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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제자교회대한성공회 제자교회

  • [2004년 4월 11일] (고전 15:1-29, 요한 20:1-8)
  • 청지기
    조회 수: 3580, 2004-04-11 22:48:41(2004-04-11)
  • 할렐루야!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지금 하느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할렐루야!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뿐만 아니라, 우리 조국과 전세계 민족 열방 가운데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옆에 계신 분에게 부활 축하 인사를 나눕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상영중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수난당하신 이야기를 성경대로 만든 작품으로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영화입니다.

    지난 목요일 최후의 만찬 기념예배 때 보면서,   제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얼마나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회개하고,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예수님께서 겪으셔야 했던 수난이 얼마나 처절했던 것인지를 가슴 깊이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 검색하다가 보니까 어느 목사님이 이 영화에 대해서 아주 혹평을 해놓은 글이 있더군요. 그 중 한 대목만 읽어드리겠습니다.

    "예수의 생애가 빠진 수난이란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 일 뿐이지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십자가 수난과 처형을 어찌하여 '대속'이라는 방식으로 이해했는지는 그의 생애를 말하지 않고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에 속한다.   예수가 벌인 하느님 나라 운동을 쏙 빼놓은 상태에서 보여주는 십자가의 처참한 수난은 일반에 '마술적인 대속'의 의미만 심어주기에 안성맞춤인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예수를 닮고 그가 걸었던 길을 따르려는 자들보다는, 인간으로서는 감히 범접하지 못할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얻은 대속과 부활의 영광을 누리려는 신앙적 이기주의자들만 양산시킬 것이 불 보듯 훤하다."

    사랑 그 자체로 삶을 살아가신 예수님,  버려진 인생, 창녀 막달라 마리아의 삶을 회복시키고  돈밖에 모르던 인생, 삭캐오를 성경에서 가장 멋진 회개의 인물로 변화시키신 예수,   손가락질 받고 천대받던 죄인들, 병자들, 마귀들린 사람들, 그 소외된 인생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천국의 새삶으로 초대하고 고치시고 가르치신 사랑의 주님 예수!

    이렇듯 지고지순한 예수님의 삶, 갈릴리 예수의 삶을 말하지 않고,   그 사랑의 삶을 따르지 않고   그저 예루살렘의 십자가의 수난과 대속의 죽음만을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개인적인 구원의 은혜만을 누리겠다는 이기적인 신앙인을 만들어 버린다는 비평입니다.

    일면 타당한 시각입니다.   사실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지만 정작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사랑의 삶을 따라가고 있지 않기에 교회가 무기력해 지고 사회가 점점 더 병들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토록 사랑의 삶을 살아가신 그 분의 삶을 볼 때,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왜?    죄없는 예수가, 그 아름다운 청년 예수가 그토록 처절한 수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조롱과 수모 속에 아무런 저항없이 너무나 무기력하게도, 왜 그 길을 가야만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수난복음을 읽으면 들었듯이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조롱합니다.  "이 사람이 남들을 살렸으니 정말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어디 자기도 살려 보라지!"    군인들도 나서서 조롱합니다.  "네가 유다인의 왕이라면 자신이나 살려 보아라"  예수님의 옆에서 똑같이 십자가에 매딜려 죽어가는 강도도 조롱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 보시오!"

    비아냥거리는 조롱 속에서, 하늘의 천군천사라도 호령하여 그 반역의 무리들을 쓸어버리면 속이 시원하련만,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주며 많은 기적을 행하시던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왜 그렇게도 무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공의의 하느님이 세우신 법이 '죄의 값은 죽음'(롬 6:23)이기에 그리고 바로 우리가 죄인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들이기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은 죄없으신 자신이 인간의 죄값인 죽음을 죽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아시고 조롱와 수모속에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패션 오브 더 크라이스트' 영화의 끝나는 부분의 한 장면을 보면, 예수님이 숨을 거두지자 하늘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는데,  하느님 아버지의 그 애절한 자비의 마음을 느끼게 합니다.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독생성자를 내어주신 하느님,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으로 끝났다면, 지금 말씀드린 십자가의 복음은 가짜가 되고, 인간의 역사는 죄와 죽음의 권세인 사탄의 손아귀에서 절망 속에 끝나 버리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오늘 서신 고전 15:17-18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죄는 아직 남아 있어 우리는 죽음을 면지 못할 인생이 되고, 그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 크리스챤의 인생이 가장 가련한 신세가 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련한 사람일 것입니다."

