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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톰 라이트의 천국과 지옥관 2 - 퍼온 글 : 아래 118번의 글에 이어서
  • 3. 톰 라이트의 천국관

    자, 그렇다면 그의 천국관은 어떠한가? 톰 라이트의 천국관은 지옥관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그의 천국관을 얘기하기 전에 먼저 개념 정리부터 좀 하자. '천국(天國)'은 '하늘나라'다. 영어로 하늘나라는 'the kingdom of heaven'이다. 그리고 하늘나라는 하나님나라(the kingdom of God)와 동의어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에서 '하늘'은 '하나님'의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이나 호칭을 직접 부르는 것을 극히 꺼렸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지칭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대칭(對稱)을 만들어 냈다. 예컨대, 주인이라는 뜻의 '아도나이(the Lord)'라든지, 정관사를 붙여 만든 '그 이름(the name)'이나, 하나님의 거처로 여겨졌던 '하늘(heaven)' 등이 바로 그러한 대칭들이다. 하늘나라(天國)에서 '하늘'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하나님나라와 동의어다.

    천국 = 하늘나라 = 하나님나라

    그런데 '하늘나라'는 '하늘'이 아니다. 오랫동안 하늘나라는 하늘과 동의어로 사용돼 왔다. 하지만 하늘나라와 하늘은 다르다. 사실 하늘과 하늘나라를 억지로 구분하는 것은 다소 도식적이며, 오해의 소지도 많이 생긴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임하는 영역을 하나님나라라고 한다면, 하늘도 하나님나라고, 천국이다. 하지만 복음서가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그 하나님나라는 하늘이 아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랫동안 사람들은 하늘나라와 하늘을 동의어라고 믿어 왔는데, 그래서 하늘나라는 마치 공중에 붕 떠 있는 '구름 위의 나라'인 양 상상해 왔다. 그리고 하늘나라 대신 '천성(天城)', 혹은 '천당(天堂)'이라고 불러왔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저변에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땅을 떠나서 어디론가 이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렸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찬송가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든지 "하늘 가는 밝은 길이"라든지 "나 이제 천성에 올라가", "우리도 그분이 가 계신 곳에 가기를!"이라고 노래해 왔는지 모른다(<마침내…>, 295쪽). 하지만 성서가 가르치는 하늘나라는 하늘도 아니고, 천성이나 천당도 아니다.

    천국 = 하늘나라 = 하나님나라 ≠ 하늘, 천성, 천당

    톰 라이트는 땅, 하늘, 하늘나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고 있다.

    1) 땅(earth), 하늘(heaven), 하늘나라(the kingdom of God)

    가. 땅




    하늘나라를 '하늘'이나 '천성', '천당' 등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냥 '시적 표현'이라고 너그럽게 보아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이미지 때문에 성서의 천국관은 크게 왜곡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관건은 천국이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사는 이 세상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인데, 만일 천국이 하늘 위에 있는 나라라면 천국은 '이 세상 밖'에 있는 어떤 곳이 된다. 그리고 땅은 천국과 무관해진다.

    사실 이러한 관점은 '땅'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천국이 만일 하늘 위의 나라라면 땅은 쓸모없어진다. <천로역정>과 같은 문학 작품이 가정하듯이 천국이 하늘에 있다면 이 땅은 불타 없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서의 세계관과 완전히 배척된다. 왜냐하면, 성서는 이 땅이 불로 태워서 없애 버릴 정도로 추하거나, 악하다고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땅이 불타 없어질 것이라는 관점은 물질세계를 악으로 규정한 플라톤-영지주의적 세계관의 복제품이거나, 이 세상을 환영(illusion)으로 규정한 힌두-불교적 세계관의 반영물이다. 아니면 이 세계를 선과 악의 혼합물로 보았던 바벨론-페르시아적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이 땅을 그렇게 보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히 철학적 관념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 이 땅에서의 삶의 자세 및 방식의 문제다. 만일 천국이 저 하늘에 있다면, 이 땅은 시한폭탄이 째깍거리고 있어서 당장 탈출해야 할 낡은 건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하늘만 바라보며 죽을 날을 하루하루 준비하는 삶이 될 것이다. 이런 신앙관을 가진 신앙인은 이 땅의 구조적 악과 정치적 불의에 문제를 가질 이유가 없다. 심지어 지구가 파괴되어 가고, 생태계가 교란되어 가는데도 무관심할 뿐이다(<마침내…>, 68쪽). 심지어는 열광적인 신앙인은 주님의 재림 때를 앞당기기 위해서 아예 지구를 파괴하는 일에 앞장설 수도 있다.

