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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년 3월 6일] 요한복음 9장 주님 믿습니다.
  • 청지기
    조회 수: 3226, 2005-03-07 13:01:16(2005-03-07)
  •   사순절 특강을 통해 권리포기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매일 50여명의 교우들이 오셔서 귀한 말씀을 듣고 주님을 닮아 가는 제자의 삶을 배웠습니다.

      권리포기란 한마디로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자들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삶에는 두 가지의 양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Savior-구원자로 여기는 신앙태도입니다. 문제 발생 시 구원투수로 하느님을 찾는 믿음의 단계입니다. 출애굽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보여준 모습이 이러합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고 하느님의 기적으로 이것이 해결되면 좋아하다가, 마실 물이 없으니까 물이 없다고 불평하고 또 물을 주시니까 좋아하다가, 끊임없이 이렇게 반복되는 신앙의 수준입니다. 이런 믿음을 하느님의 손을 구하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손은 능력 구원 등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이러한 믿음의 간구도 들어주십니다. 사실 많은 신자들은 자기 필요에 의해서 주님을 찾고 구하고 주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이 단계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항상 이 수준으로만 믿음생활을 한다면 개인적인 기복신앙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을 Lord로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Lord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나의 삶과 생명의 주인이다.’ 그러기에 주인되신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 믿음은 철저히 십자가의 신앙에 기초합니다. 사라의 예수님이 죽을 수 밖에 없는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대속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힘없이 늘어진 채 매달려 계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볼 때마다 이 고백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갈 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

      ‘내가 죽었다. 그러기에 나에게는 권리가 없다.
      지금 나의 삶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닌 예수님께서 사시는 것이다.’

      이것이 ‘권리포기’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신자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주인 되신 하느님의 말씀-성경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며 살기를 결정하고 오직 하느님만을 신뢰하며 그대로 따르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삶을 말합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하는 권리포기의 삶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신자에게 풍성한 하느님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잠언22:4,“사람이 겸손하여 야훼를 경외하면 재산과 영예와 건강을 누린다.”

      얼마 전 기독교방송 창립기념 강연에서 존경받는 개신교 원로목사께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진단한 내용이 이러합니다.

      “한국교회는 축복만을 강조하는 신앙 때문에 병들게 되었다. 많은 설교가 축복에 관한 이야기고 많은 기도가 축복을 구하는 기도였다. 축복의 전제가 되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이 무시되었고 교회 안에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경건의 훈련, 영적인 훈련이 무시되었다.”

      즉 한국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축복을 부어주시는 구원자로만 여기는 하느님의 손을 구하는 신앙에 머물러있었지, 예수님을 주님을 고백하는 하느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성숙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 성경을 묵상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촉구하시는 메시지를 듣습니다.
      ‘예수님을 단순한 구원자로 여기는 신앙에서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으로 자라나라.’
      ‘하느님의 손을 구하는 신앙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구하는 신앙으로 자라나라.’  우리들의 영적인 성숙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요한 9장을 보면,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이 등장합니다. 원초적으로 불행한 인생입니다. 스스로 택한 인생이 아니라 그렇게 불행의 한가운데로 던져진 인생입니다.

      여러분, 소경의 입장에서 가장 절실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처지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입니까?
      어느 인생 누구나 당장 해결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이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구원자라고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아시고 우리를 능히 구원해 주시는 Our Savior 구원자이십니다.
      
      많은 간증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구하십시오. 간절하게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여러분을 구원하실 예수님을 신뢰하십시오.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출하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회복하십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는 구조원과 같습니다.

      히브리 4:15-16, “우리의 사제는 연약한 우리의 사정을 몰라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 유혹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어 하느님의 은총의 옥좌로 가까이 나아갑시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받아서 필요한 때에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소경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 연못으로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절망 가운데 이렇게 부르짖었을 수 있습니다.
      
      시편 70:5, “나는 가난하고 불쌍합니다. 하느님, 빨리 오소서. 야훼여, 더디 마소서. 나의 구원자, 나의 도움이시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런 심정으로 하느님을 찾은 적은 없습니까?   “하느님 도와 주셔요, 지금 바로 도와주십시오.”

      우리 성공회 기도서에 보면 매일 아침 점심 저녁 밤에 드리는 기도문이 나오는 그 시작이 이렇습니다.
      “하느님, 우리를 어서 구원하소서.  주님, 우리를 빨리 도와주소서.”
      
      절박한 상황에서 그런 기도 없이 살아온 사람이 있겠습니까?

      연약한 인생길에서 하느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도움을 받고 나서는 다시 감사로 하느님께 나아오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은 우릴 사랑하셔서 우리의 위기 상황에 도와주시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보다 더 한 무엇을 기대하십니다.

      그 이야기를 본문은 계속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눈을 뜬 소경이 영적으로도 밝히 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 사람에게 또 다른 차원의 믿음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단지 구원자로서가 아니라, 주님으로 고백하고 따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이렇게 발전이 됩니다. 성경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소경이 육체의 눈을 뜨게 되었지만 4단계를 거치며 점진적으로 영적 눈도 뜨게 되었습니다.

