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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년 2월 27일] 요한 4:5-42 하느님의 사랑을 마시라!
  • 청지기
    조회 수: 3081, 2005-03-01 10:45:49(2005-03-01)
  •   지난 주일 하느님은 우리에게 계속 ‘새로 나야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새로 나야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야 하느님의 나라에 갈 수 있다.’
       ‘새로 난다는 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보다 구체적으로 나를 향한 그 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과의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갖게 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보면, 우리는 한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는데 사마리아를 거쳐서 가시겠다고 합니다.

      당시 유다인의 역사적 문화적인 배경을 보면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만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갈릴리로 가면 하루면 갈 수 있는 길인데도, 사흘을 걸었으면 걸었지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지 않겠다는 것이 유다인들의 생각입니다.

      역사적으로 사마리아인은 이방인의 침입으로 인해 피가 섞이고 종교가 혼합된 사람들이기에 순수 혈통 정통임을 자부하는 유다인들은 전혀 상종하지 않고 멸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3절, 4절, (공동번역으로는 예수님의 의지가 안 나타남.)
      개역성경 -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영어성경 - 사마이라를 통과해야하는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He found it necessary to pass through Samaria
      And he must needs go through Samaria(kjv)
      그러면  예수님이 느낀 필요가 무엇일까요?

      인종적인 차별이 있지만, 하루 길로 빨리 가겠다는 실용적인 필요였을까요?

      그랬다면, 여인과의 긴 대화도 불필요한 것이고 또 사마리아 마을에 들어가 이틀이나 묵으시며 사마리아인들과 교제하지 않았겠지요?

      예수님이 반드시 사마리아를 거쳐 가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 여인을 만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통해서 갈릴리로 가시겠다는 것은 사마리아에서 한 여인을 만나고자 하는 의중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특징을 보면,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항상 하느님 아버지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역을 진행하셨던 것입니다.

      요한 5:19-20, “정말 잘 들어두어라.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할 뿐이지 무슨 일이나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친히 하시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진실로 사랑하셨기에 새벽마다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그 시간에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 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큰 도전이 되는 것이지요. 이 사순절 동안 성부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그분과 교제하는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삶의 최우선순위에 두셨고 아버지의 뜻을 순종해 가신 예수님의 삶을 배워가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기도와 묵상 중에 사마리아 성에 사는 한 여인을 구원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녀가 지닌 삶의 공허함과 아픔을 보았으며 이제 그 여인을 만나시고, 그 여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사마리아로 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지극히 작은 여인일지라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주님이 사마리아로 가셨습니다. 우물가에 도착했습니다. 정오였습니다. 한낮의 열기가 대단합니다. 길가시던 주님도 지치셨습니다. 제자들이 음식을 구하려 마을로 간 사이에 우물곁에 앉아서 쉬고 계셨습니다. 혼자 남아 있었습니다. 그 때 동네에서 한 여인이 우물로 나옵니다.

      “물 한 그릇 마실 수 있겠소?”

      이 여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유대 남자는 웬만해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 건네는 법이 없습니다. 대화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어째서 유대 사람으로서 제게 말을 거십니까?”
      “글쎄요. 당신에게 물을 좀 달라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당신이 내게 물을 달라고 했을 것이고 그러면 내가 생수를 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여운을 남기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잠시 이 여인의 처지를 살펴봅시다.
      보통 물을 긷는 시간은 시원한 아침이나 서늘한 저녁때입니다. 한낮은 아닙니다.  그러나 삶이 기구했던 여인은 동네에서 왕따당했습니다. 차라리 한낮의 뜨거운 햇살이 동네사람들의 백안시하는 눈길보다는 편안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 한낮에 우물가로 나왔습니다.

      동네에서는 아무도 말벗이 없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말벗이 없는 사람들에게 다가서면 쉽게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녀를 만나고 그녀의 삶을 치유하고 회복하시고자 일부러 이 길을 택한 주님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사마리아로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는 구절의 의미입니다.

      처음에는 마실 물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습니다. 육신의 목마름에 대한 이야기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더 차원 높은 데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깊은 필요를 충족시키는 물을 주시겠다고 영적인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계속 마실 물 이야기라고만 생각합니다.