    성서 세계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이 땅이 완전히 선하다는 것이다. 최소한 처음 창조 시에는 그랬다. 땅은 본성상 선하고 아름답다. 처음 피조된 세계에서 악은 존재하지 않았다. 악은 피조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러한 성서의 세계관 안에서 물질세계를 근본적으로 부정적으로 보거나 평가절하하는 관점을 전혀 찾을 수가 없다.

    성서가 알려 주는 것은 완전히 선하고 아름답던 물질세계가 영적, 도덕적으로 책임 있는 행위자의 그릇된 판단에 의해서 왜곡되고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현재 이 땅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왜곡과 끔찍한 악, 불의, 폭력 등은 이 땅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가 완성된 뒤 어느 시점엔가 일어났던 도덕적 선택의 결과다. 이것은 마치 멋진 롤스로이스 자가용을 몰고 가다가 운전을 잘못해서 벽에다 박아 버린 상황과 비슷하다. 본래는 제대로 만들어졌는데 누군가가 잘못해서 찌그러진 것이다.

    만일 이 땅이 영적, 도덕적 선택의 결과라고 본다면 역으로 그것은 어떤 적절한 조치에 의해서 회복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즉 악은 제거될 수 있는 것이 된다. 또 만일 악이 침투해 들어온 어떤 시점이 있다면, 역으로 그 악이 제거되는 시점도 존재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이 땅의 악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제거되고 땅이 회복될 수 있다면, 그래서 그 본래의 선하고 아름다운 속성이 회복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이 땅을 폐기해야 하겠는가. 하나님의 창조는 취소될 수 없다. 이러한 세계관은 악을 이 땅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여타의 세계관과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이들 세계관에 따르면 땅을 없애 버리지 않는 한 이 땅의 악은 영원히 제거될 수 없다. 하지만 성서는 악을 제거함으로 말미암은 땅의 회복과 구속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복음이다.

    땅은 지금 왜곡되어 있다. 그래서 피조물들은 신음하며 고통 받고 있다. 또한,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롬 8:18~24). 이 왜곡은 이 땅의 본질적 특징이 아니라 영적, 도덕적 선택의 결과물이다. 그 때문에 이 왜곡은 치유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악을 제거하시고, 땅을 구속하실 때, 땅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창조될 것이다. 그때 땅은 신음과 고통에서 해방될 것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이 땅의 피조물들이 바로 그 치유와 회복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마침내…>, 6장). 새로운 창조의 때를 말이다.

    나. 하늘

    그럼 하늘은 무엇인가? 여기서 문제가 되는 하늘은 스카이(sky)가 아니라 헤븐(heaven)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자. 러시아의 우주 비행사 가가린이 우주여행을 마치고 무사히 지구로 귀환한 뒤 "우주에 나가 보니 그 어떤 곳에도 신은 보이지 않았다"고 했던 말은 헤븐과 스카이를 혼돈해서 했던 개그(gag)였다. 그런데 성서 독자들도 이런 식으로 성서를 잘못 읽곤 한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셨다고 기록했을 때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께서 부활의 몸을 입고 땅에서 헤븐의 영역으로 들어가셨다는 뜻이지, 스카이로 솟아올랐다는 뜻이 아니다.

    자, 그렇다면 스카이가 아닌 헤븐은 어딜 말하는 것인가? 우선 하늘(heaven)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다. 주기도는 이렇게 시작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렇다.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그리고 구약적으로 말하자면 이곳은 그룹과 스랍, 천사들이 하나님을 보위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하늘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체를 입고 다시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 곳이기도 하다(<마침내…>, 186쪽). 예수께서 부활의 몸을 입고 하늘에 계신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늘은 몸도 거할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하늘은 플라톤식의 순수한 이데아 계가 아니다. 하늘은 영계나, 천상계가 아니다.

