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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년 4월 22일] 요한 21:1-19
  • 청지기
    조회 수: 3067, 2007-04-22 18:47:27(2007-04-22)
  • 1. 사랑의 결핍이 가져오는 결과

    지난 한 주, 우리는 한 사람으로 인해 32명이 넘는 존귀한 생명이 무참하게 죽은 사건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조승희라는 청년이 평소 가지고 있던 사회에 대한 적개심을 차마 상상할 수도 없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표출한 것을 보며 한 개인의 끔직한 범행 뒤에 있는 보이지 않는 문제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이 사건의 근본적인 배후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조승희라는 개인이 지닌 정신병력이 분명한 문제이지만, 그 배후에는 개인의 총기소지를 허용하게 된 미국사회의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왜! 개인이 총기를 소지하도록 하는 법을 합법화하고 있을까요?

    미국에서 개인이 총기를 소지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법제화된 것은 미국의 남북전쟁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총기생산업자들이 전쟁 이후에도 계속적인 이윤을 보장 받기 위해서 총기협회라는 로비 단체를 만들었고 정치인들에게 막대한 정치자금을 대주며 법제화하고 유지시켜 왔다는 것입니다.

    독실한 신자라고 자부하는 대통령 부시조차도 그 단체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고 대통령에 당선되었기에 이러한 악법을 폐지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타락한 미국식 금권정치가 이러한 악법을 존속시켜 온 것이죠. 그 결과 총기로 인한 막대한 인명피해의 비극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수한 생명이 죽을 지라도 돈벌이를 합법화시켜 주는 미국 사회를 보며 미국은 맘몬이라는 악한 영이 다스리는 반 기독교적인 국가임을 알게 됩니다. 또 이라크 전쟁에서 보듯이 미국은 지금도 자유수호라는 미명하에 군수사업가들의 이윤 추구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주권국가인 다른 나라들까지도 공격해가는 맘몬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미국의 교회들이 빛과 소금의 바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그리고 맘몬의 영을 섬기는 미국이 회개함으로 우리가 사는 이 지구상에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 인생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조승희라는 청년이 스토킹을 하고 사회에 극단적인 적개심을 품을 수 밖 없었다는 것은 그 영혼이 그 만큼 사랑에 굶주리고 허기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미국의 20세기 최고의 복음주의 기독교 신학자 프란시스 쉐퍼(Francis August Schaeffer IV ; 1912~1985)는 그의 저서 ?도시 속의 죽음 : death in the city?에서 “현대는 사랑에 결핍된 굶주림의 시대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현대에는 네 가지의 굶주림이 있는데, 곧 정신적인 굶주림(Mind Hungry), 대화의 굶주림(Talking Hungry), 접촉의 굶주림(Touching Hungry), 사랑의 굶주림(Love Hungry)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불면증, 심신장애, 중독, 자살, 도박, 범죄, 청소년 비행 등의 개인적 병리현상은 모두 ‘사랑의 굶주림’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얼마 전 한 여성잡지(레이디 경향)에 ‘한국 여성들은 애정 결핍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가슴이 허전하고 온몸에 힘이 빠진다.’
    ‘먹어도, 먹어도 속이 허한 느낌이 든다.’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다.’
    ‘책이나 영화를 보며 우는 일이 많다.’
    ‘애완동물을 좋아 한다.’
    ‘담배나 군것질거리를 입에 달고 살거나, 술만 마신다.’

    이런 증상들은 모두 애정 결핍의 증세입니다. 현대인은 이처럼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파스칼의 말처럼 인간에게는 그 영혼에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이 채울 수 있는 깊은 빈 구멍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승희 청년이 십자가의 사랑만 알았어도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혹 그 주변에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의 사람이 있어서 언제나 혼자였던 그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친구가 되어주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인도해 주었다면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 진정,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알도록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영혼을 살린 뿐만 아니라, 이 땅을 살리는 일입니다.

    얼마 전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한 자매가 ‘교회에 와도 외롭다’는 고백을 실었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한다는 교회에서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고백이었습니다.

    주님은 금요중보기도회 시간에 자주 우리 공동체에 말씀하십니다.
    무관심하다고, 서로 돌아보는 것이 너무 약하다고.
    서로 돌아볼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바쁘냐고. 이제는 자기라는 삶의 영역을 뛰어 넘어 주변을 돌아보는 사랑의 눈길이 되어야 되지 않겠냐고...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서로 짐을 져주어야 합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로 인해 주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도록 십자가의 사랑으로 섬기는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

    우리는 오늘 복음 성경을 통해서 그 사랑으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  그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하지만 부활의 기쁨도 잠시 뿐 다시금 실의에 빠져 자신의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주님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베드로 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누구보다도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주님이 잡히셨을 때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자신의 모습이 자꾸만 생각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울며 회개했었지만(마태 26:75),
    그리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사명을 다시 받았지만(21절),
    그 마음 깊이 남아 있는 죄책감은 베드로를 사명의 삶으로 나가지 못하고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삶으로 되돌아가게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로 돌아온 베드로는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밤새 빈 그물질만 했습니다. 어느덧 날은 밝았고 호숫가에 서 있는 누군가가 소리칩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아무것도 못 잡았습니다.”
    다시 저쪽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져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이르시는 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놀랍게도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153.

