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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년 9월 26일] 에페소서 강해 8 - 3:14-21
  • 조회 수: 4624, 2004-10-04 09:08:09(2004-10-04)
  • 내적인간으로 굳세게 서라!

    인간은 기도하는 존재입니다. 우상에게 절하고 기도하고 혹은 종교가 없어도 그 무엇인가를 대상으로 기도합니다. 인간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우리 크리스챤은 얼마나 큰 축복을 받은 것인지!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영원토록 살아계신 하느님 그 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응답하십니다.

    20절 말씀대로,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믿으시는 분만 큰 소리로 아멘합시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분을 알았기에, 에페소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앞서 1장 15절 이하에서는 에페소 교우들의 영안이 열려 하느님 세계의 능력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지식이 아닌 체험 가운데 하느님을 참으로 알게 하여 주십시요.”
    “하느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성도들과 함께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게 해 주십시요.”

    이제 다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하느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드립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했을까요?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할 때는 그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합니다. 더군다나 하느님과 친밀함을 갖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중보자는  상대방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그 사람의 삶 가운데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4년 전부터 꾸준히 수요일 밤마다 중보기도회를 해 왔습니다.
    10월부터는 금요일 밤으로 시간을 옮겨 계속 중보기도회를 가질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체들을 위해, 교회를 위해, 그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싶은 소원을 일으켜 주셔서 금요일 밤마다 이 곳 성전에 나와 함께 뜨겁게 기도하는, 기도의 불길이 타오르길 소망합니다. 아멘?

    중보기도시간을 통해서 하느님이 우리교회 공동체를 향해 자주 지적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관계의 문제입니다.

    일전에 말씀드렸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오래 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친하게 지내던 청년 사이에 관계가 깨져서 두 청년이 수개월동안 외면하며 지내왔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두 청년이 함께 기도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기도회를 시작하고 진행하려고 하는데, 한 자매가 말할 수 없는 아픔을 호소했습니다. 왜 그런지 주님께 묻고 기도했더니, 이 자리에 회복되지 않은 관계로 인해 하느님의 마음이 아프다고 그래서 한 자매를 통해서 하느님의 아픔을 알게 하셨고 진정 둘이 용서하고 화해하고 하나되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날 말씀대로 두 청년은 서로 용서하고 화해했고 이제는 다시 이전처럼 친한 친구로 회복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요즘도 종종 하느님께서는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성도의 가정 안에 사랑으로 회복되지 않은 깨어진 관계가 있다고, 그로 인해 주님의 마음이 아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깨어지고 엇나간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고 먼저 사랑으로 행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혹시 이 자리에 회복되지 않은 관계로 인해 힘들어하는 교우들이 계시다면 사랑의 능력이 부어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하나 되는 역사가 일어나길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막힌 담을 허무시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주님, 이 시간 모든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을 부어주소서.”
    이렇듯 중보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상대방을 향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어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중보기도자였던 사도 바울에게도 에페소 교우들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고 그 내용이 오늘 성경본문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1장의 기도가 하늘의 영역이었다면, 오늘의 본문의 기도는 주로 이 땅에서의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성도 간에, 사람 관계가 어떠해야하는지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17절 후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가기를”

    “뿌리를 박고”는 나무를 두고 한 말이고, “기초”라는 말은 집을 두고 한 말입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처럼 든든히 서고, 기초가 굳건한  터위에 세워진 집처럼, 흔들리지도 변치도 않는 사랑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하지만 언제나 흔들립니다. 젊은이가 사랑할 때는 추운 겨울 날씨도 모를 정도로 뜨겁게 서로 사랑합니다. 그래서 결혼을 합니다. 세상을 얻은 것처럼 좋아합니다. 꿀처럼 답니다. 시간이 오는지 가는지를 모를 정도입니다. 그러나 얼마를 살다보면 서로 모르던 것을 알게 됩니다. 세상에 천사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툭탁거리며 다툽니다. 산다, 안 산다 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흔들리는 것이 인간의 사랑입니다.