    하늘은 우리가 사는 이 땅과 분리되어 존재한다.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전 5:2)." 전도서 기자 코헬렛의 이 말에는 하늘과 땅 사이에 심연의 간격이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어떤 신학자는 이 간격을 '무한한 질적 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러한 질적 차이는 하늘을 땅의 언어로 묘사할 수 없고, 하나님을 인간의 지성으로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 하늘과 땅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말은 두 세계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이 아니다. "하늘과 땅은 공간이나 물질의 동일 연속체 안에 있는 두 개의 다른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마침내…>, 186쪽). 이것은 하늘과 땅은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세계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땅의 일에 무관심한 방관자신가? 만일 하늘과 땅이 그토록 다른 차원의 세계라면 하늘의 존재는 이 땅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 아닌가?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이신론자(deist)의 하나님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톰 라이트는 땅과 하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서로 교차하고 있으며, 접촉하고 있다고 했다. 하늘과 땅 사이는 심연의 간격이 있지만, 이것은 지리적인 거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하늘과 땅은 수시로 만나고, 겹치며, 동시에 존재하기도 한다. "하늘은 땅과 접하고 있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존재는 동시에 땅 그 어느 곳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마침내…>, 186쪽).

    톰 라이트는 또 하늘을 '땅의 통제실'이라고 했다(<마침내…>, 186쪽). 그렇다. 하늘은 일종의 사령관실이다. 그래서 성서에서 하늘은 자주 '보좌'가 놓여 있는 곳으로 묘사된다. 하나님은 이 하늘 보좌에 앉아 계셔서 하늘뿐만 아니라 땅의 일까지 세심하게 살피시고, 뜻하시는 대로 이끄신다. 하늘은 하나님의 공간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집무실이다. 그 하늘에서 보좌를 정하시고 이 땅을 다스리시는 분이 계시니 그분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통치권을 위임받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는 이 땅의 진정한 통치자시다.

    하늘은 또한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진 곳이다. 그래서 하늘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모든 것이 존재하는 영역'이다(랍벨, <사랑이 이긴다>, 79쪽).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봤을 때 하늘도 하나님나라의 일부다. 하지만 아직 땅과 분리되어 있기에 하늘은 우리가 소망하는 그 하나님나라는 아니다. 그런데 땅은 하나님의 통치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반역의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땅에는 반역자들과 불순종하는 자들이 득실거린다. 하여 주님의 뜻은 자주 벽에 부딪힌다. 그래서 주께서는 우리에게 날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마 6:10). 그리고 이 기도를 올려 드리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복종하고 순종해야 한다.

    다. 하늘과 땅의 결합

    톰 라이트가 하늘과 땅에 대해서 했던 말을 다시 정리해 보자. 하늘과 땅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 세계이다. 현재 하늘과 땅은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하늘과 땅 사이에는 심연의 간격이 존재한다. 이 간격은 지리적, 공간적 거리가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이것인 일종의 차원들(dimension)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과 땅은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해 있다. 하지만 하늘과 땅은 수시로 만나며, 교차한다.

    하늘과 땅이 교차할 때 하늘과 땅은 만나며, 동시에 한 곳에 존재한다. 이를테면, 야곱의 사다리나, 예루살렘 성전, 그리스도의 성육신 같은 것이다. 켈트 전통에 따르면 하늘과 땅이 심히 가까워서 얇고 투명한 막을 사이에 두고 근접한 듯한 장소(thin place)가 있다고 한다. 이 장소에서는 땅과 하늘이 서로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단다(<마침내…>, 389쪽). 이러한 켈트 전통도 하늘과 땅의 만남을 가정하고 있다. 하늘과 땅의 만남, 바로 여기서 우리는 톰 라이트가 말하는 천국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늘나라, 곧 천국은 하늘과 땅이 만나 서로 결합한 상태, 혹은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한다. 이것을 그는 하늘과 땅의 결혼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마침내…>, 176쪽).

