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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제강연, 작은공동체가 진짜 공동체다
  • 단지 숫자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공동체의 의미


    -- 김근주 교수(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 교수)의 주제강연 ‘작은 교회가 희망이다’이 이어진다. 강의 요약이다.


    작은 교회라는 주제를 창조 이야기를 통해서 보고자 한다. 하나님은 쉼이 필요 없으신 분이지만 피조물들의 쉼을 위해 스스로 쉬는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닮는 삶이야말로 구약의 기본 질서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관계를 만드시는 분이시다. 천상회의를 통해서 사람을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는데 복수로 나타나는 하나님이 복수의 인간과 연관된다. 회의, 복수의 사람 등은 하나님이 관계를 만드신 분이라는 주제이다. ‘좋다’라 반복되지만 ‘좋지 않다’는 말이 한 번 나오는데 그것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에 대하여 사용된다. 사람은 처음부터 관계 안에서 존재하도록 지음 받았다. 중요한 것은 함께 살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 창조의 본질이자 사명이다.

    아브라함 하면 자손과 땅의 축복을 생각하게 되지만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은 하나님의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삶이다(창 18:19). 땅과 자손의 약속은 공의와 정의를 성취하기 위한 공간과 주체를 밝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에 대한 축복의 약속이 확인된다.

    이삭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척박한 곳으로 계속 이동하는 운명이다. 우물을 파서 정착을 하면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빼앗는다. 이삭은 정착인이 아니라 개척자이다. 하나님은 개척자로서의 이삭을 부르신 것이다. 여기서 개척자, 개척공동체의 운명을 발견하게 된다. 예레미야에서 레갑 자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조상의 유언에 따라 정착하지 않고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가벼운 삶을 살았다. 이는 몸집이 커져서 이동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는 다윗의 후손 여호야김 왕과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기동성 있는 응답에 대한 예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게서도 볼 수 있다. 비옥한 땅을 선택하고 정착한 롯은 국제적인 전쟁에 휘말려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반면 아브라함은 자신의 전쟁도 아니었지만 전쟁에 뛰어든다. 히브리 사람(잠시 머물러 사는 외국인을 의미) 아브라함은 방관자로 남을 수도 있었으나 모든 것을 걸고 전쟁에 뛰어든 것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아직 아브람이다. 아브라함이 되는 약속은 이웃의 어려움을 보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 들어 도움을 주고 구하는 사건에 기인한다. 이때 아브람은 선택 받은 백성 아브라함이 된다. 롯을 구하러 뛰어든 아브라함은 롯만이 아니라 부녀와 친척, 즉 백성과 사람들을 다 구했다. 아브라함의 나섬은 하나님의 은혜가 열방에까지 미치게 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형제 나홀과도 대조된다. 나홀은 정착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성을 만들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평생을 땅 없이 떠돈다. 하나님이 불러내신 목적은 이 땅에서 성을 쌓고 이룩하는 것이 아니라 땅 없이 이리저리 쫓겨 다니지만 가는 곳마다 우물이 나게 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걸고 이웃을 구해내는 것을 통해 복을 받게 하시고자 함이다.

    요한복음 1:14의 성육신에 관한 보도는 구약의 아브라함 이야기의 유비이다. 유비적인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그 자신을 보여주신 것처럼 신앙공동체 역시 스스로를 통해 하나님을 세상에 증거 해야 한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 수 없지만 아브라함과 그 후손,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나게 된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포로들을 가리켜 ‘나의 증인’이라고 부르신다. 증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드러내는 존재이다. 여기서 다윗 언약은 신앙공동체 전체를 향한 약속으로 확대된다.


    작은 교회가 희망이다. 에언자들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제자공동체이다. 이들은 가족들도 데리고 들어와 함께 하였으며 극심한 가난에 시달린 것으로 보인다. 아무 풀이나 뜯어다 국을 끓여 먹다가 병에 걸릴 지경이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라도 하나님의 명령이 있을 때 어디라도 달려가 주어진 명령을 수행하였다. 엘리야는 불법을 자행하는 아합 왕에게 경고하였고 예후로 하여금 피의 혁명을 수행하게 하였다. 매우 심각한 가난에 처하였지만 그들의 담대한 활동과 사역에 의해 역사가 바뀌었다. 가장 주변부에 있었지만 가장 중심부를 뒤흔든 이들이 바로 이들 공동체였다.

    엘리야는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가 절망에 빠진 것은 ‘오직 나만 남았다’라는 이유였다. 이런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사명을 주시면서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에 대해 언급하신다. 즉 너 혼자 남은 것이 아니라 칠천 명이나 너와 함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고 이 말씀을 듣고 엘리야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현장으로 나선다. 7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남겨두신 하나님의 공동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한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으로 힘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명을 받은 자로서 살아가는 길이 홀로 가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는 것, 그것이 공동체의 의미이다.

    작은 하나님의 공동체야말로 세상 가운데 보내진 하나님의 증인들이다. 이들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된다. 아담과 하와 두 명, 열두 제자 공동체, 120 문도, 기드온의 300 용사, 아브라함의 318명, 엘리야의 칠천 명... 단지 숫자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공동체의 의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언제라도 일어설 수 없을 만큼 가진 것이 많다면 그것은 참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가 아니다. 그 숫자가 몇 명이든 새로운 상황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작은 교회, 작은 공동체가 바로 진짜 신앙공동체이다. 이런 교회 공동체야말로 하나님을 본받는 존재이며, 이 땅에서 하나님을 보여주고 증거하는 존재이다. 어디든 전대도 없이 두 벌의 옷도 없이 두 켤레의 신발도 없이 출발하는 것, 그것이 작은 교회이다. 그리고 그럴 때 작은 교회가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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