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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목회세미나 특강 2 김경호 목사 '예수 살기와 작은 교회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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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목회세미나 특강 2 김경호 목사 '예수 살기와 작은 교회 목회'  
    ‘사건의 신학과 새로운 토대의 교회’ 주제로 작은 교회 세우기  



    예전에 열린 예수목회세미나에서 이미 제 목회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사건의 신학과 새로운 토대의 교회’라는 주제로 이야기을 하려고 합니다. 먼저 안병무의 ‘사건의 신학’에 관한 소개를 하겠습니다. 후반부에는 그의 신학적인 토대를 가지고 어떤 새로운 교회를 세울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상상력에 기초하여 구성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교회론의 전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토대 위에 세워졌습니다. 세례식, 직분식 등 모든 서약식을 할 때에는 반드시 이 고백을 해야 합니다. 모든 예식과 예배의 기본인 것입니다.

    안병무 선생님은 ‘예수는 사건’이라는 화두를 던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모든 것을 인격으로 파악하려고 하다 보니, 예수가 누구냐는 것만 묻는다. 그러나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님도 사건이고 예수도 사건이다. 2천 년 전에 팔레스틴 갈리리에 살았던 예수 개인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사건이 중요하다. 예수를 사건으로 보는 것이 중요한 전환점이다.”

    교회사를 보면 참 재밌는 일들이 많습니다. 별거 아닌 것을 가지고 굉장히 심각한 싸움들을 했습니다. 초기 교회 회의는 그냥 말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 쪽 편이 이기면 다른 편은 숙청당하고 쫓겨났습니다. 피의 잔치가 반복되는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아리우스파도 희생양이었습니다.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한 아리우스파가 논쟁에서 지고 쫓겨나 변방으로 갔습니다.

    로만 가톨릭 세력에서 벗어난 변방 민족들이 아리우스파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후 변방 민족들과 로마는 예수의 존재에 관한 신학적 해석이 다르다는 이유로 전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신학적인 논쟁이 전쟁의 중심 원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야만족들이 받고 있던 설움이 불거져서 전쟁이 발발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451년의 칼케돈신조에서 애매하게 예수의 존재가 정리가 됐습니다. 그 다음은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쟁이 붙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논쟁하고 서로 죽이는 싸움이 벌어지다 결국 봉합됩니다. 오랫동안 예수의 인격을 무엇으로 볼 지를 규정하느라 계속 싸움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물음에 목숨을 걸어왔습니다. 안병무는 예수를 인격으로 봐선 안 된다고 말합니다. 신을 인격화 하고 어떤 상을 만들면, 그 순간부터 신은 자유스럽지 못해집니다. 신을 감옥에 가두는 것입니다. 구원과 변화는 사건의 일입니다.

    들뢰즈는 서양의 주류 철학이 사건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사물이나 실체, 성질 같은 것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왔다고 비판합니다. 전통 철학에서 사건이란 아주 덧없는 것, 가치 없는 것, 따라서 무의미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줄기차게 변하지 않는 존재자의 실체에 대한 물음만 던졌습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존재는 변화의 생성이며, 생명은 변화하는 사건의 지속과 우연한 창발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포스트모던 철학이 나오면서 불변에 대한 사유를 진리로 삼았던 행위들이 뒤집어집니다. 오히려 우리 앞에 새롭게 나타나는 현재성이 굉장히 중요하게 부각됩니다.

    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신학은 불변의 고정변수를 신학의 주체로 삼았습니다. 그런 것들을 제거하고, 우리가 지금 여기서 맞이하고 있는 유일한 새로운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후설은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을 부정합니다. 과거는 지나간 것에 대한 현재의 기억이고, 현재에 것에 관한 현재는 직관이며, 미래의 것에 관한 현재는 기대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전부 현재라는 순간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관념의 틀 속에 있는 것을 접는다면, 낯선 얼굴로 다가오는 현재적 사건들만이 유일한 우리의 철학의 대상이 됩니다. 사상 체계를 다 내려놓고 새로운 일들을 어떻게 직시하고 사유화하고 맞아들이느냐는 것이 철학과 신학의 대상이어야 한다는 포스트모던적인 사고는 중요합니다.

    지금 여기에 이뤄지는 사건만이 중요한 존재입니다. 사건은 초월에 있거나 변화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건은 전체를 규정하려고 하지 않으며, 규정되기 이전에 이미 발생한 존재입니다. 사건을 예수 이해에 중심으로 놓고, 이를 신학의 주제로 삼는다는 것은 새로운 신학을 여는 일입니다. 안병무의 예수보기가 인격에서 사건으로 바뀌면서, 예수 사건과 민중 사건의 경계가 무너지고, 신학과 사회학의 경계가 무너지고, 교회와 현장의 경계가 무너지게 됐습니다.