    만일 하늘나라가 하늘과 땅의 결합이라고 한다면 대단히 중요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난다. 하늘나라, 곧 천국은 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다. 물론 지금의 모습 그대로의 땅은 아니다. 하늘과 결합한 땅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일 천국이 이 땅에 임한다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굳이 은하 철도를 타거나, 구원 방주에 올라탈 필요가 없다. 즉 이 땅을 떠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저 천성으로 이동해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으로 내려오는(공간적으로가 아니라) 천국을 기쁨으로 맞이해야 한다.

    그날이 오면 땅과 분리된 하늘이 땅으로 점점 다가와 마침내 땅과 결합하게 될 것이다. 땅으로 내려오는 하늘에 대해서 요한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묘사했다(계 21:2, 10). 하늘과 땅은 만나서 결합하고, 하나가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 땅에 존재하던 악은 제거될 것이며, 불의는 심판을 받고, 폭력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죽음은 무저갱 속으로 던져지게 될 것이다.

    2) 톰 라이트가 생각하는 천국

    하늘과 땅의 결합은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복음의 핵심이고, 주기도의 요지다. "(하늘)나라가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때문에 톰 라이트는 반복해서 강조한다. "우리가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이 땅으로 내려온다(<마침내…>, 177쪽). 천국은 "하늘에 있는 모든 것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총합을 이루는 것"이다(<마침내…>, 177쪽). 그리고 하늘과 결합한 땅은 완전히 새로운 땅으로 새롭게 창조된다. '새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새 창조가 이루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먼저는 주기도의 내용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늘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가 하늘에서와같이 새로워진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이 점에서 톰 라이트는 19세기부터 발전한 '하나님나라의 신학'의 중요한 주장을 그대로 뒤따른다. 천국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일컫는 말'이다(<마침내…>, 51쪽).

    천국을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로 보는 것은 톰 라이트의 구원론의 중요한 핵심이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 여기에서 통치는 대한민국 국민이 대한민국 헌법의 통치를 받는 것과 같은 의미의 통치다. 대한민국 국민은 대한민국 헌법의 통치를 받는 사람을 말하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다. 그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그리스도께 위임되어 있으니 최고 통수권자를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는 국민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다. 아마도 톰 라이트의 이러한 천국관은 <예수의 정치학>의 존 요더나 <대통령 예수>의 쉐인 클레어본과도 통하는 부분이 많은 듯하다. 즉 천국이란 그리스도께서 이 땅의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영역을 통치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 통치의 특징은 무엇인가? 여기서 톰 라이트가 천착하는 '악'의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지금 이 땅은 악에 물들어 있다. 물론 이 악은 창조 세계의 본래 특징은 아니다. 그것은 창조가 완성된 이후 어느 순간에 창조 세계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불순물이다. 하지만 이 악은 너무도 강력해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완전히 일그러뜨려 놓았다. 구약성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악과 싸우시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2장).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이 세상의 악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이루셨다(<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3장).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악은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날'이 오면 하늘과 땅이 만나고, 하늘에 계시던 그리스도는 이 땅의 악을 완전히 심판하여, 제거해 내실 것이다. 그리고 땅을 구속해 내실 것이다.(<마침내…>, 164~5쪽).

    악에 대한 심판과 제거는 땅 구속의 중요한 국면이다. 악이란 결국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며,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땅이 구속될 때 이 땅의 모든 정사와 권세는 반역을 멈추고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될 것이다. 이 땅 어느 곳에도 하나님에 대한 반항과 반역은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 아울러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 모든 것을 하나님 자신으로 충만히 채우실 것이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8).

    땅에서 악이 제거된다는 것은 매우 실제적인 의미로 정의로운 사회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의라는 이 단어는 "창세기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뜻하는 약어"다(<마침내…>, 325쪽). 천국은 정의로운 세상이다. 이것은 구원 열차를 타고 구름 위의 나라에 들어가 천사들과 함께 하프를 켜고 노는 천국이 아니라 대단히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의미의 천국을 상상하게 한다. 윌리엄 윌버포스가 노예제 폐지를 시도했을 때, 마틴 루터킹 목사가 인종 차별이 없는 사회를 꿈꾸었을 때, 데스몬드 투투 주교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거부했을 때 정의로운 사회의 모습으로 천국이 아주 살짝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기독교 여행>, 1장).

