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대한성공회 제자교회대한성공회 제자교회

  • 거룩한 분노는 사랑이다. - 퍼온 글

  •   일반적으로 사랑과 공의를 나누어 하나님의 양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한 손은 사랑이고 다른 한 손은 공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등한 관계라는 말이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성경적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말씀합니다(요일 4:8,16). 그 하나님께서 앉으신 보좌가 있는데, 그 기초는 의와 공의이며 인자함과 진실함을 앞세워 행하십니다(시 89:14).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의와 공의를 기초로 한 보좌에 앉으셔서 인자함과 진실함을 앞세워 행하시는 모든 역사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사랑이란 공의에 기초한 것입니다. 사랑과 공의는 대등한 관계의 하나님 양손이 아니라 사랑은 공의를 포섭하며 공의를 터로 한 것입니다. 사랑 자체가 공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공의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진노를 일으키는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판단 기준, 잣대입니다. 그렇다면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란 공의를 드러내는 것이기에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진노를 일으키는 자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에 홍수로 노아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족속을 멸하셨습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역사는 사랑의 표출입니다.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리셔서 롯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소돔과 고모라 사람을 죽이셨습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역사는 사랑의 나타남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 아니신 순간은 없는 것입니다.


    -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사랑

      서로 사랑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배우자를 위해 주고 아껴 주며 품어 주려고 합니다. 인간이라 일관성을 항상 견지하지 못하는 것이 흠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남자 쪽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면서 그 여자에게 자신과 동일한 태도를 취한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그 아내는 어떻게 할까요? 남편을 이해하고 그러한 생활을 계속적으로 용납할 수 있을까요?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용납한다면 그것은 이미 배우자를 포기한 것일 뿐입니다. 이는 반대의 경우에도 동일할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부부 사이에 다른 누군가와 배우자와 같은 위치의 관계 맺음을 용납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배타적이며 독점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사랑이 배타적이고 독점적이기에 부부 사이의 사랑도 배타적이고 독점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서 부부 사이의 사랑으로 반영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과의 사이에 다른 누군가가 또는 다른 무엇인가가 자리를 잡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하나님과의 사이에 하나님 외에 무엇인가가 자리를 잡고 있다면 그것은 죄이며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도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게 됩니다.

      "너희가 야훼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수 24:19)." 질투는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질투이냐가 잘잘못을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질투는 그분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를 닮은 인생의 질투는 올바른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질투를 닮은 질투를 소유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는 일말의 타협도 허용하지 않으시는 두려우신 분이십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마음씨 좋은 이웃집 할아버지는 결코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하나님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고 무서워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인자함과 진실함을 앞에 두고 행하십니다.


    - 인자함과 진실함

      인자함이란 자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뜻합니다. 불의한 인간들을 곧바로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그들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공기를 거두지 않으셔서 호흡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태양이 계속 그 빛을 발하게 하셔서 식물이 자라고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비를 내리셔서 양식을 얻기 위한 인간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하십니다. 언약의 백성과 관련하여서는 변함이나 변덕이 없는 돌봄을 뜻합니다.

      세상 통치자의 돌봄이란 언제든지 그의 기분이나 개인적인 판단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통치자를 섬기는 사람들은 그의 개인적인 기분을 맞추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제시한 의와 공의를 저버리는 경우가 전혀 없습니다. 변덕스러움으로 인하여 예기치 않는 어려움을 당할까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진실함이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참되며 전혀 거짓됨이 없음을 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않고 섬기지도 않는 인생들을 향하신 진노와 멸망은 전혀 거짓됨이 없이 참된 것입니다. 스스로가 창조주를 섬기지 않던 죄인임을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긍휼하신 손길을 받아들이는 인생들을 향한 은혜는 전혀 거짓됨이 없이 참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혀 거짓됨이 없이 참되게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진노를 일으키는 자를 심판하십니다.


    -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저주, 심판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에 대하여 공의에 입각한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회개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인자하신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교회의 죄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보응하지 않으십니다. 교회에게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진실하게 죄를 자백하고 그 생활에서 돌이킬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요구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길 자로 보시고 긍휼히 여기십니다. 이 사실이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을 무서운 공포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친근히 여기도록 하는 근거가 됩니다. "오직 너희 하나님 야훼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수 23:8)."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기간 안에서 진실한 회개가 없으면 하나님은 영원한 멸망의 심판을 행하십니다. 일점일획의 어긋남이 없는 공의의 집행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친근히 하고 친근히 하며 두려워하여야 합니다(시 31:19). 경외입니다.

      공의에 입각한 사랑의 최절정이 십자가입니다. 공의에 기초하여 인자함과 진실함을 앞세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최절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대가로서 반드시 죽음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자에게 임하는 심판의 최종형이 바로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죄로 인하여 영원한 죽음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하나님께서 품으시고자 하셨음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인생이 그 값을 지불할 수 없이 값비싸기에 값없이 주시는 은혜, 영원한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인생의 죄를 대속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 교회의 바른 자세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생각하기에 좋은 부분과만 연결시키는 사고를 바꾸어야 합니다. 교회는 위해 주고 아껴 주며 품어 주는 것으로만 사랑을 제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나님께도 아무런 여과 없이 적용시키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보기에 좋은 것만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전인수 격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해 주고 아껴 주며 품어 주는 것과 함께 우리에게 진노하시고 징계하시며 관계를 끊으시는 심판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같이 거룩한 질투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바에 대해 함께 미워하여야 합니다. 약한 이들을 배려하고 돌보기는커녕 배척하고 핍박하는 모습에 대해 분노하여야 합니다. 구조적인 악에 대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마음으로 저항하여야 합니다. 힘을 추구하며 숭상하는 세상에 동화되어 아무런 의식 없이 따라가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거룩한 질투, 거룩한 분노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교회가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댓글 0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김장환 엘리야 2194 2011-07-26
108 김장환 엘리야 2844 2011-07-14
107 김장환 엘리야 2143 2011-07-09
106 김장환 엘리야 2178 2011-06-27
105 김동규 2161 2011-06-07
104 김장환 엘리야 2162 2011-05-26
103 김장환 엘리야 2154 2011-05-07
102 김동규 2169 2011-05-03
101 김장환 엘리야 2246 2011-04-14
100 김장환 엘리야 2427 2011-04-12
태그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