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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년 3월 18일] 누가복음15:11-32 너는 내 아들이다.
  • 청지기
    조회 수: 3162, 2007-03-19 21:42:55(2007-03-19)
  • 배경 : 15장 1-3,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하며 못마땅해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말씀을 나누는 교제를 하는 모습을 보고 못마땅해 하는 바리사이파 사름들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 진정한 교제를 알게 됩니다.
    - 죄인들이 말씀을 나누고 음식도 나누며 주님과 천국을 알아가는 공동체.
    * 죄인 - 예수님 당시에 세리, 창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던 사람들.

    루가 15장에서는 잃었던 양 한 마리, 일었던 은전의 비유를 통해서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은 주인의 기쁨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이 가장 큰 하느님의 기쁨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 하느님께 최고의 가치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영혼을 찾고 영혼이 돌아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순절 특새 - 문제해결을 위한 기도의 시간일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의 구원을 위해 최고의 시간을 드려 기도하는 특새가 되기를!

    잃었던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는 왜 잃어버린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고 기쁨이 되는 것인지를 잃었던 말씀하고 계십니다.
    죄인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알게 하시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을 주님은 어떻게 대하여 주시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11-12절 상반절 ;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달라고 청하였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 분배를 요구합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상속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아버지를 떠나 독립하고 싶은 차남의 굳은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독립을 원합니다.
    간섭이나 제약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죄란 피조물인 인간의 자기독립입니다.
    하느님을 거역하고 스스로 독립적 존재로 살아가는 것은 결국 사탄에게 예속되는 비참한 파멸의 삶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곧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12절 하, “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갈라 두 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아버지는 차남의 요구에 순순하게 응해 주십니다. 아들의 강한 의지와 결심을 누그러트리기 어려웠고 장성한 아들의 인격과 의견을 존중하는 뜻에서 선뜻 허락을 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아들 모두에게 상속을 해 줍니다.
    둘째에게는 당시 법에 의해 약 9분지 2에 해당하는 재산이 분배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로봇으로 창조하시지 않으셨고 스스로 결정하고 또한 그 결정에 책임을 지는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격적 관계란 자기주장을 하는 사람에 대하여 막무가내 식으로 강제하지 않는 것이죠.

    아담이 타락하는 장면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느님과 역사 앞에서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주체적인 존재입니다.

    13절,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갔다. 거기서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쓰기 편한 현금으로 바꾼 둘째 아들은 먼 고장으로 가 버립니다.
    아버지의 눈길도 싫고 사람들의 이목도 싫고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자리에서 마음대로 살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  '노세 노세 젊어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생산적인 일에 돈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먹고 즐기는 소비적인 일에 쏟아 붓고 육체의 쾌락을 좇아 돈을 물 쓰듯 씁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떠난 사람은 철저히 육체의 정욕, 세속을 따라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살려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사탄의 조종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에페 2:1-3, “여러분도 전에는 죄와 잘못을 저질러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죄에 얽매여 있던 때에는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고 허공을 다스리는 세력의 두목이 지시하는 대로 살았으며 오늘날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들을 조종하는 악령의 지시대로 살았습니다. 실상 우리도 다 그들과 같아서 전에는 본능적인 욕망을 따라서 육정에 끌려 살았던 사람들로서 본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14절, “그러다가 돈이 떨어졌는데 마침 그 고장에 심한 흉년까지 들어서 그는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흥청망청 돈을 물 쓰듯 낭비하던 둘째 아들은 얼마 가지 않아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가치 있고 생산적인 일에 사용하지 않고 방탕하게 살았으니 빈털터리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게다가 엎친 데 겹친 격으로 흉년마저 들어 그 비참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뿌리가 뽑힌 꽃이 잠시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는 있으나 이내 시들어 말라버리는 법입니다.
    하느님을 떠난 인생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공허하고 허무하고 내 안에 생명이 없습니다.
    파스칼, ‘하느님을 떠난 인생들에게는 그 영혼에 빈 구멍이 있다.’