      첫 단계에서 그는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난 뒤 주님을 한 인간으로 이해했습니다. 11절, “예수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시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기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띄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어떤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요, 구원자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마음씨 좋고 긍휼이 많은 사람이 자신을 도와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예수님을 초자연적인 기적을 베푸는 치유자로 이해했습니다. 15절, “그분이 내 눈에 진흙을 발라주신 뒤에 얼굴을 씻었더니 이렇게 보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라는 사람이 자신의 눈을 뜨게 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회생 불가능한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베푸는 치유자로 발전해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치유자에서 예언자로 좀더 발전했습니다.
      16, 17절, “그들이 눈멀었던 사람에게 "그가 당신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니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하고 다시 묻자 그는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네 번째 단계에서는 소경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이 예언자라는 생각을 갖고 바리새인들과 언쟁을 벌이다가 ?  나의 눈을 뜨게 한 것을 보면, 그는 능력있는 사람이나 예언자가 아니라 하늘에서 온 하느님의 아들이다?  라는 생각을 깆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바리새인들은 소경이었던 사람을 붙잡고 말을 하다가 통하지 않자, 그의 부모를 불러왔습니다. 부모와도 대화가 이뤄지지 않자, 다시 소경을 불러왔습니다.
      이제 바리새인들은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강요하고 있습니다.

      24절, “유다인들은 소경이었던 사람을 다시 불러놓고 ‘사실대로 말하시오. 우리가 알기로는 그 사람은 죄인이오.’ 하고 말하였다.

      그런데 25절을 보면,  소경이었던 사람이 변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앞 못 보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잘 보게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면 겁을 먹고 말을 바꾸던 옛날의 비굴하게 살던 거지 소경인 그가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비겁자도 아니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눈치를 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전의 모습을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소신을 갖고 자신의 주장을 말합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예수가 죄인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그 사람이 나의 눈을 뜨게 했다는 사실이다.”

      27절을 보면,  “당신들은 내가 말해도 듣지 않고 계속 질문하는 것을 보니 혹시 그 사람의 제자가 되고 싶어서 그러는 것 아니냐?”며 도리어 힐문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과 구걸하는 소경의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소경이었던 사람이 감히 이런 식으로 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구원을 받으면 용기가 생기는 법입니다. 세상, 권력, 돈 등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로 소경이었던 사람이 그랬습니다.

      소경이었던 사람의 말을 듣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펄쩍 뛰었습니다. 자존심이 무척 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28, 29절, “이 말을 듣고 그들은 마구 욕설을 퍼부으며 "너는 그자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모세는 직접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지만 그자는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며 눈 뜬 사람을 곤경에 몰아넣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전된 상황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협박하거나 야단치는 관계에서 서로 대등하게 토론하는 관계로 변해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토론하다가 흥분하여 욕설까지 내뱉었습니다. 그러나 소경이었던 사람은 바리새인들의 궤변과 강요에 더는 밀리지 않았습니다.
      
      30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그는 이렇게 대꾸하였다. "분명히 내 눈을 뜨게 하여주셨는데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도 모른다니 이상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안 들어주시지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여준 이가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분이 만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도저히 하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체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소경이었던 사람이 확실한 증거로 주장하자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만하지 말고, 교회에 다닌다고 성경책을 낀 모습만 보이지 말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야 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궤변과 음모는 소경이었던 사람의 확신에 찬 고백 앞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확신에 찬 신앙 고백 앞에 세상은 무너지고 맙니다.

       본문 말씀에서 소경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의 점진적인 생각에 쐐기를 박는 결정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그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쫓겨났다는 소문을 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만난 사건입니다.

      35절에서 38절 말씀입니다. “눈멀었던 사람이 유다인들의 회당에서 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 그를 만났을 때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선생님, 믿겠습니다. 어느 분이십니까?"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지금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주님, 믿습니다." 하며 그는 예수 앞에 꿇어 엎드렸다.”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이제 한 인간의 삶이 육적인 차원에서 영적인 차원으로 승화되는 장면 말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 내 인생이 주님께 속했고 나는 그저 주님의 종일뿐이라는 권리포기의 고백입니다.

       육체의 눈이 보게 되는 기적을 체험했어도 그 인생은 결국 죽습니다. 다시 살아난 나자로도 죽었습니다. 눈을 뜨는 기적보다 다시 살아난 기적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것이 가장 큰 기적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나의 삶을 통해서 주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고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하느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인생이 가장 축복된 인생이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신자의 삶인 줄로 믿습니다.

      보기를 원하고 보게 되는 구원의 은총을 입은 소경이 마침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끓어 엎드리는 장면 - 이것이 우리의 삶에 있어야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인생을 살고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들로 갈등하고 때로는 미숙한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최종적으로 품는 생각은 “예수님이 진정 하느님의 아들인가? 그분이 나의 구원자인가? 나의 주님이신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갖지 못한다면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갈등하고 괴로울 것입니다. 더군다나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용기를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질문의 답을 갖게 된다면 뜨거운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질문의 답을 갖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함께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당신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제가 주님 앞에 끓어 엎드립니다. 예수님이 나의 인생의 주관자이심을 고백하며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따르겠습니다. 주님을 신뢰합니다. 주의 길로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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