    이제 이 내용을 바탕으로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안병무는 교회의 출발점을 오순절 사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했던 민중을 교회의 시작으로 봅니다. 마가복음은 교권화 된 종교를 강하게 비판합니다. 교회를 조직된 실체로 보기 이전에 예수가 민중을 만난 만남을 중요하게 부각시킵니다. 교회를 제도와 조직으로 보지 않고, 사건과 현장으로 본 것입니다. 교회의 원형을 찾으려고 했던 노력입니다.

    교회는 어떤 곳이 돼야 합니까. 교회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예수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를 사건으로 보고 실천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오늘의 예수 사건이 일어나는 주체가 돼야 합니다. 오늘날 예수 살기의 주체가 돼야 합니다. 거대한 과제처럼 보이지만, 신앙인이 마땅히 가야 할 길입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예수 살기가 구현돼야 할 때만이 좋은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2000년 전의 소식을 전하는 것을 'Good News'라고 하면 안 됩니다. 새로운 소식이 돼야 합니다.

    선교는 무엇입니까. 선교는 십자가, 자기 초월, 자기 생성의 사건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중간시대를 살아가는 전략으로 선택된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교회는 중간 단계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 될 때 까지 과정입니다. 따라서 교회 자체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교회는 스스로를 위해 있지 않고, 세계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을 힘의 근원으로 삼으면 교회는 가치를 상실하고 맙니다. 교회가 스스로를 위해 봉사하면 예수와 관계가 없어집니다. 고난과 십자가는 역사 방법론이며, 선교론이기도 합니다. 운동의 방법은 십자가를 지는 운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운동은 십자가로 이어집니다.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자기 초월이 돼야 합니다. 교회가 자기 성장을 연구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자기 소멸을 향해 나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십자가를 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가장 의미 있는 자리에서 뜻 깊게 죽는 것을 고민해야 합니다. 민중의 자기 초월이 필요합니다.

    초월적 선교는 새로운 사건, 자기 결단과 은총이 만나는 사건입니다. 개인이나 교회는 쓰라린 고통을 겪지만 새로운 생성이 일어나게 됩니다. 새로운 해방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열심히 전도해도 이제는 안 됩니다. 가진 것을 어떻게 멋있게 쓰고 순교할까 고민하면, 교회에 더 많은 사람들이 올 것입니다. 죽으려고 하지 않으니까 새 것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역설적인 선교론입니다. 분가선교도 이를 위한 한 가지 방법입니다.

    교회의 증언은 무엇입니까. 사건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사건이 되지 않으면 새로운 소식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는 신조는 복음서가 쓰인 당시에 예수를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뉴스가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도 모르고 역사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예수가 Good News가 될 수 있습니까? 예수는 자신의 인격을 물어보는 질문에 사건으로 답을 하곤 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실 때 사건으로 말했습니다. 예수는 자신을 인격으로 나타내지 않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누가복음 4장 18절)

    교회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주체가 돼야 합니다. 전태일 사건이나 용산참사 사건의 주체가 되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자기 초월의 폭이 커지기 전에는 힘든 일입니다. 개인에게 가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민중사건의 증언자가 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예수가 아니라면 제 발로 찾아가기 힘듭니다. 증언과 자신을 일치시키면,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에 그리스도가 임재 합니다.

    한때 주류 기독교 운동권들이 정치와 결합하면서 침묵했습니다. 대추리 사건이 일어났어도 침묵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살기라는 모임이 새롭게 구성됐습니다. 기독인의 양심으로 증언하며 예수 살기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촛불정국이 됐습니다. 현장 가운데서 예수 살기가 중심이 됐습니다.

    촛불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계속 현장에 참여하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 모임‘이 그것입니다. 목요기도회의 전통을 이어서, 우리가 함께 찾아가서 예배를 드리고 같이 투쟁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매번 거리집회를 합니다. 처음 시작 할 때 얼마나 될까 생각 했습니다. 하지만 삼년 동안 예배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너무 추운 겨울날에는 오히려 배 이상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아무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스스로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현장을 지키는 현장교회의 상징이 돼가고 있습니다. 양심적인 세력을 만나서 힘을 실어주는 역할이 사건의 예배와 신학을 일으키는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초의 성막 성전은 이동하는 현장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신학이 무엇입니까. 신학은 하나님의 사건을 통해서 어떤 것이 의미 있고 중요한지 묻고 답하는 작업입니다. 증언하고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이 신학의 역할입니다.

    고백은 무엇입니까. 오늘의 교회는 강제로 고백을 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사건 속에 자신을 밀어 넣는 것이 하나의 고백이 돼야 합니다. 자기의 삶의 자리를 선택하는 것이 고백의 자리를 대신해야 합니다.

    예배는 기념입니다. 사건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사건이 없는 교회가 돼 버렸습니다. 오늘날 일어나는 유의미한 사건을 확대 재생산해서 말하는 예배가 돼야 합니다. 사건에 하나가 되기 때문에 평등한 제자도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건을 토대로 새로운 교회를 구상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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