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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년 3월 23일 부활주일] 요한 20:1-8    수의를 부활의 상징으로 바꾸시는 하느님
  • 청지기
    조회 수: 2738, 2008-03-24 17:05:14(2008-03-24)
  • 일요일 이른 아침, 베드로와 요한은 한 소식을 접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 졌어요.” 다급한 마리아의 목소리였습니다.
    그 즉시 두 제자, 요한과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먼저 도착한 요한은 예수님의 무덤을 보고는 그만 눈앞의 광경에 어안이 벙벙하여 입구에서 그만 얼어버렸습니다.

    무엇을 보았기에 요한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일까요?

    유대인들의 무덤은 돌무덤이었습니다. 바위가 약해서 그것을 파서는 무덤으로 사용했습니다. 입구는 큰 돌로 막아 놓았습니다.

    요한은 빈 무덤 안으로  ‘수의와 수건이 놓인 것’을 보았습니다.
    7,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수의와 함께 흩어져 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잘 개켜져 있었다.

    엊그제 장례를 치르고 안치한 예수님의 시신은 오간데 없고 수의와 수건만이 놓여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기록이 아주 중요합니다.

    공동번역에 ‘흩어져 있는’으로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 헬라어로 kei/mai 라고 하는데, 5,6,7절에 같은 단어가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원래의 뜻은 ‘놓여있다. 개켜있다. 둘둘 말려 있다. 그대로 접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동번역의 ‘흩어져 있다’라고 번역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개역개정판으로는 ‘놓여있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요한은 원래대로 가지런히 놓여 있는 수의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수의가 아무렇게나 벗겨져 흐트러져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안이 벙벙해 진채로 무덤 앞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친구들이 가져갔다면 수의에 싸인 채 그냥 가져가지 않았을까?’
    ‘적들이 가져갔다 해도 역시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누가 이렇게 했단 말인가?’

    이것이 요한의 의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의문이 믿음을 갖게 하는 깨달음으로 이어졌다고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20:7-9, “7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수의와 함께 흩어져 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잘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9 그들은 그 때까지도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8절의 다른 제자란 요한을 말하는 것입니다.

    빈 무덤과 잘 개켜져 있는 수의,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것으로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빈 무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건임을 다음 8가지 사실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의 빈 무덤은 지어낸 이야기로 여길 수 없을 정도로 부활사건이 일어난 근접한 시기에 작성된 초기 자료들 속에 이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2. 복음서들에 빈 무덤을 여인들이 발견했다고 한 것입니다.
    여자들이 증인의 효력을 갖지 못하던 문화적인 상황 속에서 만일 복음서의 기록자가 그 이야기를 꾸며서 쓰려고 했다면 여자가 아닌 남자들이 발견했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무덤자리는 제자들만이 아니라 그를 죽인 적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의심을 품은 사람들은 직접 가서 조사해 볼 수 있었습니다.
    4. 오히려 적대자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홈쳐갔다고 주장했습니다. 빈 무덤 안에 있는 세마포와 머리를 싸맸던 수건이 잘 개켜져 있다는 요한의 기록이 이 주장을 반박하는 것입니다.
    5. 예수님의 부활은 초대교회의 핵심적인 주장이었습니다. 오늘 서신에서 베드로도 바로 이것을 증거합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수차례 나타나시며 즉각적으로 일어난 반응입니다.
    6. 십자가 처형이 발생했던 바로 그 도시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교회가 기적적으로 출현했고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7. 부활이 없다면, 바울 같은 적대자가 예수 동생 야고보 같은 반대자가 회심해서 예수님을 위해 순교한 이유를 설명해 주지 못합니다.
    8. 교회사 2,000년 동안 바울로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극적으로 회심하고 삶이 바뀐 증인들이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라는 학자는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음에 대한 신뢰할 만한 증거가 없다면, 초대 기독교 공동체는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면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시간, 이 자리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 증거들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첫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이 미래에 우리의 부활을 확증해 주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기 전날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만일 거기에 있을 곳이 없다면 내가 이렇게 말하겠느냐?”

    예수님이 천국에 우리의 처소를 마련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이 약속은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이 천국의 약속을 확증하시는 사건입니다.

    어느 종교나 죽음 이후의 내세에 관심을 갖습니다. 불교에서는 이생에서의 업보로 내세에 또 다른 생명체로 환생한다고 합니다. 이슬람에서는 술과 여자가 있는 파라다이스가 있다고 합니다. 이생의 삶을 초월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그려진 것들입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말하는 천국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 이후에 천국과 지옥이 실재함 증명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는 자들은 아버지 집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할렐루야!

