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대한성공회 제자교회대한성공회 제자교회

  • 희년은 자비를 뛰어넘어 정의를 요구한다
  • 성서는 복지국가를 말씀하고 있는가? - 희년은 자비를 뛰어넘어 정의를 요구한다

    고영근 / 희년함께 사무처장

      
      내년 총선 및 대선을 비롯해 최근 우리 사회의 화두는 바로 '복지국가'다.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여당의 유력한 대권 주자인 박근혜 의원마저도 복지국가를 내세우고 있다. 복지국가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대세'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시대의 흐름을 따라 기독교계 내에서도 복지국가를 신학적 혹은 기독교 윤리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시도들이 눈에 띤다. 특히 진보 개혁적인 기독인들은 보편적 복지가 기독교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며 보편적 복지에 신학적, 기독교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반면 보수 기독인들은 단순히 우파의 논리를 따라 복지에 대한 반감을 가지거나 보편적 복지가 아닌 선별적 복지 정도만을 주장하고 있다.

      진보 개혁적인 기독인들이 보편적 복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하는 주요 성서 본문은 출애굽기와 레위기, 신명기에 나오는 사회적 약자 보호법과 십일조 규례,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농부 비유 등이다.

      또한 이들은 모든 사람이 보편적 복지를 제공받아야만 하는 근거로 모든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제시한다.


    - 보편적 복지의 신학적, 기독교 윤리적 근거는 무엇인가

      보편적 복지를 지지하는 기독인들의 신학적, 기독교 윤리적 논리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요한 기본 소득이나 사회복지 서비스를 모든 사람에게 보장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보편적 복지의 핵심은 하나님의 형상인 모든 사람이 인간다운 삶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 소득이나 사회복지 서비스의 보장에 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는 주장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주장은 비단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이해관계에 물들지 않은) 맑은 양심과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동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합리적 이기심을 가진 자연인이라 하더라도 사회의 유지와 평화를 위해 '내가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면 다른 사람도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황금률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만약 황금률마저 동의하지 않는다면 남는 것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뿐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만민의 평등한 생존권을 부정할 수 있는 논리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이기적인 동물에 불과하고, 자연에는 인간다운 평등한 생존권은 존재하지 않으며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냉혹한 진화론과 '인간은 물질과 다름없다'는 피도 눈물도 없는 물질주의다.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제거하면 인간은 동물이나 물질이 되어 버린다.

      만약 누군가 자신은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의 인간다운 삶은 부정하고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성을 거의 상실한 이기적인 육체(flesh)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성서는 그런 사람을 살아 있어도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보편적 복지의 최종적 근거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과 천부인권(天賦人權)인 '만민의 평등한 생존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부정하고 인간이 단지 이기적인 동물이나 물질이라고 한다면 만민의 평등한 생존권은 허물어진다.

      보편적 복지의 최종적 근거인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만민의 평등한 생존권'은 신학적, 기독교 윤리적으로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 기본 소득의 신학적, 기독교 윤리적 근거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만민의 평등한 생존권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말은 신학적, 기독교 윤리적으로 타당하다. 그런데 "인간다운 삶을 위해 기본 소득이나 사회복지 서비스를 모든 사람에게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은 과연 타당한 것일까?

      특히 만민의 평등한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기본 소득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성서적 근거와 뒷받침을 얻을 수 있을까? 과연 성서에서는 모든 사람의 평등한 생존권과 인간다운 삶을 기본 소득으로 보장하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성서가 기본 소득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는 기독인들이 인용하는 성서 본문인 출애굽기와 레위기, 신명기에 나오는 사회적 약자 보호법과 십일조 규례,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농부 비유 중에서 레위기 성결법전(Holiness Code, 레 17~26장) 가운데 특히 25장의 안식년과 희년 관련 말씀을 살펴보자.

      출애굽기와 신명기에도 사회적 약자 보호법이 있지만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나오는 관련 규례들은 레위기에 비하면 다소 거친 느낌이다. 반면 레위기 성결법전에 나오는 사회법과 도덕법, 사회적 약자 보호법은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다. 특히 레위기 25장의 안식년과 희년 관련 텍스트는 토지(지대)와 노동(임금), 자본(이자)에 관한 매우 의미심장한 가르침을 준다.

      레위기 25장의 희년은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메시아 선언을 하시면서 선포(눅 4:18~19)하신 것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아울러 희년은 종말론적인 하나님나라의 근사치적인 모델을 이 세상에서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는 점도 중요하다.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가 <예수의 정치학>(The Politics of Jesus, IVP역간)'에서 "희년은 하나님나라의 전조이며, 주기도문은 진정한 의미의 희년 기도"라고 말하는 것처럼, 희년은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근사치적인 모델이다. 요더는 "희년의 언어가 예수의 가르침 전체에 걸쳐 투사되고 있다"고 말한다.


