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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언과 신비의 통합을 위하여“성경을 읽는 대신에 한 번이라도 그의 눈을 응시했더라면”
    한상봉 기자  |  isu@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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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인 2013.04.10  11:4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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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양효숙 기자

    사제들이 다시 대한문 앞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죽음에 항의하며 대한문 앞에 차려놓은 분향소가 구청에 의해 철거당했기 때문이다. 사제들은 매일미사를 봉헌하기로 결정했고, 많은 신자들이 여기에 동참하는 행렬을 잇고 있다.

    한국 교회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지만, ‘길거리 미사’는 이제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력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봉헌하는 미사에 제대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하느님의 절박한 호소에 응답하는 것이다.

    매일미사를 제안하며 나승구 신부는 “그 새벽, 노동자들은 동료들 죽음의 억울함을 풀고 사태 해결을 위해 호소할 수 있는 유일한 터전을 잃어버렸다. 잔인한 시대, 야만의 문명이 불러온 참극이며, 일하는 자들이 천대받는 죄 많은 시대”라고 한탄했다. 이 시간에 1980년 3월 24일 오후 6시 ‘하느님의 섭리’ 병원에서 군사정부가 보낸 자객들의 총탄에 쓰러진 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를 떠올린다. 총탄이 심장을 꿰뚫었을 때, 그의 피는 제단 뿐 아니라 그가 축성하려던 성체와 성혈에까지 튀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로메로는 말했다. “하느님께서 자객들을 용서하시길!”

    오스카 로메로 “박해받지 않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하비 콕스는 <종교의 미래>라는 책에서 “로메로의 삶의 이야기는 하나의 비유”라고 적었다. 로메로 대주교는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신조와 성직계급의 종교에서 하느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새로운 신앙으로 진입하는 그리스도교 탄생의 성육신이라고 전했다. 하느님의 약속이란 ‘정의와 공평’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체현한 나자렛 예수의 신앙을 다시 발견하는 것이다.

       
    ▲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로메로는 1917년 엘살바도르에서 태어나 정신적 총명함과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존경심을 가진 학생을 양성하기로 유명한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공부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구원자’라는 의미의 엘살바도르에 돌아온 로메로는 교구간 신학교 학장으로 일했고, 중앙아메리카 주교회의 총무를 맡았다.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1970년 산살바도로 보좌주교를 거쳐, 1977년 대주교로 임명됐다.

    그가 해방신학의 세례를 받은 것은 친구이자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던 루툴리오 그란데 신부가 암살단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 때문이었다. 루툴리오를 따르던 신자들은 “주교님은 루툴리오 신부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편에 서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때 로메로 대주교의 전향이 이뤄졌다.

    예전에도 들었지만 무심히 지나쳤던 독재정권의 살해와 투옥, 폭행과 유괴가 심각하게 다가왔다. 그들이 우리 시대에 다시 ‘예수’를 살해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강론을 통해 경찰과 군대에 그만두라고 경고하고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는 예수처럼 권력에 의해 지목당하기 시작했다. 그는 강론에서 “만일 그들이 나를 죽인다면, 나는 민중의 삶 속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해받지 않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고 말하던 그는 급기야 권력에 의해 제단에서 암살당했다.

    그러나 로메로 대주교의 변화가 단순히 친구 루툴리오 신부의 죽음 때문이라고 여긴다면 오해다. 이에 앞서 이 사건의 의미를 하느님께 물을 수 있었던 로메로의 신앙이 있었다.

    우리는 특별한 순간에 특별한 사건을 통해 특별한 계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계시를 ‘특별하다’고 느끼는 자에게서만 변화가 시작된다. 사실 성체성사 중에 성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사제의 축성이 성체를 영하는 자의 열린 마음과 만났을 때 발생한다. 요기거리도 되지 않는 면병이 위대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묵은 인간이 가고 새로운 인간을 입는 순간이다. 이 자리에서 2천년 전 죽었던 예수가 내 안에서, 우리 안에서 깨어난다. 이게 부활이다.

