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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년 3월 20일] 마태오 27:45-54 십자가
  • 청지기
    조회 수: 2849, 2005-03-22 07:58:54(2005-03-22)
  •   오늘부터 부활 전날 성토요일까지 한주간을 성주간이라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특별한 예전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성수요일 저녁에는 ‘십사처기도’를 드립니다. 성목요일 성금요일 성토요일은 특별히 성삼일이라고 부릅니다. 성목요일에는 예수님이 성체성사를 세운 후 세족례를 행하시며 새로운 명령을 주신 날입니다. 성금요일에는 주의 수난일로 십자가를 경배하며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한 중보기도를 바칩니다. 성토요일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을 묵상합니다. 특별히 세례식과 세례갱신예식을 통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하게 됩니다. 열심히 참여하셔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을 만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십자가는 우리 기독교의 상징이요 영성 생활의 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 많은 경우에 십자가가 미화되거나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고통의 실체감을 모르고 지냅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기독교의 상징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역사의 산물이며 수많은 사람이 실제로 그 십자가에서 신음하고 죽었던 저주스런 죽음의 형틀이었습니다.

    오래 전 예루살렘에서 한 십자가가 발견되었습니다. 1968년 6월 예루살렘 전망산 근처에서 도로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이상한 무덤을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학자들이 조사해보니 이 무덤은 묘실과 벽감을 갖춘 전형적인 제2성전 시대의 가족 무덤이었다고 합니다. 이 무덤에는 유대인이 뼈들을 재 매장할 때 쓰는 작은 돌상자(옵서리)가 8개 있었는데 그 속에는 모두 35개의 뼈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못이 박힌 채 나타난 하나의 뼈였습니다. 이 뼈는 꺾여 있었고 두 발을 포갠 채 하나의 큰못이 그 발목뼈를 관통하고 있었습니다. 이 뼈를 의학적으로 분석한 히브리대 의과대학의 하스 교수는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이 뼈는 두 개의 발꿈치 뼈에 하나의 큰 쇠못이 박혔으며 정강이 부분은 의도적으로 꺾여 있어 전형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의 뼈임을 보여준다."

    이 뼈의 주인공은 두 발이 거의 평행으로 나란히 포개져 있었고 거기에 7인치(17~18㎝) 크기의 못이 박혀 있었으며 거기에 붙은 나무는 감람나무였고 나무를 관통한 못은 그 끝이 휘어 있었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사람은 신장 1m67 정도의 20대 후반의 남자였고 그 연대는 주후 7년 유대인 반란 때가 아니면 그 이후 시대(그러나 주후 70년은 넘지 않은)에 죽은 사람이었다고 추정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이 상상해서 고안해낸 것이 아닙니다. 미화된 기독교의 상징도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절규하고 죽어간 죄수들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입니다.

    우리가 이 성주간에 묵상하는 십자가는 고통의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의 신음소리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신음소리가 7개의 말씀으로 나옵니다.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1. 루가 23:34,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을 못 박아 죽이는 군중들과 로마군인을 내려다보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합니다.

    2. 루가 23:43,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옆에 있는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를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끝까지 영혼을 구원하시는 사명을 이루어 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3. 요한 19:26-27,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성모 마리아를 향하여 그리고 제자 요한을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하느님의 가족을 보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피를 나눈 형제 자매 한 가족입니다.

    4. 마태오 27:46,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의 모든 고통을 몸소 겪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심으로 인해 하느님과 영적으로 분리되어지는 깊은 영적인 비애가지도 겪어야만 하셨습니다.

    5. 요한 19:28, “목마르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에 목마르십니다.

    6. 요한 19:30, “이제 다 이루었다.” 죽음으로 사명을 성취하시는 예수님

    7. 루가 23:46,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제 죽음으로 인류 구원의 사명을 완수하신 예수님은 그의 생명을 아버지 하느님께 맡깁니다. 생명의 주인은 오직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이제 그분이 예수님을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살려내시어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합니다.

    이 땅위에 우리 예수님처럼 아름답고 숭고한 삶을 살다간 사람이 없습니다. 불신자들조차도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만은 따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죽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게쎄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신 내용을 보면 얼마든지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주여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내뜻대로 마식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하시며 따라야 했던 아버지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십자가는 하느님의 공의와 사랑을 보여줍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은 결코 죄를 묵인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거룩하시기에 죄를 심판하십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공소시효도 없고 상하 귀천도 없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공의입니다.