      “선생님, 우물이 이렇게 깊은데다 선생님께서는 두레박도 없으시면서 어디서 그 샘솟는 물을 떠다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이 우물물은 우리 조상 야곱이 마셨고 그 자손들과 가축까지도 마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우물을 우리에게 주신 야곱보다 더 훌륭하시다는 말씀입니까?”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데도 여자는 아직도 마실 물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그러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여인의 삶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건드리십니다.
    “댁의 남편을 데리고 오시지요, 그리고 좀 더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 여인이 갑자기 표정이 난감해졌습니다. 메인 데 없이 자유롭게 살아온 여인입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 치울 정도면 상당한 미모가 있었던지 아무튼 센 여자입니다.
      그렇지만 여인의 삶이 만족이 없는 고단한 인생임을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남편이 없습니다. 내 인생의 문제에 끼어드는 예수님이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순발력 있게 대화의 주제를 바뀝니다.
    “예배에 대해서 말씀해보지요, 당신 생각에는 우리가 여기 이 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피해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핵심적인 문제로 사람을 이끌고 갔습니다. 대화가 끝날 때쯤에는 자기와 대화하는 분이 약속된 구원자요 세상의 구주라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동네에 돌아가서 자기가 만난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내 모든 과거를 말해준 사람을 만나보시지요. 그 분은 틀림없는 약속된 구원자입니다.󰡓
      성경은 이 여인의 증언으로 인해서 동네 사람들이 많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여인이 그날 한낮에 물 길러 우물로 갈 때에 인생의 새로운 의미와 방향을 찾게 되리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만나 복된 대화를 나누리라고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여인이 만난 분은 사람 몸을 입고 오신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주님과 이 여인의 만남에는 우리가 지나칠 수 없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는 우리에 대한 모든 것을 아시고도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그녀의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과거도 현재도 모두 아셨습니다.
       17절, 18절 - “그 여자가 남편이 없다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남편이 없다는 말은 숨김없는 말이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사실은 네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착한지 나쁜지 추한지 아름다운지 모두 아십니다.
      “사마리아인”이라고 무시하듯 내뱉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행실이 나쁜 여인, 죄인”이라고 조롱하지도 않았습니다.
      원문을 보면, 다만 21절에는 “여자여”라고 부릅니다. 부드럽게 “부인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이 “여자여”로 번역된 말은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가 애굽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부를 때 사용한 칭호입니다. 십자가에서 어머니를 향해서 사용하신 호칭입니다.
      따뜻함과 관심이 담긴 말로 다가오십니다. 그녀의 모든 것을 아시고도 여전히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주님은 결코 우리를 무시하는 분이 아니시고 세워주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성경의 하느님은 우리를 결코 고발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자신에게 하느님께 정직하지 않는 한 하느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없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놀라운 주님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아들께서 인생의 방황 가운데 있는 한 여인을 만나시고자 사마리아 길로 택하셨습니다. 행로에 지치시고 더위를 식히려고 목을 축이려고 우물곁에 앉아 계십니다. 그 때 한 여인이 다가옵니다. 그녀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께서 먼저 말을 거십니다. 인종 우월감도 없었고 남자라고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종교적인 난관을 뛰어넘어 다가오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 하십니다.
      더운 날 냉수처럼 영생을 주시려 하십니다. 여러분을 새롭게 하시고 영원토록 만족시켜주시려 하십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우물가의 여인과 사마리아 동네사람을 사랑하심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 알기를 바랍니다.

      죄인된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
      요한 3:16.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고난당하고 죽으신 그분의 사랑을 깊이 느끼길 원합니다.
      로마서 5:8,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이 사랑만이 우리 인생의 깊은 필요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사랑의 화신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의 깊은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시고 새로운 삶으로 인도해 주시는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10절,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
      
      그 물은 어떤 물입니까?

      14절,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성경 곳곳에는 여러분과 저와 같은 인생을 목마른 자라고 묘사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의 갈증을 해갈시켜주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여러분은 해갈하고 싶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목마른 영혼을 추길 수 있습니까?

      자신에게 정직하십시오. 삶의 허무함을, 공허함을 인정하십시오.
      예수님께 목마름을 고백하십시오.
      “당신만이 내 영혼의 갈증을 해갈시켜 주실 분입니다.”라고 고백하며 나아갑시다. 그 때 비로소 주님 주시는 만족을 누릴 것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 분의 사랑만이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만족시켜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여인이 찾아 헤매던 것입니다.

      파스칼이 말한 대로 우리 인새의 삶에는 하느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백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깊은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워주실 분은 예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 때 우리 인새의 깊은 필요가 채워집니다.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인 스펄전 목사가 어느 날 훌쩍 훌쩍 울고 있었습니다. 이상히 여긴 아내가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오늘은 슬픈 날이야. 십자가를 생각하는데도 감동이 없어.”
      감동이 없는 메마른 가슴을 아파하며 울 수 있는 사람은 절대 잘못된 기로 나갈 수 없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가장 많이 울었기에 19세기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합시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느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하십니다. 영원한 삶에 대한 갈증을 채워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목말라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갈망합니다. 예수님만이 그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십자가의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이 시간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을 마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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