    베드로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밤새도록 빈 그물질만 했다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 인생에 수고를 해도 열매가 없는 때가 있습니다.
    이 때가 주님을 확실하게 만나는 때입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호숫가에 서 계시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임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시다!’라고 외치며 옷을 챙겨 입고 배에서 뛰어내려 주님께로 헤엄쳐 나왔습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만선이 된 배를 저어 호숫가로 나오자 예수님은 숯불을 피워 놓고 아침을 준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잡은 고기도 몇 마리 가져다가 구원 먹으며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아침을 먹었습니다.
    침묵이 흐르는 어색한 자리였지만, 예수님은 이내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빵도 집어 주시고 생선도 집어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만유의 주님이 낙심한 마음으로 주님을 떠나 다시 빈 그물질을 하는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섬기시고 계십니다.
    잔잔하지만 그 흘러넘치는 사랑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최후의 만찬의 자리가 기억이 납니다.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시고 빵을 집어 주시던 그 아름다운 주님의 모습!

    식사가 끝난 후에 예수님이 조용히 시몬의 곁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가득담긴 눈빛으로 시몬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시몬에게는 예수님이 지어준 베드로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베드로라고 하지 않으시고 시몬이라고 부르십니다.
    이날 왜 베드로라고 부르지 않고 옛 이름 시몬으로 부르셨을까요?

    주님이 새로 지어주신 베드로란 이름의 뜻은 ‘반석’이란 뜻입니다.
    반석 같은 믿음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라는 뜻으로 주님은 베드로란 이름을 지어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마태 26:33)라고 장담했던 베드로는 막상 주님이 잡히시자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었습니다. 그 일로 베드로는 통곡도 하고 회개했지만, 다시 갈릴리로 돌아와 빈 그물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의 마음을 아시는 듯 주님은 사명을 받기 이전의 본래의 이름인 ‘시몬’이라고 부르시며 ‘그래도 너의 마음속에는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거 맞지? 내가 너의 마음을 안다. 그 사랑을 나에게 고백해 주지 않겠니? 이제 우리 다시 시작하자꾸나!’라는 의미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연약함으로 인한 한 순간의 배신으로 인해 마음 아파하며 실의에 빠져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격려하시고자 사랑의 질문을 거듭 세 번이나 하십니다.

    주님을 세 번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 그 죄책감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사명을 받았음에도 다시 갈릴리 어부로 돌아와 빈 그물질을 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그 마음 깊이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을 세 번 고백하게 함으로써 다시금 그 인생을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입니다.
    주님은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회복되고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실상 우리도 시몬 베드로와 같아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십자가의 사랑을 알지만, 자주 실족하고 넘어져 마음 깊이 주님을 향한 미안함이 있고 부담감이 있고 죄책감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회고되기를 원하십니다.

    죄책감과 낙심 가운데 있는 마음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은 사랑의 고백에서 나옵니다. 무거운 죄책감 아래에 있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본래의 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고백하고 선포하면 우리를 누르고 있던 무거운 멍에 벗겨지고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케 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사랑의 고백은 우리를 일어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시편 18편 1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힘이신 야훼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실로 다윗은 수많은 인생의 역경과 고비를 만날 때마다 하느님을 바라보고  ‘나의 힘이신 야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드리면서 하느님께 위로와 힘을 얻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다윗이 야훼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선포할 때, 그의 믿음의 고백대로 하느님은 그의 ‘반석, 요새, 구원하시는 이, 숨을 바위, 방패, 승리를 안겨주는 뿔, 산채, 피난처’가 되어 주셨던 것입니다(시편18:2).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 앞에 정말 잘 하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자신이 실망스럽고 지치고 힘이 들 때마다  “나의 힘이신 야훼여!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선포함으로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사실 이 말은 질문이 아닌 주님의 사랑의 고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주 아내들이 남편에게 묻습니다. ‘자기 나 사랑해?’ 이 말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도 나를 사랑하지?’라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나를 사랑하십니다. 신의 열애! 주님의 사랑이 외사랑이 되지 않도록 우리도 주님을 향해 언제든지 사랑의 고백을 드리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것뿐이에요.
    사랑한다. 아들아(내 딸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아들아(내 딸아). 네게 축복 더 하노라.

    3. 어린 양을 돌보라.

    주님은 시몬에게 사랑의 질문을 통해 다시금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신 후에 그렇다면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주님의 어린양은 예수님을 처음 믿는 새 신자를 의미합니다.
    나아가서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돌보셨던 약하고 가난하며 질병과 고통으로 한숨 짓는 불우한 이웃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내 양은 복수(複數)가 아니고 단수(單數)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통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옆에 있는 지체 한 사람, 한 사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내가 남을 도우려는 때, 사랑할 때에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한 영혼을 사랑할 때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시몬을 처음 부르시던 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것이 주님이 시몬을 부르실 때 주신 비전이요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다시금 그 갈릴리 호수에 오셔서 시몬을 향해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어린 양을 먹이라.’라고 하십니다.

    과연 시몬 베드로는 그 후,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후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주님이 새로 지어 주신 베드로란 이름 그대로 초대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날 부활의 주님이 시몬을 찾아오셔서 격려와 사랑으로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을 확인케 하시고 사명감을 다시금 회복시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겨우내 죽은 것 같던 가지에 새로운 움이 돋고 다시금 꽃이 피는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다윗처럼, 시몬 베드로처럼, 우리도 주님을 향해 “나의 힘이신 야훼여!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선포하면 실패의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는 부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십자가의 복음-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며 이 땅을 다시 살려 나가는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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