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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년 2월 26일] 마르코 2:13-22 사랑의 부르심 - “나를 따라오너라”
  • 청지기
    조회 수: 2841, 2006-02-27 09:20:02(2006-02-27)
  • 중학교 시절 ‘길’이라는 주제로 글쓰기를 해서 상을 탔던 기억이 있습니다. 방학 때마다 부모님 집이 있는 강원도 산골을 가려면 꼬불꼬불 아우라지 고개 길을 넘어가야 했던 경험으로 썼던 글이었습니다.

    길은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고마운 친구라고 썼던 기억이 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모든 인생이 돌아 가야하는 곳은 하느님 아버지 품인데, 그 품으로 돌아가도록 이끌어주는 유일한 길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 인생에 참 고마운 친구가 되십니다.

    ‘길’을 뜻하는 영어 단어 WAY에는 ‘방법’이란 다른 뜻이 있습니다. ‘길’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서 하느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갈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의 복음 밖에 없음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죄인된 인간과 거룩하신 하느님 사이를 화해시키고 아버지와 자녀로 회복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길’이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십자가를 향한 길을 걸어 가셨습니다. 십자가를 향한 길을 걸으시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셨고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셨으며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걸어가시면 가장 중요하게 하신 일은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걸어갈 사람들을 부르시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길을 걸어가시다가 레위를 부르십니다.
    “길을 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부르셨다.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나섰다.”(2:14)

    1장 16절에서도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시다가 어부 시몬과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사람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며 두 가지의 질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답으로 주님의 부르심이 갖고 있는 두 가지 특징을 알게 되었습니다.

    질문의 하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주님께서 부르시는 사람은 누구인가?’ 또 다른 하나는 ‘주님이 부르시는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첫째,  ‘주님께서 부르시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 질문은 곧, ‘누가 주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는가?’

    레위를 부르신 예수님이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7절,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지 않고 죄인을 부르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진단하는 인생들은 모두 다 죄인입니다.
    로마서 3:10-18, “올바른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하느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비뚤어져 쓸모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며 그들의 혀는 거짓을 말하고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흐르니 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하다. 그들의 발은 피 흘리는 일에 날쌔며 간 데마다 파괴와 비참을 남긴다.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고 그들의 눈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이렇듯 성경이 말하는 인생들은 다 죄인이기에 죄인들을 부르시는 주님은 모든 인생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았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스스로를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의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의인은 어떤 사람이고 죄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먼저 의인은 스스로 교만하여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인생들입니다.

    나 정도면 됐다고, 이만하면 됐다고 스스로 만족하며 하느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의로 가득 차 있어서 자기 수준에 이르지 못한 사람을 보면 판단하고 경멸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이 말하는 의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예수님 주변에 있었지만, 예수님을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판단하고 정죄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바리사이파의 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한 자리에서 음식을 나누시는 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저 사람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같이 음식을 나누고 있으니 어찌 된 노릇이오?" 하고 물었다.”

    현대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성경 지식이 있습니다. 십일조는 기본이고 선교헌금도 드리고 구제도 합니다. 금식과 기도에 충실하며 열심히 봉사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 마음에는 스스로 ‘나 정도면 됐다’고 만족합니다.
    자기 의가 가득 차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판단하고 경멸합니다.
    예수님은 이들도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자기 의로 가득 차 있어서 예수님이 그 삶에 들어갈 틈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이 남보다 조금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주님을 모르는 것입니다.”(주보 글, 27번)

    반면에 죄인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죄인들은 예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연약함과 죄악을 인정하고 그 죄로 인해 하느님 앞에서 괴로워하며 하느님의 용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며 세상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이렇게는 살아서는 안 된다.’’ 번민하며 새로운 차원의 삶을 갈망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주의 은혜를 사모하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게 됩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를 생각해 봅시다. 당시 세관원들은 식민지 권력 로마에 빌붙어 살아가는 반민족주의 자들로 유대민족 안에서는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어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갔던 사캐오의 예를 보더라도, 세리들은 많은 재물을 축적할 수 있었지만 물질이 인생을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기에 예수님을 필요로 했던 사람들입니다.

    “자신에게 실망하고 절망한 수준만큼 주님은 그에게 임하실 수 있습니다.”(주보 글, 32번)

    바로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레위를 보실 때 그 내면 깊이에 있는 주님을 향한 갈망을 보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의인인가요? 죄인인가요?

    요한1서 1장 8절에 “만일 우리가 죄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 정직하게 죄인 됨을 인정하고 주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 죄인들을 부르시는 것일까요?

    물론 구원을 위해서 입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영혼과 마음과 육체의 병을 고쳐주시며 온전한 하느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시고자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가자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구원의 길로 이 세상 사람들을 초대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러한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인생이 바뀌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레위, 등 12제자가 그랬고 바울로가 그랬으며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도 그러함을 고백합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 부르심의 은혜가 너무나 감격스러워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고백하며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다해 봉사하고 주님의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주님을 위해 일하다가 점차 자신 안에 있었던 눈물 어린 죄의 고백과 구원의 감격이 사라져가면서 바리사이파 같은 의인의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부분적으로 잘못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은 우리를 섬김과 봉사만이 아닌 예수님 자신에게로 부르신 것입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의 삶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의 독특한 특징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율법을 외우고 수많은 행위를 실천하며 살아갔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5:39-40, “너희는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율법이 되어버린 성경말씀이 아닌 신앙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님만이 생명을 주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 무엇입니까?

    요한 17:3,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는 것”이란 주님과 친밀하고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로 살아가면서 더 깊이 알고 사랑하는 삶을 말합니다.
    스스로 의인으로 여기며 살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실상 생명의 주인 되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교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는 말씀은 우리가 그 무엇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주님만을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관계 속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이 부른 제자들에게 투명하고 완전하게 자신을 개방하시며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어가셨습니다.

    15절을 보면, 레위를 부르신 주님은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식사를 함께 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한 가족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식탁을 성스럽게 생각하여 이방인이나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대의 율법의 문화를 뛰어넘어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한 가족이라는 유대감과 사랑을 나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자주 죄인들과 이런 시간을 가지셨는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식사를 나누며 함께 교제하며 그들을 향한 깊은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사랑한다는 것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옆에 있어 주는 것입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가족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는 아빠는 거짓말쟁이입니다.
    교회의 형제, 자매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지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아까와 한다면 사실 사랑이 그 마음에 없는 사람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지 않는 사람은 그 마음에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읽고 음성을 들으며 기도를 통해 주님과 대화하는 친밀한 교제의 시간이 개인의 삶에 확보되어 있지 않으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리는 예배를 소홀히 여기는 자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분과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사랑의 관계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주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 애쓰지 않았어도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며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당신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나를 따라오너라.”
    - 주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계십니까?

    이 시간 조용히 기도합시다.
    주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합시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며 예수님을 갈망하십시다.
    그리고 오직 주님만을 더 알기 원하고 사랑하며 살기를 원한다고 그래서 주님과 함께 있겠다고 결단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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