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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제자교회대한성공회 제자교회

  • [2008년 6월 8일] 요한 17:9-23, 에페 5:21-33 하나 됨 - 제자도
  • 청지기
    조회 수: 3377, 2008-06-08 23:58:25(2008-06-08)
  •   지난 한 주, 성경 말씀과 성령님의 말씀 따라 주님의 음성대로 살아오신 줄로 믿습니다. 지난  5월이 가정의 달이었는데, 성령세미나를 진행하다 보니 가정에 관한 설교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과 다음 주일에는 가정에 관계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알렉산더대왕은 죽기 전에 이렇게 유언했다고 합니다.
      “내가 죽거든 관의 양 옆에 구멍을 내어라. 그리하여 내 두 손이 관 밖으로 나오게 하여 장례를 치르라.”
      대왕의 유언을 들은 신하들은 어리둥절하여 그 이유를 왕께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온 천하를 쥐고 흔들었던 이 알렉산더도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빈손으로 떠나간다는 것을 만민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죽음을 앞 둔 사람의 말 속, 즉 유언에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깨달은 진리나 자신의 가장 깊은 바람, 소망, 꿈 등이 담겨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마지막 소원은 들어 주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혹시 지금도 기억하며 지키고 있는 선친의 유언이 있으신가요?

      저의 어머님은 급성간염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유언을 남기지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새벽기도를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제 마음에는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며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셨던 어머니의 모습이 유언처럼 새겨져 있습니다.

      혹 여러분이 지금 죽게 된다면 어떤 유언을 남기겠습니까?

      그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유언을 남기셨을까요?
      흔히 우리는 마태오 28:18-20말씀을 예수님의 유언으로 기억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우리교회는 이 명령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제자교회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가르치든지 가르침을 받든지 하라!”
      사역반(12) 졸업 축하, 전도폭발훈련(3) 졸업 축하,
      남(7) 여(6) 제자반 종강, 성장반(4) 진행, 101반 - 201반 개강 등

      하지만 진짜 예수님의 유언은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제 몇 시간 있으면 하느님의 마지막 희생양으로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아시고 비장한 마음으로 자신이 불러 모아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던 제자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11절,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지만 이 사람들은 세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특별히 ‘하나 됨’을 기도하시며 유언으로 남기신 주님의 음성이 메아리쳐 오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시대는 하나 되지 못한 분열의 아픔을 크게 겪고 있습니다.
      남과 북으로 분단된 조국의 현실, 미국쇠고기 F.T.A로 인한 국론 분열의 아픔, 거기에 주님의 몸 된 교회조차도 여러 갈등들이 존재하고 분열되어 있는 것, 그리고 부부가 갈라섬으로 가정이 파괴됨으로 겪게 되는 진통들 등 .

      이렇게 분열과 갈등이 심한 이 시대 한 가운데를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챤에게 ‘
    하나 됨’ 이라는 주님의 유언은 엄청난 무게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 됨이 제자도이다.”

      그리고 주님은 주님의 제자들이 진리에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유언의 말씀대로 ‘하나 됨’을 위하여 헌신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 제자도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하나가 되라.”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느님이 하나이신 공동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질 자체가 공동체적인 존재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 됨을 어떻게 이루어가는 지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하나 됨을 위하여 성육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 되는 삶을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과 거룩하신 하느님을 하나 되게 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제자도를 살아감으로 주님의 유언대로 ‘하나 됨을 이루는 공동체’를 세워갔습니다.

       ‘사랑으로 하나 됨을 이루는 공동체’ - 이것을 우리는 예루살렘교회비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사실 성령의 능력으로 예루살렘교회공동체를 세우며 하나 되는 삶을  살아간 12제자들도 이전에는 주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었습니다.
      “로마를 전복시키십시오.”
      “나와 내 동생을 주님의 보좌 양 옆에 앉혀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직전까지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려는 요청을 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와 있는 우리도 성령을 받기 전 12제자의 모습 같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혹 12제자처럼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이 시간 주님 앞에 와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우리들도 마침내 ‘하나 됨을 이루라’는 주님의 유언을 이루어드린 초대교회 제자들처럼 ‘하나 됨’이라는 제자도의 삶을 살아가기를 결단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 됨’이라는 제자도를 배우고 살아가도록 하시고자 두 개의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가족과 교회입니다.

