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결과를 낳는 영혼의 죽음을 말합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이사 59:1-2, 야훼의 손이 짧아서 구해 내지 못하시겠느냐?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겠느냐? 너희가 악해서 너희와 하느님 사이가 갈라진 것이다. 너희가 잘못해서 하느님의 얼굴을 가려 너희 청을 들으실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가 하는 악한 일들이 이 벽을 만드는 것입니다.
      기도하려고 해도 벽 같은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나의 잘못은 타인과의 관계에도 벽을 만듭니다.

      죄는 우리의 삶과 인격을 더럽히어 하느님의 형상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죄는 우리를 중독시켜 죄의 종으로 살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과의 영원한 분리인 지옥 형벌은 죄인인 우리가 받아야 하는 마땅한 형벌입니다.
      이렇게 죄는 심각한 대가를 우리에게 치르도록 합니다.

      누가 우리를 이렇게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하는 죄로부터 구원할 수 있나요?

      다시 베드로전서 3장 18절을 읽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느님께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으로는 죽으셨지만 영적으로는 다시 사셨습니다.

      사랑의 하느님이 그분의 외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신하는 죽음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사순절은 이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의 은혜를 되새기는 기간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우리에게 그분의 죽음을 기억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 성찬기도문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죄인 중에 죄수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서도 이 고백이 주님께 올려지기를 바랍니다.
      찬양 - 그는 아무런 죄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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