    부부간의 사랑이 이럴진대, 부모와 지식의 사랑도 흔들리고 그것을 넘어선 성도간의 사랑, 이웃간의 사랑은 얼마나 흔들릴까요?

    이렇듯 흔들리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 사람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떠실까요?

    예를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제가 많은 사람들 중에 누구를 좋아할까요?
    솔직히 제 아이들-다현이 다은이를 칭찬해 주고 사랑으로 대해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부모의 마음이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도 누가 자기 자식에게 잘해 주면 그 사람이 좋지 않겠어요?
    하느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느님도 하느님 자녀에게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시지 않겠어요?

    그럼 누가 하느님의 자녀입니까?
    먼저는 성도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 하느님의 자녀라는 특권을 가진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우리들, 성공회 제자교회 식구들이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가 아끼고 사랑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마음은 속상하고 아픈 것입니다.
    그 다음은 교회 밖의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믿지 않아도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잃어버린 하느님의 자녀들이죠. 주님은 그들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복음을 전함으로 마침내 주님께 돌아오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이 늘 유혹과 시련과 상처에 흔들려서 사랑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주님의 마음은 아픈 것입니다.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살려고 애를 써야만, 18절 19절에 나와 있는 기도의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18, 19절,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18절의 ‘하느님의 신비’는 하느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넓고 길고 높고 깊은 하느님의 사랑,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사랑으로 살려고 할 때 개달아 알아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설교에 감복한 베드로가 이제 주님 말씀대로 살아보겠다고 결심하고는 예수님께 자기에게 잘못한 형제를 일곱 번 정도 용서하면 되겠냐고 묻습니다. 이때 주님은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저는 저의 한계를 뛰어넘는 주님의 사랑을 자주 바라보게 됩니다. 아이들이 저의 기준과 생각에 미치지 못하는 언행을 하게 되면 가끔 제 안에 아이들을 향한 화가 올라오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사랑이 아닌 화난 감정으로 큰 소리를 치고 혼내고 그로 인해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아버지학교에서 훈련도 받았고 기도하고 묵상하는 신앙인이지만, 저의 사랑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하느님 아버지를 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신 아버지.
    그 크신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은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요. 주님은 이런 나를 향해 너무나 큰 기대를 갖고 계십니다. 19절의 후반부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라는 말씀처럼, 내가 그 크신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감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만큼 자라나고 나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계획이 성취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무엇이라고 했나요? 유다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하나되듯이 온 민족과 열방이 하나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 각자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그 사랑으로 성숙해져서 온 성도들과 함께 일치를 이루는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가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완성되고 주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아니 그이전에 어떻게 하면 더 깊이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사랑을 기초로 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 해답이 16절, 17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읍시다.
    “넘쳐흐르는 영광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여러분의 힘을 돋구어 내적 인간으로 굳세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 가 사실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내적 인간으로 강하게 서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진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하느님의 입김을 불어 넣음으로 사람이 되었습니다. 즉 사람은 육과 영혼으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비오스” : 육적 생명이 있고 “조에” - 영적인 생명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비오스’를 “외적 인간”이라 하고 ‘조에’을 “내적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고후 4장 16절에서 말하기를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생로병사라는 인생의 길을 갈지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굳세어져서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가는 내적인간으로 굳세게 서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주인으로 살아계셔야 합니다.

    성령 하느님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입니다.
    연약한 우리를 도우시고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협조자 성령님!
    바로 이분 성령님을 인정하고 의지하고 환영하며 여러분의 내적 인간의 주인으로 초대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 감정 의지 전 인격을 주님께 내어드림으로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와 사심으로 나의 삶을 통치하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럴 때 비로소 우리의 인생에 흔들리지 않는 사랑의 삶이 시작되고 하느님이 사랑을 깨달아 알아가며 우리의 인격이 성숙해지고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이 나의 삶을 통해서 성취되는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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