    포스트 아우슈비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새로운 형태로 떠오르는 악을 보고 있다. 아프리카의 인종 청소, 9.11테러와 종교적 근본주의, 세계화와 천문학적 규모의 국가 부채 등이다. 지하드(Jihad)와 맥 월드(McWorld)가 경쟁하는 양상이다(<기독교여행>, 23쪽). 최근 우리나라에서 논의되고 있는 한미 FTA도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악의 문제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천국에 대해서 상상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원한다면 이러한 가공할 만한 현대적 악의 문제를 무시하고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소망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통치하실 나라에서는 그 어떠한 악도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천국에 대한 또 한 가지 이미지를 제공한다. 하늘과 결합한 땅은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세상일 것이다. 아름다움은 천국의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다. 물론 전통적인 천국관이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도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천국이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는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가. 그렇다. 천국은 분명히 아름다울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아름다운 모습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회복될 땅의 아름다움은 지금 이 땅의 아름다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 이 땅의 아름다움과 회복될 땅의 아름다움이라는 두 종류의 아름다움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지금 이 땅의 아름다움은 맛보기며, 그림자에 불과하다. 회복될 땅의 아름다움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연의 모습 그대로의 아름다움이다. 만일 우리가 새 창조의 신학을 가지고 지금 이 땅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본다면, 우리는 이중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지금 이 땅의 아름다움과 장차 이루어질 약속된 아름다움을 말이다.

    톰 라이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세 가지 유비를 들었다. 성배, 바이올린, 약혼반지가 그것이다. 성찬의 포도주를 담고 있는 성배를 생각해 보자. 성배도 아름답지만, 그 속의 성찬 포도주는 성배를 더욱 아름답게 한다.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도 아름답지만, 그것이 연주될 때 더욱 아름답다. 약혼반지도 아름답지만, 그 속에 담긴 약속 때문에 반지는 더욱 아름답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땅의 모습도 아름답지만, 이 땅이 온전히 회복되리라는 새 창조가 약속되어 있기에 아름다움은 더욱 커진다(<마침내…>, 338쪽).

    사실 이러한 톰 라이트의 천국관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부활관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부활은 몸의 변화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지금의 몸이 새로운 몸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톰 라이트는 현재의 몸과 새로 입을 몸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현재의 몸과 부활체 사이의 관계는 지금 이 땅과 회복될 땅의 관계와도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는 이 땅의 모습과 새 창조를 입은 땅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부활은 하나님나라의 씨앗이요, 천국의 시작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를 원한다.

    이상의 톰 라이트의 천국관은 놀라울 정도로 실천적인 함의를 가진다. 전통적인 천국관에 기초한 신앙생활이란 죽어서 천국 갈 날만 기다리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톰 라이트의 천국관에 기초해서 신앙생활을 할 때 신앙인은 필연적으로 천국이 이 땅에 임하도록 실천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우선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실천하게 된다. 아울러서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사함으로 누리며 회복될 땅의 아름다움을 상상하고,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천국에 대한 소망을 주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 즉 천국을 소망한다는 뜻은 최소한 그리스도인이 정의, 예술, 복음 전도, 이 세 가지 영역에서 실제로 실천하며 산다는 것을 뜻한다(<마침내…>, 13장).

    3) 낙원은 어디인가

    이제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이 남아 있다. 크리스천이 죽으면 그의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위 중간 상태에 관한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개신교회는 이에 대해서 통상 두 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영혼 수면설이다. 사람이 죽으면 몸과 함께 영혼도 잠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 수면 상태에 있게 된다. 그러다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잠에서 깨어나 선악 간에 최후의 심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영혼 수면설을 주장하는 이유는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상태를 가정하는 것이 지나치게 헬라적 영혼-육체 이원론의 성격이 짙다고 믿기 때문이다. 영혼 수면설 자들은 히브리적 영혼-육체의 일원론을 고수하기를 원한다. 실제로 신약성서는 죽음을 자주 잠에 비유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신자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의식이 없이 잠만 잔다고 하는 주장은 신약성서의 다른 여러 부분과 충돌한다.

