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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년 8월 10일] (에페소서 4:1-16) 믿음과 지식으로 하나되어 자라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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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 수: 3225, 2003-08-11 08:34:50(2003-08-11)
  • 13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권면의 말씀입니다. 이 권면은 간단하게 세 마디의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바로 믿고, 바로 알고, 바로 자라 가라 !

    첫째로, 바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대상은 하느님 아드님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1장에서 살펴본대로, 하느님의 아들 딸로 구원받아 하늘의 온갖 영적인 축복을 받아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영역에서 우리에게 밀려오는 강한 유혹이 있습니다. 행위와 노력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거룩한 일을 해야만 되는 것 아니냐 라는 질문이 꼬리를 뭅니다.초대교회때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에다가 율법과 어떤 의식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교회 안에 침투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써서 그런 잘못된 가르침에서 복음을 지키고자 했습니다.요한복음 6장 28절을 보면, 군중들이 예수님께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29절,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 말씀 요한복음 6장 47절에서도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정말 잘 들어 두어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바로 믿으려면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인격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 사람에겐 본래 지적인 요소, 정적인 요소, 그리고 의지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이 세가지 요소를 합쳐 인격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는 일에 있어서도 이 세 가지 요소가 꼭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됩니다.

    먼저 지적으로 기독교 진리,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감정적으로 실제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머리는 차고 가슴은 뜨거워야 합니다. 머리도 차고 가슴도 차면 송장이고, 머리도 뜨겁고 가슴도 뜨거우면 미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냉철한 두뇌로 진리를 바로 알고 뜨거운 마음으로 체험 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뿐만 아니라 의지적으로 진리를 배워 알고 아는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치우치지 않는 바른 믿음은 성경 말씀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올바르게 배우고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또한 바로 믿는다는 것은 바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기독교는 윤리적인 종교이므로 윤리를 벗어난 기독교는 사이비 종교입니다. 잘못 믿으면 오히려 남에게 폐를 끼칠 염려가 있고, 사회에 부담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예수 잘 믿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바로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믿음과 지식에 하나가 되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이 지식 중에 가장 고상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지식인이었던 사도 바울로는 필립비서 3장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해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소망합니다.

    사도행전 17장을 읽어보면, 지혜와 지식을 자랑하던 헬라의 아덴 사람들 가운데는 많은 신을 섬기는 중에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경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어떤 신인지 알지 못하고 예배드린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제한된 이성으로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자기들의 노력을 통해서 자기들이 섬기는 신에게 도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우리가 노력해서 하느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에게 나타내 주셨으므로 우리가 아는 것 입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하고 우리 성공회에서는 성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도 그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 우주 만물의 창조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일반 계시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를 본 사람은 하느님을 본 사람입니다. 주님은 ‘친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 하느냐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셨습니다.하느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이것을 특별 계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 특별 계시를 통해서 우리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하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예수님은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들어 섰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모르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미 이루어진 이 구원의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모든 더러운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신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서 나를 특별히 택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이 사실을 알아야 감격한 가운데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하여 영원한 축복의 자리에 들어갈 것도 아셔야 합니다.

    그러면 자기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어떤 축복을 받습니까? 구약성경 다니엘서 11장 32절을 개역성경으로 읽어 보면, ‘오직 자기의 하느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했습니다.  

    자기의 하느님을 아는 백성 이란 말에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나의 하느님으로 알아야 합니다. 강해지고 용기를 주고, 힘을 더하고 승리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사람과 세상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다니엘서 3장에 보면, 느브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고 모든 사람이 다 이 신상에게 절하라고 하면서, 만일 절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진 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청년 사드락과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는 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느브갓네살 왕은 크게 노해서 그들을 불러다 놓고 이제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데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절하면 좋지 만, 만일 절하지 않으면 당장 너희를 풀무 속에 던질 것이니 어떤 신이 내 손에서 너희를 건진단 말이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이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조용히 머리를 들고 침착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16 저희는 임금님께서 물으시는 말씀에 대답할 마음이 없습니다. 17 저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저희를 구해 주실 힘이 있으시면 임금님께서 소신들을 활활 타는 화덕에 집어 넣으셔도 저희를 거기에서 구해 주실 것입니다. 18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희는 임금님의 신을 섬기거나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신상 앞에 절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담대했습니까? 이런 담대함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자기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자기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담대합니다.그리고 주님을 알 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따라서 지식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 줍니다. 그 열린 문을 통해서 주님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주님을 모르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더욱 잘 알게 되면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아는 사람은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을 어떻게 바랄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분명한 지식이 생길 때 비로소 거기에 소망을 둘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를 분명히 알 때 그에게 소망을 둡니다. 소망을 가지기 원하십니까? 주님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에게 소망의 닻을 던질 만합니다. 하느님에게 소망을 둔 사람은 결코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아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인내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워 서 알기 전에 인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욥의 인내를 배우고, 주님의 인내를 생각하게 됩니다. 인내를 아는 사람은 우리가 왜 인내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이 쓰시는 일꾼이 됩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 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습니까? 교회 학교 교사나 성가대원이나, 집사나 권찰이나, 권사나 교역자나 하나님을 모르고 어떻게 봉사할 수 있습니까? 세상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하느님을 모르면 하느님의 일꾼으로 봉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을 알 수 있습니까?  하느님을 알기를 열망하는 마음을 갖고 하느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로 성경을 읽고 배우고 묵상하며 기도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 때 하느님을 경험할 수 있고 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을 바로 믿고 바로 아는 일에 하나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바로 자라나야 합니다. 우리가 성숙한 인간이 되어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해야 합니다. 어린애도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처럼 일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워져서 새 피조물이 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은 것도 확실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심령이 자라나지 못하면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자라나야 할 구체적인 이유를 밝혔습니다. 본문 4장 14절에 “그 때에는 우리가 이미 어린아이가 아니어서 인간의 간교한 유혹이나 속임수로써 사람들을 잘못에 빠뜨리는 교설의 풍랑에 흔들리거나 이리 저리 밀려 다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심령이 자라나지 못하고 어린 아이의 상태에 있으면 유혹에 빠지고 요동하기 쉽습니다.  어린애는 자기에게 좋게만 해주면 좋아합니다. 왜 좋게 대해 주는 지 그 이유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유혹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잘못된 교훈의 풍조에 요동하기가 쉽습니다. 어린애는 모든 면에 저항력이 약하기 때문에 병균의 침입을 막기가 어렵 습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그 심령이 병들기 쉽습니다.  오직 사랑 가운데서 진리대로 살면서 여러 면에서 자라나야 합니다.우리의 몸이 알게 모르게 자라는 것처럼 우리 심령도 자라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인내해야 되고, 공부해야 되고,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난 어린애 같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나려고 하면 영양분 섭취를 잘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세요. 성경을 이해하지 못 한다고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어린애가 밥을 먹지 못하고 젖을 먹는다고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기 전에 꼭 기도하세요. 성령께서 이해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믿으면 알게 됩니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 몸에 어떤 영양이 되는지를 다 알고 나서 먹으려면 그 동안 굶어 죽고 말 것입니다. 믿으면서 알게 됩니다.  그리고 믿은대로 행하세요. 운동해야 자라납니다. 어린애 때 가장 많이 자랍니다.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럽니다.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은 자연히 그 심령이 잘 자라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 하나 하나가 바로 믿고 바로 알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다 자라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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