    15절, “하는 수 없이 그는 그 고장에 사는 어떤 사람의 집에 가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주인은 그를 농장으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떵떵거리며 돈을 뿌려대던 허세는 온데간데없이 주린 배를 채우고자 더부살이하는 절박한 신세로 전락합니다.
    부잣집 아들이 머슴살이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것도 돼지치기로.
    돼지치기는 가장 비참한 신분에 처해버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부잣집 아들이 가장 비참한 종의 신세로 전락한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떠나면 이렇게 영적인 비참함에 떨어집니다.
    죄로 인해 존귀한 삶이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요한 8:34,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이다.”
    로마 6:17,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진실한 가르침을 전해 받고 그것에 성심껏 복종하게 되었으니 하느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16절, “그는 하도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워보려고 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둘째 아들의 절망적인 상황. 가축의 먹이로나 쓰이는 쥐엄나무 열매라도 입에 넣으려고 몸부림칩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돼지만도 못한 인생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짐승만도 못한 삶으로 떨어진 둘째 아들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하느님을 떠난 인생은 더 이상 존귀한 사람의 모습을 갖지 못합니다.
    로마서 3:23,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지만 하느님 없는 인생은 짐승하고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벧후 2:12, “그 악인들은 마치 잡혀서 죽으려고 태어난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아서 알지도 못하는 일들을 헐뜯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그 짐승들처럼 멸망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죄 아래 팔려 간 인생들은 짐승처럼 살다가 영원한 지옥 형벌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떠난 인생은 영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 있게 됩니다.
    쥐엄나무 열매라도 먹고살고자 발버둥치고 있는 둘째 아들에게 그 누구도 도움의 손을 펴 주지 않습니다.
    동굴에 묻혀버린 듯한 절망과 고통 그 자체!

    그리고 하느님을 떠난 인생은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무절제, 무의미, 무가치로 점철된 비참한 인생을 살다갑니다.

    잃어버린 양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목자를 떠난 양이 갈 길도 모른 채 헤맬 수밖에 없는데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목자를 떠난 양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시간의 차이뿐이지 죽는 것을 피하지 못합니다.
    육식동물에게 잡혀 죽던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던지, 굶어 죽던지, 병들어 죽던지 할 뿐입니다.
    양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방법도 하나 없습니다.

    집 나가면 고생이지만 하느님을 떠나면 죽음입니다.
    꼼짝없이 굶어 죽게 된 처지에 빠진 둘째 아들처럼 하느님을 떠난 인생은 죄 가운데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 2: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마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로마서 6:23,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문제 해결의 가능성은 도무지 존재하지 않는가?
    여기 해답이 있습니다.
    죄인에게 들려오는 기쁜 소식!.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17절, “그제야 제 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아버지를 떠난 자신에게 남은 것은 죽음이라는 사실 앞에 직면한 둘째 아들은 그제야 제정신이 번쩍 듭니다.

    죽는 자리에 떨어진 둘째 아들에게 현실을 직시하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어디에 서 있고 또한 어떤 입장인가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리워지고 집 생각이 났습니다.

    하느님은 떠난 사람들은 그 인생의 끝자락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창조주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들에게 필요한 각성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수많은 인생들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죽어가는 죄인들에게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다’. ‘돌아갈 집이 있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가장 숭고한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그 영혼의 허기짐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복음이 전해지면, 사람은 본래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아버지가 계심을 알게 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18-19절, “어서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
    죽음의 자리에서 아버지를 생각한 둘째 아들의 결론입니다.
    ‘내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사순절의 주제이고 모든 인생들에게 일어나야 하는 주제어입니다.
    “아버지께 돌아가자!” - 이 고백이 나오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에는 먼저 죄에 대한 자각이 있습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양심이 화인 맞아 육체의 정욕을 따라 즐기던 때에는 전혀 죄에 대한 찔림이 없었는데 죽음과 절망의 자리에 이르자 죄에 대한 자각이 일어납니다.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주인 되어 살아왔던 죄된 삶에 대한 돌이킴입니다.

    죄의 자각에는 죄책감이 따릅니다.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도 없으니, 품꾼으로라도...’
    죄책감은 자기의 존재감을 낮춰버립니다. 아들이 아닌 품꾼 - 종의식...