    - 보편적 복지의 기초는 '만민의 평등한 토지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 체제에서 구원하여 가나안 땅을 주시고, 그곳에서 하나님나라를 만들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모든 사람이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항상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평등하게 분배(민 26:52~56)해 주시고, 지계표(landmark)의 이동을 금지(신 27:17)하신다. 또한 토지의 영구 매매를 금지(레 25:23)하시면서 불가피한 경우 토지 사용권만을 희년까지 한시적으로 매매하도록 허용(레 25:15)하신다.

      아울러 토지 무르기(레 25:24)와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레 25:10, 28)을 통해 모든 사람이 자신의 토지를 회복할 수 있도록 말씀하신다. 이런 말씀들에서 모든 사람이 토지에 대한 권리를 항상 누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왜냐하면 토지 소유의 양극화는 빈부와 권력의 양극화를 불러오고, 토지가 없으면 진정한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의 노예 상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가나안 땅을 주시고 진정한 자유를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만민의 평등한 토지권을 빼앗고 형제와 이웃을 가난에 빠트리게 만드는 것은 그들에게서 진정한 자유를 빼앗고 하나님나라가 아닌 이집트의 노예 체제를 또 다시 세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짓을 저지른 이스라엘에게서 땅을 다시 빼앗고 추방시키신다.

      모든 사람이 보편적 복지의 인간다운 삶 즉 만민의 평등한 생존권을 누리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기초는 바로 '만민의 평등한 토지권'이다. 성서에서는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즉 자기 땅에서) 자기 노동의 열매를 누리며 안연히 사는 상태를 정의가 이루어진 이상향으로 그리고 있다.

      레위기 25장에 담긴 토지, 노동, 자본 관련 텍스트에서 도출할 수 있는 원리는 토지에 있어서는 '만민의 평등한 토지권과 주거권(레 25:1~34)'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노동에 있어서는 '노동 착취 금지와 자기 땅에서 자기 노동의 열매를 누리는 자영 노동 지향(레 25:33~55)', 자본(대부)에 있어서는 '빈민 무이자 대부와 갚을 수 없는 부채의 탕감(레 25:33~55, 부채 탕감은 신명기에 명시적으로 나오지만 레위기에는 암시적으로 내포)'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만민의 평등한 토지권과 주거권을 현대에 보장하기 위해서는 토지 가치를 사회가 환수하여 모든 사람을 위해 쓰는 토지 가치 공유가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대안이다. 노동과 자본의 원리에 있어서는 자신이 노동해서 만든 생산물은 노동한 사람이 소유하는 것이 원칙이다. 만약 자신이 노동한 결과를 다른 사람이 갖는다면 이는 노예 상태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 기본 소득의 재원은 먼저 토지 가치세로 마련해야

      레위기 희년 말씀에 비춰 보면 만민의 평등한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기본 소득의 재원은 만민의 평등한 토지권에서 나온다. 소득이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노동한 대가로 받는 것이다. 하지만 희년 말씀에서는 불가항력적인 재난과 불행, 가난에 처했을 때 자신의 토지 사용권을 희년까지만 한시적으로 팔아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한 생존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희년 말씀에 비춰 보면 결국 "모든 사람은 평등한 토지권을 가지고 있고, 자신이 땀 흘려 노동한 열매를 먹고 산다"는 뜻이다. 인간은 땀 흘려 일해야 먹고 살 수 있으며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다.

      자신이 일하지 않는다면 결국 다른 사람이 일한 결과물로 먹고 살아야만 하는 것이 변함없는 자연법이다. 하지만 희년 말씀에 따르면 불가항력적인 재난과 불행, 가난에 처한 사회적 약자는 자신의 토지 사용권을 희년까지만 팔아서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즉 다른 사람의 자비나 시혜가 아닌 자신의 평등한 토지권을 통해 자신의 기본적인 생계를 보장받는 것이다. 따라서 기본 소득의 재원은 우선적으로 만민의 평등한 토지권에서 나온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토지 가치(지대)를 사회가 환수하여 모든 사람을 위해 쓰는 토지 가치세를 통해 기본 소득의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정의와 경제 원칙에 정확히 부합한다.

      만민의 평등한 토지권 보장을 위해 토지 가치(지대)를 사회가 공유하는 원리는 땅의 십일조를 받는 레위지파와 사회적 약자(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의 경우에도 부합한다. 가나안에 들어가 땅을 받지 못하고 공공의 업무(제사 업무, 율법 교육, 재판, 보건 위생, 도피성 운영 등)를 수행하는 레위지파를 비롯해 가난에 처한 사회적 약자들은 땅의 십일조를 받게 되어 있다(신 14:22~23, 27~29).

