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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통과 웃음의 십자가: 노동자 김진숙의 85호 크레인


  •   "저는 지금 주익씨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주익씨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잠을 자고, 주익씨가 살아생전 마지막 봤던 세상의 모습들을 봅니다. 그리고 저는 주익씨가 못해 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하지 못했던, 내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할 겁니다. 그래서 이 85호 크레인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한과 애끊는 슬픔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이 되도록 제가 가진 힘을 다 하겠습니다."


      한 여성 노동자가 십자가의 의미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에서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170일 넘게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김진숙 선생입니다. 2003년 고 김주익 열사가 129일간의 외로운 투쟁 끝에 절망하여 목을 매 세상을 버렸던 바로 그 85호 크레인에서, 그렇게 죽어서야 내려올 수 있었던 ‘노동자의 십자가’에서 김진숙 선생은 살아서 “내 발로 내려가는 일을”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의 저항도 어느새 세 번째 계절을 맞이할 만큼 길어지고 있지만, 이번엔 정말 다릅니다. 그는 외롭지 않습니다. 트위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그의 말들이 세상으로 날아오고, 가슴으로 화답하는 사람들의 말들이 그에게로 날아가 흥겨운 소통과 연대의 잔치를 벌입니다. 죽음과 절망의 장소에서 생명과 희망의 장소로 변화하고 있는 십자가를 향해 ‘희망의 버스’ 노선도 생겼습니다. 그 버스를 타고 스스로를 조직하여 찾아온 ‘날라리 외부세력’은 환한 표정으로 말합니다. “당신을 통해서 희망을 봅니다!”

      차마 그 십자가에 함께 오르지는 못하더라도, 너무 멀리 있어 희망의 버스를 타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무관심의 죄’는 짓지 말자는 심정으로 그의 말을 경청해오면서 내가 배우고 있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십자가 위의 ‘고통’과 ‘웃음’의 의미입니다.

      김진숙 선생은 고통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통에 몰두해 남의 고통을 못본척 하거나, 고통의 무게를 저울질해 남의 고통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해고는 죽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25년째 한진의 해고 노동자’인 그는 동료 해고 노동자들의 ‘부활’을 위해 싸우고 있지만, “정규직의 미래”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느끼며 아파합니다.

      때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을 방관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영혼을 잃어버린 노동자들”이라며 뼈아픈 비판도 서슴지 않습니다. 자신을 응원하러 온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보며 “미안하고 부끄럽다”고 말하지만,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KTX, 기륭전자, 청소 용역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저항에 친자매처럼, 큰언니처럼 팔 걷어붙이고 참여해왔습니다. 아이를 안고 누구보다도 먼저 그의 십자가로 찾아온 이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그의 고통의 감수성은 노동운동의 울타리도 넘습니다. 유난히도 추웠던 지난 겨울 한 ‘유망한’ 여성 시나리오 작가가 가난과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을 때, 따뜻한 안방에 있던 사람들은 “피자 배달이라도” 할 수 있었지 않았냐면서 그의 죽음을 무책임한 것으로 치부하고 ‘낯설어’했습니다. 심지어 “그의 죽음이 다른 이들의 사회적 죽음을 가려버리는 건 참기 힘들다”면서 죽음을 차별화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35미터 고공의 “미친듯 흔들리는 크레인 위에서 바람멀미를 했던” 김진숙 선생은 그 여성 작가가 겪었을 무력함에 먼저 공감하며 아파했고, 그를 죽음으로 내몬 자본의 악을 고발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애달픈 죽음 앞에서 “산자의 책임”을 느낄 것을 호소했습니다. 고통을 통해 결정(結晶)되는 소금의 맛은 똑같이 짜다는 것을 몸으로 알고 있는 ‘소금꽃 김진숙’에게는 그 어떤 고통도, 그 어떤 죽음도 낯설지 않았나 봅니다. 이처럼 고통을 차별하지 않는 그이기에 그의 고통에 참여하기 위해 찾아 오는 ‘외부세력들’이 끊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김진숙 선생의 저항에서 가장 전복적인 면은 고통의 십자가 위에 있는 그가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저항에는 모진 구석이 없습니다. 첫 희망버스를 타고 가 그를 만난 5학년 어린이 연수조차 “무섭지 않고 평화로웠던 게” 제일 좋았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김진숙 선생의 트위터 (@JINSUK_85)에는 '^^'과 'ㅋㅋ'가 만발합니다. 자본의 안녕을 사회의 안녕과 동일시하는 무지는 한낱 우스갯소리로 만들어 버리고, 그와 마음을 함께 하는 이들에게는 애정어린 웃음을 듬뿍 안겨줍니다.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을 외치는 그를 올려다 보는 사람들은 미안함과 죄의식 대신 연대와 행동의 의지를 느낍니다.

      노동자의 십자가 위에 핀 웃음꽃은 프랑스 레렝스의 수도원에 있는 ‘미소짓는 그리스도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그리스도상이 특별한 이유는 십자가 위에서(!) 미소짓고 있는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고통을 미화하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승리와 부활”의 희망을 잃지 않는 한 고통 속에서도 미소지을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음을 감동적으로 보여줍니다. 김진숙 선생의 웃음꽃은 고통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에도 불구하고 피어난 것이기에 더욱 아름답습니다. 이제는 그를 ‘소금꽃 김진숙’만이 아니라 ‘웃음꽃 김진숙’이라는 애칭으로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을 욕망하는 그리스도교에 실망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예수의 삶과 죽음을 통해 고통받는 이들과 하나 된 하느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김진숙 선생의 십자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예수를 믿고 따를 것인지를 묻는 치열한 물음입니다. 그 물음에 행동으로 응답할 때 우리는 죽음의 십자가를 생명의 십자가로 변화시키는 ‘사건’에 동참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는 7월 9일에 두 번째 희망의 버스가 다시 부산으로 향합니다. 그 버스에는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올라탔으면 좋겠습니다. 그 고통과 웃음의 십자가 아래서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와 찬송 소리가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와 행동을 계단 삼아 소금꽃/웃음꽃 김진숙 선생이 자기 발로 걸어서 내려올 수 있도록.

댓글 2

  • 김동규

    2011.07.05 16:35

    어린이집 아빠가 한 분이 이번 주말에 함께 부산가자고 합니다. 늦은 밤 공동육아 공동체를 꿈꾸며 논쟁어린 대화속에 시간을 보내는데, 기아자동차에서 프라이드 만드시는 그분의 제안은 김진숙 선생님 격려가자는 말입니다. 쉽게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깊이 기도하지 못하는 제 자신이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 김장환 엘리야

    2011.07.07 20:49

    희망버스 -
    항상 마음으로 함께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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