    20절 상, “마침내 그는 거기를 떠나 자기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죄에 대한 자각이 일어난 둘째 아들은 마침내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아버지 집으로!' - 구원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죄인의 입장에서는 오직 주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만이 살 길입니다.
    구원은 오직 주 하느님에게만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절망과 죽음이지만 하느님을 바라보면 소망과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일어나 주 하느님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 길만이 참 사는 길입니다.
    죄인이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인 주 예수 그리스도 뿐.
    행4:12, “이분에게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요한 14:6,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회개란 하느님을 떠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임을 자각하고 예수님을 믿어 아버지께 돌아오는 것이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올 때, 자기 고향으로 오기가지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허기짐으로 인한 육신의 고통, 동네 사람들을 보게 되지 않을까하는 자존심, 형편없는 몰골로 인한 수치심, 등 이런 저런 상념들이 아버지 집으로 향하는 마음을 가로 막지 않았을까요?

    돈이 있을 땐 아무리 먼 거리라도 쉬엄쉬엄 가며 거리와 산천의 풍광을 즐길 수 있는 여행길이지만 빈털터리 처지에서는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는 험로임에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아버지께 돌아서는 진정한 회개는 그 어떤 장애물도 뛰어넘습니다.

    그래도 오직 아버지 집에 가면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돌아가는 것이 회개이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20절 하,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집과의 거리는 꽤나 떨어져 잇는 시점인데 아버지가 먼저 둘째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옵니다.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을 오매불망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독립하겠다고 자기 몫을 챙겨서 저 멀리 떠난 둘째 아들을 늘 그리워하며 눈을 들어 아들이 떠난 길을 바라보고 계셨던 아버지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 멀리 동구 밖으로 나그네의 모습이 보이고 좀 더 주의하여 살펴보니 집을 나간 자신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점점 가까워지며 모습이 좀 더 분명해지는데 행색이 말이 아니고 완전히 거지꼴입니다. 이 같은 둘째 아들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가슴이 타들어가고.... 이내 단숨에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

    ‘과연 나 같이 못된 놈을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며 대우하실까?’
    종으로라도 써달라고 매달려야지 마음을 다 잡으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부터 누군가가 달려오면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런 비참한 몰골을 다가와 보시면 무엇이라 하실까?’
    고개를 들 수 없이 우두 꺼니 서 있는데, 두 손을 벌려 꽉 껴안으시며 입을 맞추시는 아버지...... 이렇게 까지 아버지에게 환영을 받을 줄이야!

    믿음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오는 예상 밖의 환대입니다.
    추악한 죄인을 그대로 용납하시는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이 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지는가?

    21절,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어쩔 줄을 모르고 너무 송구스러워 외칩니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아들이 아닌 종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은혜인데...

    22-24절, “그렇지만 아버지는 하인들을 불러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누더기 옷이 벗겨지고 따듯한 물로 목욕을 하고 좋은 옷이 입혀지고
    손에는 아버지의 대리인임을 표시하는 좋은 가락지가 끼워지고 발에는 신이 신겨지고 게다가 살진 송아지를 잡으며 온 동네잔치가 벌어집니다.

    돌아온 것뿐인데,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기 자신을 최고의 환대로 맞이해 주시는 아버지!

    이것이 돌아 온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에게 넘치도록 부어지는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까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다니!
    아버지는 무슨 이유로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로 돌아 온 못된 아들을 이렇게까지 환대하였는가?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24절)
    ‘내 아들!’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 왔어도 아들이고 제멋대로 방탕하게 살다가 돌아 왔어도 아버지에게는 아들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 하느님께는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중요.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죄인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고 또한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놓고 주님은 저울질하지 않으십니다.
    진정 마음을 찢으며 돌아서 아버지께 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탕자에게 파격적인 은혜가 부어진 것은 돌아온 그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찢으며 돌아서는 순간 하느님은 용서와 용납을 베풀어 주십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우리 인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하느님께 돌아가는 일.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을 찾는 일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지레 주눅 들지 말라!
    주님은 우리가 돌아서는 자체(회개)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회개하면 사는 길이 열립니다.
    탕자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옴으로 그의 생존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듯이 죄인이 하느님께 돌아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죄인의 신분에서 아들의 본래 모습으로 회복됩니다.

    요한 1:12,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아버지께 돌아가자!
    스스로 해결해보려고 애쓰던 것들 다 내려놓고 아버지께 돌아가자!

    하느님없이 자기 힘으로, 자기 독립의지로 살아가는 것이 죄입니다.
    죄인됨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함으로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 품에 안겨 그 한없는 사랑에 안식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하느님이 베풀어 주시는 풍요로운 축제의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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