      이러한 십일조의 원리는 만민의 평등한 토지권을 보장하기 위해 토지 가치(지대)를 사회가 세금으로 환수하여 공공을 위해 쓰고 개인이 열심히 땀 흘려 노동한 결과는 최대한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헨리 조지(Henry George)의 지공주의(地公主義)에 연결된다.

      만민의 평등한 토지권을 보장하기 위해 토지 가치를 걷어서 공공 비용과 사회복지 재원으로 삼는 것은 성서를 비롯해 정의와 경제 원칙에도 부합한다. 만약 우리 사회의 엄청난 토지 불로소득은 놔두고 땀 흘려 노동한 결과물을 걷어서 기본 소득과 사회복지 재원으로 삼는다면 이런 사회복지 시스템은 지속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정의롭지도 경제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나라에서 복지국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방향은 토지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토지 불로소득을 우선적으로 토지 가치세로 환수하여 복지 재원으로 삼자는 것이 아닌 노동의 생산 활동에서 발생하는 부가가치세와 소득세, 법인세 등을 무겁게 걷어서 복지 재원으로 삼자는 것이다.


    - 복지국가의 승패와 지속은 정의에 있다

      복지국가의 관건은 기본 소득과 사회복지 서비스의 보장이며 그 가운데 핵심은 기본 소득과 사회복지 서비스를 위한 재원 마련에 있다. 누구에게 어떤 돈을 걷어서 모든 국민에게 복지를 해 주느냐가 사실상 복지국가의 승패와 지속을 결정짓는 관건이라는 말이다.

      토지 가치세는 좌파나 우파 모두가 인정하는 가장 좋은 세금이며 경제학 교과서에서도 가장 효율적이고 공정한 최선의 세금이라고 나온다. 신학자인 에밀 브루너(Emil Brunner)는 <정의와 사회 질서>(Justice and Social order, 대한기독교서회 역간)에서 "토지 소유자가 아무런 노력도 없이 사회 발전과 사회 공동체 덕분에 얻은 토지 가치는 사회가 세금으로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토지 가치세처럼 정의롭고도 효율적인 복지 재원을 놔두고 만약 기득권 세력과 적당히 타협해 노동의 결과물에 대해서만 세금을 무겁게 걷는 복지국가의 방향으로 간다면 복지국가로 다음 대선에서 집권하더라도 얼마 안 가서 복지국가에 질려 버린 국민들이 또 다시 반동으로 갈 위험성이 크다.

      희년 말씀은 자비보다 먼저 정의를 명령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구하는 것이 "오직 정의(Justice)를 행하며 인자(mercy)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의 더 중요한 바로 '정의와 자비와 믿음(마 23:23)'을 강조하신다.

      정의가 아니면 모든 것이 설 수 없으며 지속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효율적이지도 않다. 존 롤즈(John Rawls)가 <정의론>(A theory of Justice, 이학사 역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의만이 지속 가능하며 가장 정의로운 것이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에 대한 평등한 권리와 노동의 권리를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는다고 가르친다. 만민의 평등한 토지권과 노동권은 천부인권(天賦人權)이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자연법(natural law)적인 생득권(birth right)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인간다운 삶과 보편적 복지는 만민의 평등한 토지권과 노동권으로 보장해야 한다.

      한편 만민의 평등한 토지권을 보장하기 위한 토지 가치 공유는 단지 복지국가의 담론을 뛰어넘어 통일 한국과 하나님나라의 모델로 확장된다.

      토지 가치는 공유하고 노동의 결과는 최대한 보장해 주는 희년의 지공주의는 평등, 공유, 형평, 정부, 분배를 강조하면서 토지와 자본의 공유를 주장하는 좌파와 자유, 사유, 효율, 시장, 성장을 강조하면서 토지와 자본의 사유를 주장하는 우파를 화해시켜 자유와 평등, 사유와 공유, 효율과 형평, 정부와 시장, 분배와 성장 양쪽 모두를 동시에 이룰 수 있다.

      희년 말씀이 이루어진 희년 사회는 복지국가를 뛰어 넘어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는 하나님나라의 근사치적인 국가 모델이다.


댓글 0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09 김장환 엘리야 2195 2011-07-26
108 김장환 엘리야 2844 2011-07-14
107 김장환 엘리야 2143 2011-07-09
106 김장환 엘리야 2178 2011-06-27
105 김동규 2161 2011-06-07
104 김장환 엘리야 2162 2011-05-26
김장환 엘리야 2155 2011-05-07
102 김동규 2169 2011-05-03
101 김장환 엘리야 2247 2011-04-14
100 김장환 엘리야 2427 2011-04-12
태그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