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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년 8월24일] 로마서 8:31-39그 누가 그 사랑 끊으리?
  • 청지기
    조회 수: 2764, 2008-08-26 21:49:39(2008-08-26)
  • -그런즉 이 일에 다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31절 상)?

      ‘이 일’이란 28-29절에서 말한,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주도면밀한 구원의 역사를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그 아들까지 내어주신 사랑의 하느님 앞에서  ‘남은 할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무엇을 덧붙일 수 있는가?’ 아무도, 그 누구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일’에 무엇인가를 덧붙입니다. 뭔가 말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내가 사는 모습을 보아서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어요.’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는지 나는 모르겠어요.’ 등.

      이에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을 마무리하면서 사람들이 덧붙이는 여러 말들에 대해서 다섯 개의 질문으로 반문하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느님이 하신 일에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1. 31절,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며 알게 되는 것은 세속과 정욕과 마귀가 함께 연합하여 우리를 대적한다는 것이며 우리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재난이 닥칠 때면 온 우주가 우리를 대적하는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이라는 말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어떻게 위하시는지 28-29절을 통해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하느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안다’는 말은 ‘우리의 됨됨이, 우리 연약함을 아신다는 말이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로 하느님의 마음을 나타내는 인격적인 표현입니다.

      우리를 아시는 하느님은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정하셨습니다. 선택하셨다는 말입니다. 선택은 주권자이신 하느님의 자유입니다. 하느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되었습니다.

      우리를 정하신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복음을 듣게 하시고 내 마음을 열어 예수님을 믿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느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나를 용서하여 주시고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로 하느님 앞에 서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예배하고 예수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신 하느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도 다 부활하신 주님처럼 변화될 것입니다. 이 영광을 누리게 되는 영화는 미래의 일이지만 주님의 계획안에서는 이미 성취된 사건인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하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러니 지옥의 모든 권세가 나를 구원에서 탈락시키고자 온갖 수를 쓴다하여도 그들은 결코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하느님이 우리 편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하신다.’ 얼마나 든든합니까? 함께 외쳐봅시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나를 위하신다.’

      2.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으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고 내 욕심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노예의 삶에서 건지시어 자유인으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비전을 가진 자유인으로 감사하기보다는 노예로 지내면서 먹었던 고기와 후추 생각에 모세와 하느님을 원망하고 대적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준 이 패역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물론 광야라는 환경은 열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어나간 것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서가 아니라, 원망과 불평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용한 양식과 마실 물을 주셨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동행하여 주셨습니다.

      출애굽의 하느님이 바로 나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가장 존귀하고 가치 있는 선물-예수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선물로 받은 존재들입니다.
      가장 존귀한 가치, 예수, 영생을 소유한 존재들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깨달은 믿음의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 주었는가? 유다가 돈 때문에 내어 준 것도 아니고 빌라도가 두려움 때문에 내어 준 것도 아니고 유대인들이 시기심 때문에 내어 준 것도 아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가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자기 아들이라고 하는 최고의 가장 귀한 선물을 주셨는데, ‘어떻게 그 분이 다른 모든 선물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은 자신의 아들을 주심으로써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이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관대하게 주실 것이라는 보증인 것입니다.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보이는 것은 가치가 적고 때로는 쓸모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이 빼앗겨 내 안에 가장 귀한 것이 있음을 잊어버리고 감사하고 찬양하기 보다는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신뢰하며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필립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3. 33절,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여러분 자유하십니까?
      예수님 안에서 기쁨이 넘치는 생활을 살아가시나요?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자유하지 못하고 기쁨이 없는 것은 우리 안에는 죄책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죄책감은 ‘거시기’ 때문입니다.
      
      신자 대부분의 마음 안에는 성경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불순종으로 인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한 것으로 인한 ‘거시기’가 있습니다. ‘거시기’는 양심으로 자신을 고소합니다.
      ‘나 같은 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느님은 나를 미워 하실거야.’
      ‘나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격이 없어’
      이어서 마귀가 끊임없이 우리를 송사합니다.
      ‘네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신자 맞니? 하느님도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넌 구원받지 못해...’

      고발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죄의 값을 갚으라.’는 독촉을 말합니다.
      로마서 6:23에서 죄의 값은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영원한 죽음, 지옥에 떨어질 죄인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거시기를 걸고 함께 지옥으로 가자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요한 19장 3절을 보면,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사명을 완수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죄 없는 자신의 대속의 죽음으로 모든 인류의 죄의 값을 다 갚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온 인류의 죄의 값인 죽음을 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주어 다 갚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죄를 용서받고 씼음 받아 죄의 값을 갚을 의무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영원히 삽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데도 죄책감이 있다면, 겸손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온전히 믿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상한 사상과 윤리를 따르겠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의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죄책감을 갖는 것은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행위를 보는 자는 영원히 그 죄책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죄책감을 벗어던지는 유일한 해결책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죄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십자가를 붙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순종의 심판을 받아 불 뱀에 물려 죽어갈 때 하느님이 주신 해결책이 바로 이것이었다.

