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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년 2월 11일] 루가 6:17-26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주님!
  • 청지기
    조회 수: 2715, 2007-02-14 17:15:31(2007-02-14)
  • 지난 주일 베드로를 부르신 예수님 -
    베드로의 어떤 됨됨이가 주님께 부름받는 이유가 되었습니까?
    우직함(충성), 순종, 겸손, 희생(헌신)의 자세.

    이렇듯 예수님은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제자로 부르시고 마침내 산에 올라가시어 기도하시고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 가운데 12제자를 세우셨습니다(6:12-16).

    중대한 결정을 할 때 예수님처럼 기도하고 하느님의 뜻 가운데 하고 있습니까?

    이제 산으로 내려와 보니 12제자 외에 주님을 따르는 다른 제자들과 군중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필요를 해결 받으려고 예수님 앞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18절,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

    예수님은 그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먼저 육체의 질병을 고쳐주시는 치유의 기적을 베풀어주셨고 또 그 중에 더러운 악령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들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인 육체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구원자이십니다.

    오늘 예수님 앞에 나올 때 어떤 기대를 가지고 나왔습니까?
    주님은 어떤 기대일지라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 기대와 소망이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닌 우리의 행복을 위한 필요를 간구하는 것이면, 주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고 들어주십니다.
    이 시간 그 기대로 주님 앞에 나왔습니까?
    아니라면 지금 기대를 가지십시오.

    주님은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며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우리의 필요를 만족시키시며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니다.

    영적인 목마름을 주님의 사랑과과 성령충만함으로 채워주십니다.
    육체적인 질병을 고쳐주시고 내 삶을 힘들게 만드는 악한 영의 묶임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십니다.

    악한 영들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요한 10:10,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지난 금요일 밤 중보기도회 때, 성령님은 여느 때와 달리 마귀의 권세를 대적하는 기도를 많이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만큼 악한 영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중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 마귀의 묶임 가운데 힘들어하며 살아가는 지를 다시 한번 깊게 느꼈습니다.

    타인과 비교함으로 열등감에 묶고 있는 비교의 영!
    음란의 영!
    술 취함의 영!
    말씀과 기도 가운데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영적인 태만의 영!
    근심하고 한숨쉬게 하는 염려의 영!
    하느님의 자녀 됨을 확신하지 못하고 죄책감으로 짖누르는 참소의 영!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못하게 하고 세상과 물질을 사랑하게 하는 맘몬의 영!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게 하는 교만의 영과 그를 통해 관계를 갈라놓는 분열의 영!
    서로 사랑으로 돌아보고 섬기지 못하게 하는 무관심의 영!
    부모님이나 영적 권위자를 거역하게 하는 반역의 영!
    기쁨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우울함으로 빠뜨리는 어둠과 죽음의 영!
    하느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하는 영!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불순종의 영!

    이 시간 잠시 기도하고 설교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하느님이십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시다.

    요한 14: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내가 이루어주겠다.”

    마르 16:17, “믿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따르게 될 것인데 내 이름으로 마귀도 쫓아내고 여러 가지 기이한 언어로 말도 하고 뱀을 쥐거나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것이며 또 병자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육체의 질병의 치유를 위해서!
    나를 공격하는 마귀의 묶임으로부터 자유케 되기 위하여!
    그리고 이 예배를 통해 성령충만함을 받을 수 있도록 !
    기도합시다.
    (기도)

    주님은 우리가 행복하도록 육체적인 연약함을 회복시켜 주시고 영적인 묶임에서 자유케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기름부어 주시는 좋으신 하느님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주님은 우리로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새로운 가치관으로 초대하십니다.

    오늘 본문 - 네 가지 행복과 네 가지 불행!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후자의 네 가지 기준을 행복의 기준으로 여깁니다. 부요함, 지금 배불리 먹음, 지금 웃고 즐거운 삶,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인정받는 삶!
    그런데 주님은 이 삶은 불행을 자초하는 삶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불행하다고 여겨지는 삶의 모습을 행복하다고 합니다.
    가난한 삶, 지금 굶주리고, 울고,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쫓기고 욕을 막고 누명을 쓰면, 우리가 결코 살아가고 싶지 않은 인생의 모습인데, 이럴 때 주님은 행복하고 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와 닿지도 않습니다. 무슨 말인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것인지?

    이 본문을 가지고 한 주간 씨름을 했습니다.
    잠자리에 누워도 눈을 깨도 이 말씀이 맴돌고 성령님께 묻고 ...

    이런 사람이 우리 가운데는 없습니다.
    이렇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의 본래의 뜻을 깨달아 알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주님은 지난 수요일 우리 교회에 오셔서 말씀을 나누었던 박다니엘 선교사님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탈북자들을 돕고 섬기고 제자훈련시키고 남한으로 보내는 사역을 하고 그래서 중국 감옥에서 15개월 옥고를 치른 사람.
    실제로 탈북자들과 북한의 동포들을 생각하며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돈을 쓰지 않기로 결단하고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하고 8년간의 사역동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20번 이상 이사를 다니고 미국시민권자이면서도 중국에서 어려운 감옥살이를 하며 실제 예수님 때문에 중국 땅에서 미움을 사고 내어 쫓기고 누명을 쓰며 고난을 겪은 사람.

    그분에게 이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위로로 다가오고 소망이 되지 않았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고 계십니까?
    20절, 제자들을 바라보며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실제 가진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고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배가 고파 안식에도 밀 이삭을 손으로 비벼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노숙인처럼 머리 둘 곳이 없었는데, 그를 따라다닌 제자들의 삶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바로 그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모두가 제자들처럼 다 버리고 가난 굶주림 애통 박해를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리려 그런 삶의 모습은 나타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의 아들 때문에’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 라는 표현은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기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을 따르는 삶에는 이런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심은 주님과의 사랑입니다.

    군중들은 자신의 필요를 채우고자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을 말합니다.
    물론 주님은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필요가 아닌 주님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그 사랑이 삶의 모든 것이 된 사람들입니다.

    군중과 제자의 차이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 있는가  아닌가입니다.

    그런데요. 인생을 조금만 진지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알듯이, 참된 행복은 나의 필요가 채워지는 것에 있지 않고 인격과의 진정한 사랑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의 기쁨을 위해서 하는 그 어떤 것도 행복입니다. 사랑하는 삶 그 자체가 행복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의 삶이 그랬고 바울로의 삶이 그랬고
    박용하 선교사님의 삶이 그런 것입니다.

    내가 사는 삶이 이분들과는 너무 나와 거리가 멀어도,
    내가 이들처럼 나의 삶 전체를 드리지 못했어도
    나의 일상의 삶 가운데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주님이 가장 존귀기 여기는 영혼을 전도하고자 기도하고 섬기는 사랑의 수고가 있고
    지극히 작은 자들 -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나누고 섬기고,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건강하게 부흥하도록 십일조를 드리고 중보기도를 하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섬기는 모든 수고를 하고,
    주님의 다시 오실 길을 예비하고자 세계선교의 완성을 위해 기도하고 선교 후원하는 그 모든 일들이 있다면,
    이것들이 진정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예수님 때문에 하는 수고이고 희생이라면 그것이 참된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에게는 오직 하느님만이 채울 수 있는 영혼의 빈 구멍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군중들은 그 영혼에 빈 구멍을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으로 채우지 않고 그 어떤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발버둥치고 죄짓고 병들고 마귀에게 묶이고 신음하고 ‘나 살려달라고’ 절규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제자교회 성도들은 오직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울 수 있기를 바라고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기를 바라고 그래서 예수님 때문에 살아가는 행복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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