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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년 2월 18일] 루가 6:27-38 원수를 사랑하는 삶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 청지기
    조회 수: 3459, 2007-02-18 18:26:54(2007-02-18)
  • ‘원수를 사랑하라.’
    사랑은 하느님의 은혜를 경험한 제자들의 타당한 삶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당시 일부 유대교가 정반대로 원수를 미워하는 권리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과는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원리를 세 가지로 구체화하고 있다.
    1.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라(27절).
    2.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라(28절).
    3.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라(28절).

    이런 사랑의 삶은 네 가지로 예증되고 있다.
    1)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을 돌려대라(29절).
    2)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마저 내어 주라(29절).
    3)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라(30절).
    4)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고 하지 말라(30절).

    이 모든 가르침의 결론으로 31절 말씀이 나온다.
    31절, 황금률이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황금률에 대한 3가지의 예증이 나온다.
    1.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지 말라(32절).
    2. 너희에게 잘하는 사람에게만 잘해 주지 말라(33절).
    3. 너희가 받을 가망성이 있는 자에게만 꾸어주지 말라(34절).

    왜? 죄인들도 이렇게는 하기 때문이다.
    35절에서는 황금률의 3가지 예증을 요약하고 있다.
    1) 원수를 사랑하고
    2) 남에게 좋은 일을 해 주고
    3) 되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꾸어주라

    왜,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믿고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느님이 바로 이런 분이기 때문이다. 악한 자에게도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자녀가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분의 자녀임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그분의 성품이 드러나는 삶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요청하신다.
    36절, 그러니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여기에 우리의 신앙적인 딜렘마가 있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죄인들과 다른 바가 없다.
    때때로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예수 믿는 사람이 더해!’

    세상 사람들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거는 기대 속에 주님의 음성이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살아가도 너희만은 달랐으면 좋겠다.’
    ‘뭔가 다르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너희에게서 보고 싶다.’
    ‘너희 삶에서 예수의 모습을 보고 예수의 향기를 맡고 싶다.’

    그런데 나 스스로 내 모습을 보면 이 모습에 얼마나 다른지.....
    괴롭기만 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간격과 그로 인한 괴로움에서 우리의 믿음이 출발한다.
    물론 세상 사람들도 양심이 있어 괴로워하겠지만, 믿는 이들이 갖는 번민과 갈등과는 비교할 수 없다.
    우리 안에는 성령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주님이 기대대로, 세상 사람들의 기대대로 살아가지 못할 때 신음하시는 성령님의 탄식을 우리의 영은 알고 있고 우리도 갈등하고 신음한다.
    이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실존이다.

    우리교회에 종종 오시어 강의해 주셨던 김원호 장로님의 간증이 기억난다.
    선교단체에서 만난 사업가가 투자를 하라고 해서 평생 공직에 있다가 은퇴하여 받은 퇴직금을 빌려 줬다고 한다. 줄 때의 마음은 더 많은 이익을 바라는 투자였다. 그런데 이익이 돌아오기는커녕 투자금조차도 갚지를 않고, 또 그때 자녀들이 해외에 유학 중인 상황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만큼 밉고 괴롭고 지옥 같은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 사람을 안보면 좋으련만 단체의 집회를 가면 마주치게 되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차라리 ‘원수를 사랑하라’는, ‘줄 때는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 주어라.’는 주님의 말씀을 알지 못했다면 오히려 더 괴롭지 않았을 텐데...

    그 사람으로 인해 마음에 미움과 증오가 올라 오르고 사법적인 수단으로 처리를 해볼까 생각할 때 마다 생명의 말씀은 그 마음을 더 아프게 하고 번민하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바로 이때가 진짜 살아있는 믿음을 배워가는 때이다.
    물론 이전에도 구원의 감격이 있었고 은혜 가운데 기쁨이 충만한 믿음의 삶이 있었지만, 진짜 살아 있는 믿음은 성경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칠 때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임을 배웠다고 한다.

    주님의 말씀대로 받지 않기로 결정하고 주님께 모든 상황을 맡겨드렸을 때 성령님이 주시는 평화가 넘치고 다음에도 여전히 그 사람을 마주쳤지만, 감정적인 동요 없이도 만날 수 있었고 당장 그 돈이 없으면 죽을 것만 같았지만 하느님께서 그 가정의 모든 필요를 넉넉하게 채워주시고 풍요로운 삶을 허락하셨다고 한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는 원인이 두 가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우리 안에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자원이 없는 것이다.  
    사랑의 능력이 없다.

    기껏 베드로도 일곱 번 정도 용서하면 되겠냐고 한껏 자기가 할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이 얼마 만큼인지 주님께 말씀드렸지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사랑의 기준 앞에서 우리는 내 안에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주님을 바라보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자원으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자신의 사랑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만이 주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고 그럴 때 참 사람의 길을 가는 행복을 경험하고 누리게 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모르는 영적 무지 때문이다.
    37절, 38절의 말씀이 바로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말해주고 있다. 하느님은 우리의 행함대로 갚아주시는 분이시다. 삶의 주관자이시고 심판자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느님을 알지 못하니까 일상의 삶에서 그분을 신뢰하지 못한다. 주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꼭 바보 같고 멍청이 같다고 느낀다. 신뢰하지 못하니까 내가 나의 방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장로님과 같은 상황이 되면 분노 가운데 뼈가 녹아들고 자리를 깔고 눕게 되고 변호사를 고용하여 소송을 걸어 조금이라도 보전하려고 애를 쓸 것이다.

    세상적인 이치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주님은 ‘죄인들도 그렇게는 한다. 그러나 너희는 달라야 한다.’며 주님을 철저히 신뢰하는 믿음으로 초대하고 계시다.

    ‘내 말로 너희가 살면 내가 책임진다.
    참된 평화와 기쁨을 누리는 행복을 누리게 할 뿐만 아니라 내가 대신 너희에게 갚아 준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 너희에게 안겨줄 것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가 성령님이 주시는 하느님의 자원으로 살아가자.

    하느님을 더 신뢰하고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함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역동적인 믿음의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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