    히브리 9장 27절,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죄의 값은 죽음이후에까지 묻도록 되어 있습니다. 죽음조차도 죄를 소멸시킬 수가 없습니다.  지옥은 바로 이 죄를 처리하는 장소입니다. 사람이 단 하나의 죄라도 지었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묵시록 21:27, “그러나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그 도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흉측한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도 결코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 도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다만 어린 양의 생명의 책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들뿐입니다.”즉 해결 받지 않은 죄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죄는 이토록 심각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로는 자신 안에 있는 죄를 괴로워하며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로마서 7,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로마시대 끔찍했던 사형제도 중에 십자가형 말고 죽은 시체에 산 사람을 발가벗겨 묶어 놓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죽음의 육체가 바로 이 사형 제도를 연상하는 것입니다.

    죄는 생명과 인격에 붙어서 기생하며 한 인격을 파멸로 끌고 갑니다. 실재로 나타나는 죄는 생명과 인격 안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죄는 인격의 표현입니다.  

    여기 생일 케이크의 촛불과 용광로의 불이 있습니다. 어떤 불이 더 무서운 불일까요?

    작은 불이든 큰 불이든 똑같이 불은 무서운 것입니다. 상황과 조건만 맞으면 그 어떤 불이라도 모든 것을 불사르고 태워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음으로 음심을 품은 자는 간음한 자라고, 마음으로 미워하면 살인한 자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를 알겠습니까?

    우리의 인격과 생명에 기생하고 있는 죄가 상황과 조건만 허락되면 실재의 죄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실로 거룩하게 살기를 원했던 사람이라면 스스로 거룩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도 바울로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18절, “성서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올바른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하느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비뚤어져 쓸모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며 그들의 혀는 거짓을 말하고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흐르니 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하다. 그들의 발은 피 흘리는 일에 날쌔며 간 데마다 파괴와 비참을 남긴다.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고 그들의 눈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바로 이 무서운 죄 나의 인격과 생명에 기생하고 있는 그래서 지옥형벌을 면치 못할 내가 어떻게 구원받을 것인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정에서 다루어지는 공의의 개념입니다. 생명이 죄를 범하게 되면 생명으로써 죄를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또한 사랑이시기에, 우리가 죄의 값으로 죽는 것을 안타까와하십니다.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죄 없으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흠 없는 어린양으로 죄인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길은 십자가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쁜 소식, 복음이라고 합니다.

    올해도 우리는 고난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복음으로 읽으며 십자가를 깊이 묵상합니다. 매주일 예수님의 성체와 보혈을 먹고 마십니다.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었으니 네가 나를 대신해서 살아주렴.”

    부모를 일찍 잃은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은 믿음도 좋고 착실하게 살았습니다. 형 만한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어려운 생활이지만 열심히 노동하고 고단한 생활 속에서도 새벽기도하고 주일학교 교사로 성가대로 열심히 봉사하며 시간이 나는 대로 무의탁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찾아가 목욕시켜 드리고 말벗도 되어 드리며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정반대입니다. 방탕한 생활로 늘 형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술 취하고 도박하며 때로는 사고를 쳐서 형이 모아놓은 돈을 축내기도 하는 그런 버려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피가 묻은 옷을 입은 채 다급하게 집으로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 동생을 추적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동생을 너무나 사랑했던 형은 순간 동생과 옷을 맞바꾸어 입고 동생 대신 경찰에게 잡혀갔습니다. 동생을 대신하여 재판을 받고 살인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 동생 앞으로 피 묻은 옷과 형이 쓴 편지가 돌아왔습니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우야, 나는 너의 옷을 입고 너 대신 죽는다. 이제 네가 나의 옷을 입고 나 대신 살아 다오.”

    사형집행 이후 재판관은 죽어야 할 사람이 동생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판결은 내려졌고 다시 죄 값을 물을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편지를 읽은 동생은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피 묻은 옷을 없애고 형의 옷을 입었습니다. 형이 사랑한 예수님을 믿고 형이 섬기던 주일학교 아이들과 노인들은 섬기며 동생은 형처럼 살아갔습니다. 여전히 방탕했던 옛 시절의 친구들이 옷깃을 잡아끕니다. 그때마다 동생은 이렇게 외칩니다.

    “이 옷의 주인은 그런데 가지 않았어.
    이 옷의 주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이 옷의 주인은 지금 이렇게 살았어.“

    십자가에서 나는 죽었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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