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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년 2월 22일] 히브리4:14-16,마르코2:1-12예수는 누구인가?
  • 청지기
    조회 수: 1711, 2009-02-23 14:04:37(2009-02-23)
  •   가파르나움은 예수님이 처음으로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시고 그 마을의 많은 사람들의 병을조쳐주셨던 곳이다. 예수님은 이미 치유의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파다했다. 예수가 다시 그 마을로 돌아오시게 되었다. 아마도 시몬의 장모의 집에 머무셨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셨다.

      한참 가르침이 진행되고 있을 그 때에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들고 나타났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 앞으로 갈 수없자 이 사람들이 지붕으로 올라가더니 지붕 한 가운데를 벗겨내고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 보냈다. 예수님이 이들의 행동을 보셨다. 예수님을 향한 대단한 믿음의 행동이었다.

      5절, ‘예수님이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먼저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믿음이란 내가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다.
      예수님이 내게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믿음은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아마도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친구가 지닌 예수님에 대한 생각은, 즉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는 치유의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친구의 인생을 힘들게 하는 중풍병이라는 문제가 해결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 생각, 그 믿음은 지붕까지 벗겨낼 정도의 실천력을 보여주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한다.
      즉 그 믿음을 인정해 주셨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지닌 예수님에 대한 생각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
      그리고 그 생각과 지식이 여러분의 삶을 움직이고 있는가?
      만일 생각으로만 지니고 있는 지식이라는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던 것이다.

      자 성경을 좀 더 보자.
      이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어떤 의미일까?
      중풍병자나 네 친구나 그들에게 가장 큰 인생의 문제는 중풍병이라고 생각했다. 이 병만 나으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 인생의 근본문제는 죄의 문제다. 죄를 용서받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는 말이다.
      
      왜?
      죄는 하느님과 사람을 갈라서게 하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받아야만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한다.
      구원을 받으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
      그래서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는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된다.
      그러면 눈에 보이는 육신의 문제를 넘어서는 의연한 삶을 살게 된다.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 의지하는 용기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죄의 문제가 인생의 근본 문제임을 알게 하시고 또
      그들이 지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확장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치유를 행하는 능력의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문제 해결을 위한 소원성취를 위한 능력의 사람 정도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순한 치유자가 아닌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진정한 구원자라는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응이 어떠한가?
      6절,
      아마도 일반 사람들은 단순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율법학자들은 달랐다.
      하느님에 대해서 좀 알고 있다는 이들은 속으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판단하고 있었다.
      7절,
      한마디로 ‘감히 사람인 주제에...’

      율법학자들에게 예수는 좋은 가르침을 주는 스승 정도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중풍병자와 네 친구에게는 치유의 기적을 베푸는 능력의 사람정도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확장되기를 원하셨다.
      ‘나는 너희의 죄를 용서해 주는 하느님과 같은 존재이다.’
      ‘나는 너희의 죄를 용서해 주고 구원을 베풀어 주는 그리스도이다.’

      이것은 직접적인 주장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이  자신이 하느님과 같은 존재임을 드러내시는 간접적인 주장이다.
      마태 25:31,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면,’

      예수님이 심판주라는 것이다. 역시 하느님과 같은 존재임을 드러내는 간접적인 주장이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는 직접적인 주장도 있다.
      마르코 14:61-64, "네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그렇다.-"

      이 이야기로 인해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자신이 신이라는 하느님과 같다는 주장은 유다인 에게는 죽어 마땅한 신성모독이었기 때문이다.      
      
      요한 10:33 ; "당신은 한갓 사람이면서 하느님 행세를 하고 있지 않                    소?"
      요한 20:28-29 ;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너는 나를 보고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행복하다."

      이것이 예수님의 자기 이해였다. 예수님의 자기 정체성은 당신 자신이 하느님이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느님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계셨기에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가르침을 주셨다.
      
      * 하느님과의 관계 - 나에게 와라(요한 14:6),
      * 인간 내면 깊은 허기짐
       (사랑의 굶주림-프로이드. 안전-융. 중요성-아들러)
       -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
       '너희의 허기짐을  채우고 싶으면 나에게 오라'.
      * 어둠과 우울함과 환멸, 그리고 절망 - 나는 세상의 빛(요한 8:12).
      * 죽음에 대한 두려움 - 나는 부활이요 생명(요한 11:25).
      * 걱정 근심 염려, 공포와 죄의식 -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8).
      * 삶의 방향과 모범 - 나를 따르라(마르코 1:17)
      * 예수를 영접한 것이 하느님을 영접하는 것(마태 10:40)
      * 예수를 환영하는 것이 하느님을 환영하는 것(마르코 9:37).
      * 나를 본 자는 하느님을 본 자(요한 14:9) - 하느님의 모습을 알고 싶거든 나를 보거라.

      이 자리에도 율법학자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예수? 좋은 가르침을 준 위대한 선생이지...

      하지만 예수님은 단순한 스승, 성인을 넘어서는 그분 자신이 하느님이시다. 성자라는 두 번째 위치를 지니신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다.
      심판 날에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구원자이시다.

      오늘 서신 히브 4:15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히브리서 4장 15절의 말씀이 이것이다.
      ‘우리의 사제는 연약한 우리의 사정을 몰라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 유혹을 받으신 분입니다.’ - 완전한 사람이지만,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셨습니다.’ - 또한 완전한 하느님이십니다.

      참 사람이고 참 하느님이신 예수!
      그렇다면 참 사람이시고 참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할까?

      히브리 4:16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은총의 옥좌로 가까이 나아갑시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받아서 필요한 때에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참 사람으로 오시어 우리 인간의 모든 형편을 다 경험하시고 아시는 분으로,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느님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실 수 있는 분이시므로.
      우리가 이 예수님을 안다면 우리는 기도할 것이다.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것이 실천하는 믿음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느님 앞에 나아가면 필요한 때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의 특권인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요한 14:12-14, ‘12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제 아버지께 가서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주겠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내가 이루어주겠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우리들!
      이 땅에서 가장 큰 특권을 누리며 살아가는 존재가 우리다.

댓글 1

  • 니니안

    2009.02.27 13:44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그것도 지붕을 뜯고서 고침받고자 행한 믿음은 병자자신의 믿음(자신은 병자니 스스로의 갈망이 크겠지만)도 믿음이지만 저는 친구들이 정말 의리와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지붕을 뜯는 용기와 친구를 일으키는 우정의 열매에 더욱더 도전이 되어 나의 친구에 대한 사랑은 어떤지 돌아 봅니다.
    지붕을 뜯고 나갈 수 있는 의리? 그에 대한 믿음! 그에 따르는 수고를 기꺼이 할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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