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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년 2월 20일] 요한 3:1-17 새로 나야만 한다
  • 청지기
    조회 수: 2151, 2005-02-21 09:41:40(2005-02-21)
  • 제가 아는 N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아주 이제 중년의 나이에 들어선 아주 지성적이고 인격적인 신사이십니다. 흔히 법 없어도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 그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다.

    항상 법을 준수하며 선행을 베풀고 착하게 살았지만, 이분에게는 진리에 관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성실한 삶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허전했고 만족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N씨는 어떤 청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시골뜨기 나이 먹은 청년이 하느님의 말씀을 꽤 그럴듯하게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이 청년이 이웃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신기한 일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성전에 들어가서는 성전 제사를 이용해 돈을 버는 장사치들을 호되게 야단치고  쫓아냈다고 합니다.

    온통 사람들은 이 청년의 이야기로 떠들썩했습니다.  그 청년을 만나면 마음에 왠지 모를 감동이 오고 깨우침이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아니면 가당치 않을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니 하느님이 보낸 사람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출신성분을 보면 영 신통치 않아서 이 청년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N씨는 이 청년을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나이도 한참 위고 학식도 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는 자신이 시골뜨기 청년을 만난다는 것이 왠지 자존심도 상하고 사람들이 보기에 창피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N씨가 보기에 그 청년은 하느님이 보낸 사람임에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N씨는 어느 날 밤에 용기를 내어 그 청년을 찾아갔습니다.

    여기서 N씨는 니고데모라는 사람이고 청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보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3절, “정말 잘 들어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요한 2장 25절에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마음의 고민과 허전한 마음을 보시고 ‘새로 나야만’ 천국에 볼 수 있다고, ‘새로 나야만’ 천국을 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로 나야만” 인생의 방황이 끝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든지’라고 말씀하셨듯이 모든 인생들이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말이 이 말입니다.

    “누구든지 새로 나야한다.”

    누구든지 ‘새로 나야만’ 이 땅에서 하느님의 나라 천국을 경험할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죽어서도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 있다면 “새로 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 자란 사람이 다시 태어나다니요?’
    니고데모는 착하게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영적인 안목이 없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새로 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새로 난다’는 헬라어원어로 ‘겐네데 아노덴’이라는 말인데, 이 표현은 “하늘로부터 태어나다. 31절” “위로부터 태어나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느님께로서 새롭게”를 의미합니다.

    예수님는 어떠한 육적인 시도가 아닌, 영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남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길이라고 알려주시고 니고데모가 그 구원의 길로 들어오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다시”라는 표현에 당황하여 어떻게 육적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하든지, 어머니의 혈통이 유다인이면 당연히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혈통으로나 자기 노력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자아가 하느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새롭게 변화되는 사건,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는 필수적인 요청인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이 비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계실 것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님, 이 시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신비로운 하느님의 경륜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아멘.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새롭게 변화되는 사건인 ‘새로남’이 가능할까요?

    예수님은 5절에서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물로 새로 남’은 죄사함의 표지로 물세례를 받는 영세성사를 말하시는 것이고 “성령으로 새로 남”은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워지는 성령세례, 견진성사를 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해석은 16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요한 3잘 16절 말씀은 성경 전체를 요약하는 요절인데, 이 말씀을 함께 읽어봅시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내가 죄덩어리,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그 사랑 때문에 이 땅에 오시어 우리의 죽음을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외아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새로 남’의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결론은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만 에페 2장 1절의 말씀처럼, 죄와 잘못을 저질러서 죽었던 내 영이 다시 살아납니다. 영적인 생명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생명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새로 나는 것입니다.

    죽었던 영이 살아나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하느님의 통치가 내 삶에 시작됩니다.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나를 통해서 하느님의 통치가 내가 서있는 삶의 자리-가정, 직장, 사회, 나라와 민족-가운데에 하느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록 우리가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할 지라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멘?

    이것이 예수 믿고 새로 태어난 신자의 삶의 실재입니다.

    어머님이 소천하신지 보름이 지났습니다. 보고싶습니다. 아버님과 통화를 해보면 어머님이 안 계신 아버님의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눈물이 핑 돕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어머님께서 예수님을 믿으시고 새로 나셨기에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기에 거듭남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제가 천국에 가는 때가 언제이든 그때에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도 보고 어머니도 뵐 것이기에 그 소망으로 위로를 얻습니다.

    “새 임금 모시고 사는 나라 친구들 그곳에 다시 모여 이웃과 형제들 서로 사랑함으로 하느님 나라가 영원하네”

    빅터 프랭클이라고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은 일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정신과 의사로서 2차 대전 때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몇 날 며칠을 열차 속에서 짐짝 취급을 받으면서 실려 가고 있었습니다. 도착을 해서 내리자 독일군 장교 하나가 오른쪽 팔꿈치를 왼쪽 손바닥으로 괴고서 있었습니다. 그는 한 사람씩 내릴 때마다 손가락으로 오른쪽 왼쪽을 가리켰습니다. 그 손가락의 방향에 따라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오른쪽으로 가고 왼쪽으로 가야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른쪽으로 간 사람들은 당일 가스실에서 다 죽었고 왼쪽으로 간 사람들은 살아남은 것입니다. 살아남은 자들도 2차 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10퍼센트만이 밝은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 장교의 손가락의 향방이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 것입니다. 프랭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쪽 혹은 저쪽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단순한 동작에 의해 개개인의 운명이 결정된다면 그것은 정말 불공평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었다. 누군지 모르는 낯선 사람의 손가락에 의해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얼마나 숨막히는 순간입니까?
    마지막 날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때에 비슷한 순간이 우리 눈앞에 벌어집니다. 물론 심판석에 앉으신 그분은 낯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오른쪽 왼쪽을 가리키는 그런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한 운명대로 오른쪽 왼쪽을 가리키실 뿐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으면 오른쪽으로, 믿지 않았으면 왼쪽으로 가라고 지시할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놓고 불공평하다고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믿어도 내가 믿은 것이고 안 믿어도 내가 안 믿은 것입니다. 영생을 얻은 것도 내가 믿어 얻은 것이요, 영생을 거부한 것도 내가 안 믿어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 믿고 새로 나야만 합니다. 누구든지 새로 나야만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고 갈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할렐루야!

    문제는 사람들이 이 진리를 너무나 무시합니다.
    아마도 너무나 쉽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공짜라면 잘 안 믿는 것처럼,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도 없이 예수 믿기만 하면 공짜로 영생의 선물을 얻어 천국에 간다니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출애굽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불순종한 죄악으로 인해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때 모세의 애절한 기도를 들으신 하느님이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셨습니다.  구리뱀을 만들어 나무에 높이 매달아 누구든지 나무에 달린 구리뱀을 본 자는 살고 보지 않는 자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쉽고 허무맹랑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구리뱀을 본 자는 살았고 믿지 않고 쳐다보지 않은 자는 죽었습니다.

    나무에 달린 구리뱀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살고 믿지 않는 자는 죽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새로운 생명이 들어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와 능력으로 죄와 마귀를 이기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만족하는 삶을 살게 되고 죽어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은 오른편으로 가라고 심판하시어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을 누리게 됩니다.

    바로 오늘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천국 백성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 절박한 천국복음을 힘차게 전파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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