    한편, 또 다른 입장은 인간이 죽으면 육체는 땅에 묻히고 영혼은 육체를 빠져나와 어디론가 간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많은 그리스도인은 죽으면 영혼은 육체를 빠져나와서 천국이나 지옥, 둘 중 한 곳으로 가게 된다고 믿어 왔다. 즉 천국과 지옥은 죽음 이후 얼마 안 있어서 판결이 난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죽자마자 심판을 받게 되는 셈이다. 이러한 주장은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회개한 강도를 향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라고 말씀하신 것을 통해서도 지지를 받는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입장은 천국을 지구 밖에 있는 영혼들의 집합소로 상정하기 때문에 이 땅의 폐기를 주장하게 된다. 또한, 육체 없이 영혼만으로 천국에 이미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도 무의미해지게 된다. 또 죽자마자 천국과 지옥으로 갈리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도 약화한다.

    톰 라이트는 영혼 수면설을 지지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잠시 어디론가 가 있는 곳이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예컨대, 그는 바울이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말했을 때, 이는 죽음 이후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는 지복의 상태를 말한다고 본다(<마침내…>, 90쪽). 그는 이러한 지복의 상태가 아마도 회개한 강도에게 약속하신 '낙원'일 것이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톰 라이트는 전통적인 내세관과 상당히 유사한 내세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전통적인 내세관과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는 인간이 죽으면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어디론가 가게 되고, 크리스천이라면 '지극히 행복한 동산' 곧 '낙원'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낙원은 결코 우리의 종착역이 아니다. 낙원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 잠깐 거쳐 가는 임시 처소(monē)일 뿐이다(<마침내…>, 90쪽). 영혼과 육체의 분리는 온전한 상태가 아니다. 온전한 상태는 영혼과 육체가 하나로 결합한 상태다. 즉 낙원에서의 영혼은 플라톤이 말하듯 해방된 상태가 아니라 온전하지 못한 상태다. 그 때문에 낙원에서의 영혼은 부활의 때를 기다리며, 사모한다. 그날이 오면 영혼은 육체와 결합하여 새로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며, 하늘은 땅과 결합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것이다.

    맺는 글

    이상에서 우리는 간단하게 톰 라이트의 천국관과 지옥관을 살펴봤다. 필자는 왜 하필 그의 천국관과 지옥관에 주목하는 것인가? 만일 톰 라이트의 말이 맞다면, 그래서 교회가 그의 견해를 따라 성서를 읽고, 가르치기 시작한다면, 기독교는 반드시 거대한 변화를 맞게 되리라는 것이 필자의 예상이다. 교회는 더는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전할 수 없을 것이다. 그와 함께 사후 천국행과 지옥행에 기초해서 가르쳐 왔던 기독교 신앙의 내용은 대폭 수정이 불가피하다. 교회는 이제 신자들에게 더는 죽어서 천국 가야 한다고 가르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대신에 이 땅에 임할 하나님나라를 맞이하라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만일 교회가 톰 라이트의 천국관과 지옥관을 받아들인다면 교회는 복음 전도 및 선교의 방식, 설교, 기독교 교육, 기독교 윤리, 사회참여 등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대대적인 변화를 만들어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주목할 것은 이것이 복음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해서 도미노처럼 차례로 번져 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전통적인 복음주의의 도식, 즉 복음 전도와 사회참여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로잔언약은 교회가 복음 전도와 사회참여라는 두 가지 책무를 모두 붙들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선언이기는 하지만 톰 라이트의 관점에 따르면 복음 전도와 사회참여는 근본적으로 둘이 아니라 하나다.

    이것은 현대 교회에 새로운 복음 전도를 요청하게 된다. 교회가 만일 "형제자매님, 오늘 죽어도 천국 갈 수 있는 확신이 있으세요?"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갑시다. 예수님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는 식으로 전도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전도할 수 있을까? (톰 라이트는 이 문제에 대해서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 <기독교 여행>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현대 교회에 안겨진 실로 막중한 과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필자가 톰 라이트에게, 그리고 특히 그의 천국관과 지옥관에 주목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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