      민수기 21:8, “구리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아라. 뱀에 물린 사람은 그것을 쳐다보면 살 것이다.”

      예수님도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요한 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생각과 말과 행실로 범한 ‘거시기들’이 양심을 통해 나를 고발하고 사탄이 송사할 때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나의 믿음, 나의 승리는 오직 십자가에 있습니다.

      4.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간혹 심각한 죄로 인해 우리는 죄책감보다 더한 절망감이 마음을 짓누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나는 안 돼.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야. 나는 구원받을 수 없어.’
      마음이 우리를 정죄합니다.
      마귀는 쾌재를 부르며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분리시키려 발악합니다. 그래서 거시기한 삶이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정죄는 모두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그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중보 사역에 의해서 우리를 정죄에서 구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는 자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는 우리의 대언자이시고 대제사장이십니다.
      요일 2:1-2,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히 7:24-25,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예수님이 하느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사실 자체가 예수님의 속죄 사역이 완성된 증거이며, 예수님의 중보는 그 분이 ‘계속해서 자신의 백성들이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유익을 얻도록 보증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중보로 우리는 마침내 예수님의 됨됨이를 닮아가며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의 중보자 되신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5. 35절 상,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아무것도 끊을 수 없는데도 이 구절에 나온 경우들이 마치 나를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 처럼 느끼게 합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지게 할 만한 역경과 적의 목록을 제시합니다. 일곱 가지 가능성들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은 불경건하고 적대적인 세상에 의해서 야기되는 압력이나 재난을 말합니다.  ‘기근이나 적신’은 적절한 음식과 의복이 부족한 것에 대한 것입니다.  ‘위험이나 칼’은 죽음의 위험성, 죽음을 체험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들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주님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겪고 있는 환란들이었습니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사실 오늘날 안락하게 신앙 생활하는 우리는 알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초대교회 사도들로부터 믿음의 선배들은 이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해 승리했습니다. 박해 가운데 천국을 바라보며 찬송을 부르며 순교하는 것이 승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영통시절 북한 선교를 하고 있는 모퉁이돌선교회 선교사님이 전해 준 북한 지하교회의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할 때,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이라는 찬양을 부르면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들 안에 있는 뜨거운 하느님의 사랑이 순교라는 승리의 면류관을 차지하게 한 것입니다.
      기꺼이 순교하고자 하는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신실함에 대한 최종적인 시험인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고난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원인이 아니라, 그분과 연합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살고 이렇게 죽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바울은 의도적으로 완료시제를 썼습니다.
      ‘나는 확신하게 되었고 계속 확신한다.’는 의미이다.
      
      ‘사망이나 생명’이라는 말은 아마도 생명의 위기나 생명의 재난을 언급하는 듯합니다.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라는 말은 선하건 악하건 모든 우주적이고 초인간적인 존재들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라는 말은 시간을 ‘높음이나 깊음이나’는 공간을 말합니다. ‘능력’은 아마도 우주의 세력들을 의미하는 듯합니다.

      이 단어는 헬라인들에게 ‘인류의 운명을 통제하는 점성학적 권세들’을 나타내는 전문용어였습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는 하늘과  음부를 말하며,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라는 말로 그 밖의 어떠한 것도 우리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상 5가지의 질문을 통해서, 바울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해 줍니다.
      (그 분이 우리를 위하시므로) 아무것도 하느님의 목적을 좌절시키지 못합니다. (그 분이 자기 아들도 아끼지 않으셨으므로)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그 분이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 하셨으므로) 하느님이 택하신 자들을 고발할 수 없습니다. (그 분이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므로) 하느님이 택하신 자들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 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나타내셨으므로)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에서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유혹이나 환란이나 비극에서 면제될 것이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이 보증하고 계시는 것은 우리에게 고난이 닥치지 않으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결코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에서 끊지 못하리라는 것을 보증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확신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 곧 연약하고 변하기 쉬우며 비틀거리는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확고부동하고 신실하며 끈기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더 이상,
      당신을 붙잡는 내 연약한 손길에서 위안을 찾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나를 붙잡으신 강한 손아귀,
      그 안에서만 나는 경외하며 기뻐 뛰렵니다.’

      오늘 로마서의 말씀에 자기의 이름을 넣어 힘차게 읽어봅시다.

       “멈출 수 없는 사랑 주소서! 끊을 수 없는 사랑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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