    하느님 체험 없는 시대의 절망적 신앙

    신자유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로 인한 폭력, 평화를 위협하는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상황은 우리를 ‘절망적’인 무력감에 빠지게 만든다. 평택 대추리에서, 제주 강정에서 많은 이들이 “그대로 살게 해 달라”라고 탄원했지만 국책사업을 막을 도리가 없었고, 이처럼 승리 없는 우리의 행위가 하느님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답답했다.

    교회 현실 역시 마찬가지다. 로메로 대주교가 아직도 시성 절차를 밟지 못하고 있듯이, 한국 교회의 고위성직자들도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의 예언적 활동을 적극 지지하지 않는다.

    이 모든 현상의 배후에는 ‘하느님 체험의 부재’와 ‘교회는 변화될 수 없어’라는 절망감에서 오는 무력한 신앙이 놓여 있다. 세계 안에서 교회는 예전처럼 발언권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신앙생활은 프랑스 혁명과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상당 부분 ‘개인적인 일’이 되었다. 이른바 취미생활 수준으로 전락한 신앙생활, 그리고 사교장(社交場)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려운 교회, 아직 남아있는 기복주의의 온상, 그리고 그 안에서 ‘공무원처럼’ 보장된 정년을 누리는 성직자들, 팬클럽 운영을 통해 사적 재산을 모으는 성직자들의 투자처 정도로 남아 있다.

    여기서 ‘예수’는 신조 안에만 머물고 복음적 열정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신앙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을 포기하고 나면, 그리스도인들은 ‘투신할 용기’ 대신에 ‘눈앞에 놓인 이득만’을 찾아서 움직인다. 사제들은 성무 집행의 ‘기본’만 하고, 나머지는 ‘여흥’을 즐기는 방향으로 간다. 신자들에게 주일은 단지 쇼핑하기 좋은 날일 뿐이다. 주말마다 대형마트에 즐비한 차량을 보라. 그러나 유다교의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쉬신 날이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것을 되새기는 날’이고, 그리스도교의 주일은 ‘예수의 부활을 기억하는 날’이며 ‘성찬례를 통해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날’이다.

    <그러니, 십계명은 자유의 계명이다>(노트커 볼프, 마티아스 드로빈스키 지음, 분도출판사, 2012)에서는 주일을 ‘노동을 멈추고 영혼을 회복하는 날’이라고 말한다.

    “나는 너의 주 하느님이다. 나는 너에게 일상을 멈추고 거룩한 날을 지키라 명한다. 네 생애가 얼마나 소중한 지 깨닫고, 네 삶의 리듬을 찾기 위함이다. 나는 너에게 거룩한 날을 지키라 명한다. 너의 삶이 일과 돈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고, 눈앞의 이득과 무관한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나는 너에게 거룩한 날을 지키라 명한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위한 시간과 믿음의 공동체를 위한 시간을 보내도록 하기 위함이며, 미사 중에, 하느님과의 만남 중에 너 자신에게 다가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신비가와 혁명가가 하나 되는 길

       
    ▲ 헨리 나웬
    하느님 체험이 없어진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헨리 나웬은 <상처 입은 치유자>(분도출판사, 2001)에서 ‘신비와 혁명(예언)’을 통합시키는 그리스도인의 길을 제시한다. 나웬은 “진정한 혁명가는 모두 그 마음 속에 신비가이기를 요청받고 있으며, 신비적인 길을 걷는 사람은 인간 사회의 환상을 폭로하라는 소명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신비가는 누구나 자기성찰을 통해 병든 사회의 근원을 발견함으로써 사회의 비평가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혁명가도 새로운 세계를 위한 투쟁 가운데서 반동적인 공포나 그릇된 야심과도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인간적인 상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신비는 우리의 무의식까지도 침범할 수 없는 중심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혁명(예언)은 그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발언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신비가가 혁명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만사만인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 하느님이 특별히 고통 받고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망설일 틈 없이 투신하게 된다. 연인을 향한 ‘두려움 없는 사랑’이 그를 현장으로 내닫게 만든다. 무력한 신앙은 그렇게 이슬처럼 말라버리고, 생동하는 신앙으로 거듭난다.

