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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년 5월 8일] 요한 17:1-11 하나되는 공동체 - 가족과 교회
  • 청지기
    조회 수: 3506, 2005-05-17 20:13:07(2005-05-17)
  • 어떤 사람이 용변이 급해서 화장실에 들어갔습니다. 한참 힘을 쓰고 있는데 옆에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누가 아는 사람이 따라 들어왔나 보다 생각하고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옆 사람이 ‘식사는 하셨나요?’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도 ‘예, 그쪽도 식사는 하셨나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내 들려오는 말이 ‘전화 좀 끊겠습니다. 옆에서 자꾸 따라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살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따라하게 됩니다.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저는 중학교 때 좋아하던 여학생을 따라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제가 따라갔던 여학생은 사라졌지만, 저는 신앙의 중심을 잡고 오늘날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부모 따라 교회에 나오게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흔히 모태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여기 앉아 있는 학생들을 비롯해서 적지 않은 교우들이 이 부류에 속합니다. 모태신앙인들이 중심을 잡으면 ‘모델신앙’이 되는데, 중심을 못 잡으면 ‘못된 신앙’ 혹은 ‘못해 신앙’이 됩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중심은 무엇일까요?
    신앙의 중심이 되는 내용을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목적과 일치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기에 중심이 있는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하느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 17:3에서는 하느님을 아는 것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요한 17:3.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교리적인 지식적인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인 경험적인 앎을 말합니다. 성경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성품과 속성,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성경본문을 보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를 향한 그분의 마음이 어떠한지 나와 있습니다.

    11절,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지만 이 사람들은 세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여기에 하느님의 존재의 신비가 나와 있습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다. 교리적으로 설명하면 아버지 아들 성령 세분 하느님이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삼위일체하느님입니다.

    또 11절에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떠나시는 주님의 애절한 마음이 나와 있습니다.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죄가 이 땅에 들어온 후에 인류의 역사는 온통 갈라섬의 상처뿐이었습니다.    인간은 부부가 갈라섬으로 가정이 파괴되며 교회나 사회나 국가와 인종들이 갈라져 살아가는 분열의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 세상을 향한 주님의 마음은 하나 됨의 회복입니다.
    하느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성도들이 가정과 교회에서 하나 되고 그 하나 됨이 확장되어 마침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에페 1:10, “때가 차면 이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

    오늘 서신 에페 4:1~6에서는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목적에 합당한 삶이  하나 됨을 이루는 삶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주님의 기대대로 하나 됨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삼위일체 하느님의 존재의 속성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성부 정자 성령 하느님은 세분이 온전한 사랑으로 하나 됨을 이루시고 그 충만한 사랑이 흘러넘침으로 온 피조세계를 사랑하십니다.

    온전한 사랑만이 하나 됨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3장 이후 고별 설교를 통해서 새 계명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랑의 기준점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비로소 하나 됨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 각자의 취향대로 사랑하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우리의 스타일대로, 생각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것도 마음대로 입니다.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이 기준으로 작용합니다. 교회에 오고 싶으면 오고, 말고 싶으면 오지 않으면서도 교회에 다닌다고 말합니다. 헌금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으면서,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봉사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도, 하느님께 봉사하는 것도 아닌 착각인 것입니다.

    사랑의 기준은 우리가 불쌍히 여기고 우리의 도덕성과 윤리성을 만족시키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을 구약의 계명들과 비교해 보면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의 대상입니다.
    구약에서 사랑의 대상은 이방인이 제외돼 있었습니다. 유대인들끼리 사랑한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어떠한 지경에도 참을 수 있는 것은 가족이기 때문이지 남의 자식을 위해선 그렇게 하진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구약의 사랑은 하느님께 선택받은 동족끼리만 사랑하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사랑의 대상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모든 민족과 열방을 포함해 유대인이나 이방인,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 백인이나 흑인, 늙은이나 젊은이, 남종이나 여종, 성별이나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모두 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사랑과 하느님께서 하시는 사랑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입에 달면 삼키고 입에 쓰면 뱉어내는 그런 사랑, 내 맘에 들고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우리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기준을 예수님께서 새 계명으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새 계명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온전한 사랑은 대상을 구분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둘째는 사랑의 한계입니다.
    구약의 사랑은 용서와 더불어 채찍과 징계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한계가 없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죄에 대한 용서를 일곱 번까지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의 용서는 일곱 번이 최대 용량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에 한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한국인의 정서는 삼 세 번입니다. 그 다음엔 흔히 ‘국물도 없다’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개념과 많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한계를 두지 않는 사랑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나요?
    다시 한번 용서하기를 결정하고 선포합시다.

    셋째는 사랑의 방법입니다.
    구약에서 사랑의 방법은 율법과 명령입니다. 율법에 어긋나고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죄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의무적이거나 율법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방법은 먼저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닥에 휴지가 떨어져 있을 때 주울 것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솔선수범해 줍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손가락 사랑을 많이 합니다. ‘이것 하라, 저것 하라’고 손가락으로 지시하는 사랑을 합니다. 그리고 입으로 사랑을 많이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기도에 자신이 속아 넘어가기도 합니다. 화려하게 기도한 후에 그게 자신인 양 착각합니다. 사랑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기도한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방법은 구약의 율법적 사랑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고 말씀하신 것이 주님의 사랑의 방법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본을 보이신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조건 없이 희생하는 무한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해 본 적도, 가져본 적도 없는 사랑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남에게 바라는 대로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그런데 이 사랑이 우리 안에 어떻게 채워지겠습니까?

    우리가 설교를 듣고 끄덕인다고 그 사랑이 내 안에 솟구치겠습니까?

    오직 주님만을 간절하게 바라보고 성령 충만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로마서 5장 5절,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성령으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름에 강한 소낙비가 내리 듯, 우리의 마음에 성령으로 사랑의 소낙비가 강하게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를 향해 기대하고 계십니다. 온전한 사랑으로 한 몸을 이루신 삼위일체 하느님을 아는 그 믿음으로 우리가 가정이나 교회나 그 어디에서나 하나 됨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사랑은 대상을 구분하지 않고 한계를 두지 않으며 솔선수범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만 우리 삶 속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오직 사랑으로 서로 돌아볼 때, 분열의 아픔 속에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를 보며 저기에 진짜 사랑이 있고 진짜 예수님의 제가가 있다며 주님께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밤 중보기도시간에 하느님께서 우리 공동체를 향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 요한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 요한 13:34,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마태 5:9,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

    - ‘모든 위선과 형식적인 것들을 깨뜨리고 오직 진실함으로 행하라’

    두 분씩 마주 앉아 서로의 눈을 바라보십시오.

    고린토 13장 : 가장 큰 은총의 선물 - 사랑

    * 기도합시다 :
    이 시간, 하느님을 믿는다면서도 그분의 사랑으로 행하지 못한 것을 회개합시다.
    성령님께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달라고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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