      가족은 태생적으로 주어진 공동체입니다. 가족을 통해서 사람은 공동체를 경험하며 인간다움을 배워갑니다.

      교회는 선택적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 됨을 경험하고 배워가는 주님이 세우신 대안적인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에게서 편향적인 모습이 보입니다.
      교회만을 공동체로 여기고 교회를 위한 투신만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교회가 주님의 피 값으로 세우신 존귀하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몸이기에 교회 공동체를 주님의 유언대로 ‘하나 됨’을 이루어지는 공동체로 세우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신자의 사명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교회보다도 더 원초적인 공동체인 가정 공동체의 하나 됨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가정은 프라이버시, 사생활 침해-개인의 영역이라는 인식의 벽에 막혀서 진짜 속사정을 잘 알지 못합니다. 부부관계가 어떤지,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가 어떤지를 깊이 알 길이 없습니다.
      
      주일에 잠시 만나보면 다들 별 문제 없이 잘 사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가정 안에서 주님의 유언대로 ‘하나 됨’이라는 제자도를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가정 안에서 하나 됨으로 인한 행복을 누리고 계십니까?
      결혼하신 분들은 부부관계에 진정한 하나 됨을 이루고 계십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인 남자와 여자가 식당에 갔을 경우 그 두 사람이 부부인지 아니면 불륜의 관계인지를 간단하게 확인하는 방법이 있답니다.

      두 사람이 각자 메뉴를 보고 각각 음식을 주문하면 부부요, 남자가 메뉴판을 들고 여자가 원하는 음식까지 대신 주문하면 불륜의 관계라고 합니다.  
      식사하는 동안 두 사람이 즐겁게 대화를 나누면 불륜의 관계요, 아무 말 없이 밥만 먹으면 부부랍니다.  
      식사가 끝난 뒤 여자가 식사비를 지불하면 부부지만, 남자가 돈을 내면 불륜의 관계랍니다.  
      식당을 나온 뒤 두 사람이 자동차를 타고 묵묵히 집으로 가면 부부고 서로 깔깔대면서 드라이브를 즐기면 불륜의 관계랍니다.

      누가 지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우스개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우스개는 아무 의미 없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어떤 우스개이든 그 속에는 항상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의 한 단면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 담겨 있는 진실이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마음이 통하고 사랑하여 한 몸을 이루고 싶어 결혼한 사람들이 결혼 뒤에 일정한 기간이 흐르고 나면, 자기 배우자를 외간 남자나 여자보다 못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세월이 흐를수록 자신의 배우자를 더 깊이 사랑하는 것이 당연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 카드회사에서 30-40대 부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발표했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현재의 배우자와 결혼하겠느냐?”는 항목에 대해 남자는 65.2%가 “그렇다”고 나머지 34.8%는 아니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세 명 중에 한 명입니다. 반면에 여자는 다시 결혼하겠다고 대답한 여자는 33.3%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나머지 66.7%, 그러니까 세 명중에 두 명은 다시 결혼하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혼을 고려해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남자의 27.8%, 여자의 43.4%가 “그렇다”고 했습니다.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여자의 비율이 남자의 두 배 가까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상당수의 남자들이 자기 아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욱이 자기 아내가 자신과의 이혼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챤 부부의 이혼율이 일반인의 이혼율과 거의 같다는 또 다른 설문조사에 비추어 보면, 부부사이의 이런 불행이 남의 얘기가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도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이런 위기와 불행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부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천주교 여형구 신부님은 남녀의 결혼을 두 번째 출생으로 비유하면서 첫 번째 출생보다 두 번째 출생인 결혼이 더 중요한 이유를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출생은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지만 두 번째 출생은 자신의 선택사항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첫 번째 출생의 시간보다도 두 번째 출생의 시간이 훨씬 길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 출생기간 동안에는 자신의 권리를 누리기만 하면 되지만 두 번째 출생 이후에는 서로 상대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첫 번째 출생보다 두 번째 출생인 결혼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여형구 신부님의 말씀은 백번 타당합니다.