    여기서 헨리 나웬은 신비의 공간과 혁명(예언)의 공간이 따로 있다고 믿지 않는다. 하느님을 응시하고, 하느님의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데, 그곳이 성당이면 어떻고 ‘길거리’나 ‘시장통’이면 어떻겠는가, 묻는다. 그 어디든 그 모든 시간에 그분이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문제는 세상에 깃든 그분의 얼굴을 ‘보는 것’이며, ‘볼 의향이 있는지 자신에게 묻는 것’이다.

    나웬은 <상처입은 치유자>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날 한 젊은 탈주병이 적의 눈을 피해 어느 작은 마을에 들어갔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친절하게 대했고, 은신처를 제공했다. 그러나 탈주병을 찾으러 온 병사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탈주병의 행방을 묻자 사람들은 겁에 질렸다. 병사들은 동이 트기 전에 탈주병을 내놓지 않으면 마을에 불을 지르고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조리 사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사제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탈주병을 적의 손에 넘겨줄 것인가, 아니면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게 할 것인가. 사제는 해결책을 얻기 위해 자기 방에 들어가 동이 트기 전까지 기도하며 성경을 읽었다. 드디어 새벽녘이 되어 사제는 성경을 넘기다가 우연히 이 구절을 발견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

    사제는 성경을 덮고 이내 병사들을 불러 탈주병의 은신처를 알려주었다. 탈주병이 끌려가 살해당한 뒤, 마을에서는 사제가 마을 사람들을 구했다고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사제는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고, 슬픔에 잠긴 채 자기 방에 남아 있었다.

    그날 밤 천사가 사제에게 나타나 “당신은 무엇을 하였소?” 물었다. 그가 “탈주병을 적의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천사는 “당신은 메시아를 넘겨준 것을 모르는가?” 다시 물었다. 그 탈주병이 메시아인줄 어찌 알겠느냐는 사제의 변명에 천사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성경을 읽는 대신에 단 한 번이라도 그 소년을 찾아가 그의 눈을 응시했더라면 당신은 그 사실을 알았을 텐데.”

    세포를 열어 그분을 알아 볼 시선을 간직하라

    상념에 빠지거나 묵상에 잠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통의 현장’을 직접 제 눈으로 보는 일이다. 시몬 베유 같은 이는 중국에서 군벌들 사이의 내전으로 죽어가는 인민들의 참상을 다룬 신문 기사만 보고도 눈물이 쏟아졌다고 한다. 이처럼 공감 능력을 타고난 이가 아니라면, 우리는 직접 가서 보고 만지고 느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비참한 처지에 놓인 목숨들이 소문이나 기사나 사물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생명’으로 여겨져 사랑하게 될 것이다. 가슴 아프게 될 것이다. 끌어안아주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제주 강정에서 왜 사제들이 그토록 애달파 하는지 납득하게 될 것이다. 내 안에 이미 고여 있는 사랑을 길어올릴 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랑하라, 그리고 뭐든지 하라”던 아우구스티누스의 격언을 모든 논쟁을 거슬러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의 모든 세포를 열어 그분을 알아 볼 시선을 간직하는 삶, 그것만이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교회의 가르침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줄 것이다. 복음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다만 우리 눈이 흐려져 복음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자리에 대한 미련 때문에, 또는 게으른 기도 때문에, 결국 나 자신의 고유한 길 안에서 예수를 만나지 못한 까닭에 우리는 스스로 그분의 사람임을 잊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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