    바울은 정말 인간적인 말을 한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바울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전하느라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평생 두들겨 맞으면서 여기저기 다녔고, 천대받아 가면서 살다가 나중에는 로마 감옥에서 고생하다 끌려 나와 참수형을 당한,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비참한 일생을 살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고, 그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세상에 바울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멍청해도 한참 멍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만 불쌍합니까?     이렇게 좋은 날씨에 우리는 왜 하필이면 여기 와서 앉아있습니까?   여기 저기 꽃이 피어 있는 계절인데 야외에 나가서 도시락 풀어놓고 먹어 가면서 가족과 함께, 연인과 함께 꽃향기도 맡고 계절의 여왕 봄을 즐기면 졸을 텐데, 왜 지금 여기 와 있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여기 와 있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웃기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정성껏 부활절헌금까지 준비해 가지고 들고 나왔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정말 우리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 기독교의 주관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인 증거들이 예수의 부활을 우리에게 웅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기록처럼, 예수의 시신을 안치하고 입구를 굳게 닫아 로마 병정들이 지키고 있었던 그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것이 첫번째 증거가 됩니다.   또 오늘 서신 고린토전서 15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수많은 목격자들이 예수의 부활의 증인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5절 이후에 보면 바울이 대충 언급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베드로를 위시해서 500여명이나 되는 제자들과 끝까지 예수를 믿지 않으려고 버티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까지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다 목격자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진짜 목격자들이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건한 여인들, 즉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 받은 여인들이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했고 그것을 전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마리아가 그 예가 되지요.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쓰던 당시만 해도 여자들의 증언은 법적으로 효력을 가지지 못했었습니다. 아무리 진실한 말을 해도 여자가 한 말은 일단 접어두고 참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관례를 따라서 바울도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것을 여기에 기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남자들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두 사람이 보았다고 말해도 함부로 의심할 수가 없거늘, 수백 명의 사람들이, 경건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면, 누가 이것을 거짓말이라고 꾸며낸 이야기라고 부인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이만큼 확실한 것입니다.        

    또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자기 자신의 간증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제일 마지막에 본 사람이 누군가?' 라고 묻는다면 바울 자신이라고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려고 이를 갈면서 다마스커스를 향해 가던 사람입니다. 그 때 갑자기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찾으셨습니다. 그는 그의 영광스러운 빛 앞에 거꾸러졌습니다. 간신히 눈을 뜨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아무도 없는데 누구냐고 물었겠습니까?   아니죠. 분명히 바울만이 본 예수님의 실체가 있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드디어 사도 바울로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실히 증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간증자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초반부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진실입니다.

    진실이기 때문에 복음이 지금도 땅끝까지 증거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지금도 북한을 비롯하여 중국에 있는 지하 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자기 생명을 내어놓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진실이기 때문에, 지금도 지구상에 있는 수십 억의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릎 꿇고 경배하고 있습니다. 꾸며낸 이야기에 누가 생명을 걸겠습니까? 꾸며낸 이야기에 누가 변화를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 진실입니다.

    살아계신 그 분이 오늘도 계시기에 그 이름만 불러도 귀신이 쫓겨 나가고, 그 이름만 불러도 병든 자가 나음을 입고, 그 이름만 불러도 영적으로 죽었던 자가 구원받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  우리 모두 함께 외칩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오늘 서신 말씀 고린도전서 15장에 따르면,   예수의 부활은 죽음의 운명이 분명하여 슬퍼하는 우리 인간들에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소망을 주고,  우리의 구원과 믿음의 보장이 되며,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부활한다는 확실한 축복을 주시는 것이 됩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예수의 부활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참되시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기 전에, 당신이 수난당하여 죽고 성경말씀대로 다시 살아나리라는 예언을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주님의 말씀,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신실한 약속인 것입니다.    시 119 : 74, "당신 말씀에 희망을 둔 이 몸을 보고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은 기뻐하리이다."  시 119 : 81, "이 몸이 당신 말씀에 희망을 걸고 당신의 구원을 향하여 끝까지 가오리이다."  우리의 희망은 하느님의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부활의 주님이 분에 보이지 않는다고 믿음이 흔들리고 두려움과 근심과 공포와 염려 속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참이기에 성셩에 기록된 주님이 말씀을 우리는 굳게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부활을 증거하는 고린토전서 15장 끝에서 이렇게 당부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날마다 감사해라.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주님의 말씀을 절대 신뢰하고 흔들리지 말라.   예수의 부활을 생각하고 주님께 더욱 헌신라.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이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부활의 기쁨, 부활의 소망, 부활의 능력을 날마다 샘솟듯이 회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조용히 묵상하며 부활신앙으로 우리의 믿음을 세우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입시다.  요한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4: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요한 16:33,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13:34-35,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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