      결혼도 못한 천주교신부님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을 깊이 이해하고 계신지... 참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은 ‘중요한 것은 중요하고 귀하게 다룰 때에만 계속 중요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도 우리 모두가 성공회 제자교회 성도들인데 교회 안에서나 가정에서 ‘하나 됨’이라는 제자도를 살아가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유언대로 ‘하나 됨’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가정 공동체를 세워가기 위해서는 우선 부부가 하나 되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부부가 하나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배우자를 천생배필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저히 살아계신 하느님이 나의 삶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지금의 상황과 조건을 주님이 허락하신 것으로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물론 내가 선택하여 결혼한 배우자이지만, 나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이 지금의 이 사람과 가정을 이루어 살게 하신 것입니다. 아멘?

      근대 중국의 석학으로 불리는 1899년에 태어난 오경웅 박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중국과 미국 그리고 프랑스에서 법철학을 공부한 그는 중화민국 헌법 기초와 유엔헌장 구성에 참여한 세계적인 법철학자인 동시에 뛰어난 문필가였습니다. 그 정도의 지적 수준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의 아내 역시 지성인이었음에 틀림이 없을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놀랍게도 낫 놓고 기억자로 모르는 일자무식꾼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우리나라도 그랬지만, 자식의 배우자를 자식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부모가 일방적으로 선택하여 결정했던 시기였습니다. 오경웅 박사의 아버지는 며느리감으로 배운 여자보다는 순박한 못 배운 여자가 낫다는 고루한 생각으로 일자무식꾼의 며느리를 택했습니다.
      오경웅 박사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오경웅 박사는 평생 아내를 존중하며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둘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았습니다. 크리스챤이었던 그는 자신의 아내가 하느님이 아버지를 통해서 맺어주신 천생배필이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일자무식의 아내는 다른 여자와의 비교 대상이 아닌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절대적인 존재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우주만물과 자신을 창조하셨음을 믿기에 배우자 역시 하느님께서 돕는 배필로 자신을 위해서 짝지어 주신 절대적인 존재로 믿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창조하시고 짝지어 주신 하느님의 법칙에 따라 모든 난관과 장애를 극복하며 둘이 한 몸을 이루어 참 사랑의 공동체로 아름다운 인생을 추구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법칙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지만 하느님은 공동체를 세워가는 부부관계를 위해서 법칙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부부가 서로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법칙이 오늘 서신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아내의 ‘자기 부인’은 교회가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내 여러분, 교회가 주님께 복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하십니까?  
      교회 봉사도 하고 기도와 말씀으로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남편에게 불순종하는 아내가 있다면 그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남편의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어 자기의 몸을 바치신 것처럼 자기 몸을 바치도록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편 여러분,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신 예수님처럼 아내들을 몸 바쳐 사랑하십니까?

      부부가 일심동체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오랫동안 이해해 온 것처럼 여자가 남자의 종속물이 된다거나, 혹은 심성이 약한 쪽이 강한 쪽으로 흡수되고 동화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내는 순종이라는, 남편은 헌신이라는 자기부인을 통하여 서로를 온전히 수용함으로써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새로운 존재인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물감의 배합과 같습니다. 같은 양의 파랑물감과 노랑물감을 한데 섞으면 서로 다른 쪽을 흡수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를 부인하는 가운데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여 전혀 새로운 초록이 나타납니다.

      하느님이 디자인하신 공동체가 이런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함으로 전혀 새로운 하나 됨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순종, 헌신이라는 자기 부인을 너무 무겁게 거창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믿음도 결혼도 나의 선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주님을 믿을 때 세속과 정욕과 마귀를 버렸습니다.
      내가 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을 때 이 지구상의 다른 여자는 다 버렸습니다. 철저한 자기부인이었습니다. 이것을 계속 지켜나가는 믿음의 삶이 또한 자기 부인입니다. 이것을 틈타는 그 어떠한 유혹이나 그릇된 생각을 무 자르듯 잘라내는 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순종하라는 주님의 말씀,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서 몸을 바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준님의 말씀,

      이 말씀이라는 성령의 검으로 하나 됨을 깨뜨리려는 모든 유혹과 생각을 잘라내십시오. 하나 됨을 온전히 이루어가며 주님의 비전을 성취해 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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