    빈 무덤과 그 안에 잘 놓여 있는 수의와 수건을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고 간증하고 있는 요한이 이것을 기록해 놓은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20:31,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토록 참혹하게 수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오직 한 가지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를 믿는 자들에게 천국의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십자가의 고난을 몸소 감당하신 것입니다.

    채찍에 찢겨 피 범벅이 된 육체와 죽기까지 순종하신 고결한 영혼에 가득한 주님의 사랑의 계획은 천국의 영원한 생명에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믿음으로 천국의 영생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도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느님의 능력 안에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수의를 생각해 봅시다. 수의는 실패와 죽음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과 12제자가 추구해 왔던 하느님 나라의 실패로 보였습니다. 그 중심에 서 있던 예수의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수의는 예수와 요한의 미래가 천에 싸여진 채 돌 무덤에 봉해졌음을 알리는 실제적인 물건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금요일의 비극이 첫 부활절의 승리로 변하리라는 것은 요한은 몰랐습니다.
    요한 20:9, 그들은 그 때까지도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금요일의 비극이 첫 부활주일의 승리로 바뀌는 데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요한이 일요일이 되었을 때 거기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죽음의 이후 절망의 토요일에도 요한이 예수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일요일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가 요한을 찾아가니 거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에 죽으셨습니다. 주님의 몸에는 이제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가 무덤에 묻혔고 요한의 미래도 묻혀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왜 떠나지 않고 거기에 있었을까요?
    부활을 믿어서일까요?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이미 죽은 몸이었습니다.
    즉 일요일의 환희를 기대하고 거기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거기에 그냥 있었을까요?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성모를 요한에게 부탁했기에 마리아를 모시고 있느라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미루어 생각해 보면, 요한이 그곳에 머물러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는 기적을 행하는 자였습니다. 혹 위대한 스승이었고 이스라엘 민족의 희망인 메시야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에게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이자 그 이상이었습니다. 예수는 친구였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버리지 않습니다. 친구가 죽어도 우정은 살아있습니다. 요한은 죽은 친구의 곁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요한에게 배어있는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다락방에서도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죽으시기 직전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예수님의 발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사를 지낸 때에도 무덤까지 한달음에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십자가의 길을 동의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남아있었습니다.
    친구를 사랑했기에 그렇게 고통스러운 토요일에도 그 자리에 있었고 마침내 첫 부활절 새벽에 빈 무덤의 기적을 본 것입니다.  

    요한은 죽음의 옷자락에서 생명의 능력을 보았고 부활의 주님을 믿게 되었고 그의 삶이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수의처럼 슬픈 것을 사용하셔서 한 사람의 삶을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손 안에서, 결혼식장의 빈 포도주 항아리는 능력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의 볼품없는 구유는 헌신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사형의 도구인 십자가는 그분의 사랑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제 수의가 부활의 증표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하느님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하느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바로 그분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있는 오늘의 비극의 흔적을 취하시어 승리의 상징으로 바꾸실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서미영 아가타 교우님이 생각났습니다.
    30대 중후반의 나이에 발생한 암으로 겪은 고통, 죽음의 두려움. 감사하게도 ‘왜? 나에게 이 고통이 있는 것이냐’고 의문이 들어도 다시 복음 앞에 돌아와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주님 곁에 머물렀습니다.  
    천국의 영생이라는 구원의 확신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어제는 남편 김동수 교우가 세례를 받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가정 안에 실패와 비극의 상징인 수의를 부활과 생명의 상징으로 바꾸고 계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을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부활의 능력으로 이 가정을 회복시키시고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성가정으로 세우실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지 않고 있으면 이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한 그대로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부활의 능력으로 로마 8:28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주님을 떠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 곁에 있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향한 요한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했고 늘 수긍한 것도 아니었지만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분을 사랑했기에 그분 곁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 바로 그에게 부활의 아침이 밝아오고 수의는 생명으로 바뀌게 됩니다.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룹니다.’

    ‘모든 일’에 당신의 비극을 넣어보십시오.
    사도 요한이라면, ‘하느님을 사라하는 자들에게는 하느님이 수의를 통하여 좋은 결과를 이룬다.’  서미영 교우라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하느님이 암을 통하여 좋은 결과를 이룬다.’

    당신의 삶에는 어떨까요?
    믿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당신은 일요일의 부활을 앞두고 지금 코  앞인 토요일까지 와 있을지도 모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마침내 좋은 결과를 이루어 부활의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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