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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제자교회대한성공회 제자교회

  • [2003년 4월 27일] (요한 20:19-31)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
  • 청지기
    조회 수: 6562, 2003-04-28 13:55:54(2003-04-28)
  • 지난 주일 부활주일을 은혜롭게 보냈습니다.

    부활절예배에 우리교회 재적교우들이 환우분들 빼놓고는 거의 다 오신 것 같아요.   청장년 86명, 학생 10명, 유아 어린이 29명 등 125명의 교우들이 예배를 드렸어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3분은 오시다가 마라톤대회 때문에 길이 막혀서 오실 수 없었다고 합니다. 전액 구제헌금으로 사용될 부활절헌금도 예산이 200만원인데 280만원이 봉헌되었어요.  교우 여러분의 믿음과 사랑을 알 수 있는 한 방법이 객관적인  수치이기에 말씀드린겁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홈페이지에도 올렸지만, 수고하신 여선교회 남선교회 모든 봉사자들과 교우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고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이렇게 성공회 동수원교회로 가족으로 모이게 하셔서 주님을 섬기게 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의 박수를 올려 드리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 이것을 믿을 때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함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 - 이것을 복음이라고 하는데, 문제는 잘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끊임없이 의심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와서 예배드리고 설교를 듣거나 찬양을 할 때면 믿어지는데, 지난 주 설교를 통해서 부활의 증거- 빈 무덤, 증인들이 많다는 것, 사회에 미친 즉각적인 영향, 시대를 통한 수 많은 크리스챤들의 경험-를 들을 때는 인정되었고 손을 들어 믿음을 표시했는데, 돌아서서 세상 한 가운데서 살아갈 때는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같고 아니 진짜 그런가 하는 의심이 들게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그런 것 같습니다. 한번에 확 믿고 변화되어 헌신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면 좋겠는데 자꾸만 의심이 들어오고 내 생각이 믿음과 불신이라는 시소를 타게 됩니다.   어떤 체험을 하면 믿음이 들어오다가도 그 감동이 사라지면 무덤덤해지고 믿음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스스로 헷갈립니다.

    오늘 복음을 보니까 그런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이름은 토마.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한사람인 토마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수난과 부활의 예언을 세 번이나 들었습니다. 25절을 보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다른 열제자들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19절부터 기록되어 있는 부활하신 날 저녁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는 현장에 토마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토마는 다른 열명의 동료로부터 주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25절)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세 가지의 반응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반응은 보고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는 인정하나 믿지 않는 사람들, 영적인 무관심하고, 환란이 닥쳐야 깨닫지만 이미 많은 대가를 지불한 상태가 됩니다.  (예, 이집트의 파라오왕. )

    둘째 반응은 자신이 보는 것만 믿는 것입니다. 이성적이거나 감정적인 사람들, 믿음보다 이성을 더 신뢰하기에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믿음을 추구합니다. 감각에만 의존하기에 의심이 많고 어떤 표적이나 극적인 섭리만을 기대합니다.

    셋째 반응은 보지 않고도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겸손히 믿으며 하느님 만이 믿음의 대상이 되며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 그 예.)

    토마는 둘째 부류의 사람입니다. 보는 것만 믿겠다는 신앙인의 표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신의 말씀도 불신하고 동료들의 간증도 불신하고 하느님 자신보다는 하느님의 표적이나 체험을 통해서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만 믿을 수 있겠다는 태도입니다.   어떤 사람이 물이 없는 수영장에서 다이빙대에 올라가서는 하느님께 이렇게 말했다고합니다. "하느님, 이 수영장에 물을 채워주시면 내가 뛰어내려 보겠습니다." 그때 하느님이 말씀하시기를"그냥 뛰어내려라." 이 사람은 결국 뛰어내리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빈 수영장에 물을 채워주야만 뛰어내리겠다는 표적을 구하는 믿음이기에, 하느님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성경도 수십번이나 통독하고 암송하는 열심히 있는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물위를 걸은 베드로처럼 나도 물위를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학생이 풀이 죽은 모습으로 신부님을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 하느님은 진짜 살아계시나요? 성경말씀대로 나도 믿음으로 물위를 걸어보았는데 물에 빠져 죽을뻔했습니다."   그때 신부님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물위를  걷다가 파도를 보고는 두려워해서 물에 빠졌는데, 형제도 하느님을 믿기보다는 물을 무서워했나 보군요. 이제는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세요."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져보지 않고는 결코 믿을 수 없다는 토마.   물위를 걷는 기적을 경험해봐야만 하느님이 살아계시다고 확신하는 어리석은 신학생.  혹시 우리도 치유, 예언, 방언 등의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며 이런 것들이 나타나고 경험되어져야만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겠다는 태도를 갖고 있지는 않은지요?  내 눈에 보이는 만큼만, 나의 이성에 설득되는 만큼만 믿겠다는 태도는 아닌지요?

    그러나 오늘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친절하신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말하는 토마에게 주님은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못박힌 주님의 손, 창에 찔린 옆구리를 만져보게 하셨습니다.   '그렇게도 믿기 어렵다면, 내가 나의 상흔을 너에게 보여 주겠다.'  '그렇게도 믿기 어렵다면, 방언과 예언과 치유, 격한 감동과 은혜의 경험으로 내가 살아있음을 기꺼이 보여주겠다.'
    예! 주님은 친절하신 분이십니다. 기꺼이 우리에게 주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시며 또 그렇게 행하기를 그 일을 기뻐하십니다.  

    은사를 구하라고, 능력을 구하라고. 그리하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더 큰 선물도 주십니다. (성령세미나의 경험.)  그런데 그렇게도 친절하게 우리에게 주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시며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하시는 주님께서 진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27절,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진실로 믿고 살라는 것입니다.

    29절,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 믿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읽고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우리에게 바라시는 주님의 기대가 있습니다.  31절,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겸손히 믿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중요합니다. 자꾸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세워가게 됩니다.  하느님만이 믿음의 대상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러한 믿음을 요한 1서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목적은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3)

    하느님 자신과 교제를 나누는 삶 - 이것이 믿음이고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은사나 표적이 없을지라도, 감정적인 체험이나 느낌이 없을 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나와 함께 하십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계신 그 분만을 바라보시고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기도하며 성경말씀을 통해서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과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그것이 믿음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여러분을 믿음의 삶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육신의 분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을 버리고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과 교제를 나누며 동행하는 풍요로운 생명을 누리시릴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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