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대한성공회 제자교회대한성공회 제자교회

  • [2012년 11월 11일]마르코 12:38-44 헌금하는 것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
  • 청지기
    조회 수: 2265, 2012-11-13 13:45:48(2012-11-13)
  •   설교 전에 먼저 오늘과 주중에 있는 두 가지 행사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는 오늘 오후에 갖게 되는 성공회중보기도회 7주년 기념집회입니다. 대한성공회가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여 영혼을 구원하고 사회를 변혁해 가는 주님의 교회로 쓰임받기를 갈망하며 7주년 전에 시작된 모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두 달에 한번씩 꾸준히 모여 왔습니다. 그동안 찬양팀으로 중보자로 함께 섬겨오신 교우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두 번째는 목요일부터 갖게 되는 내적치유세미나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지만, 우리가 살아오면서 받는 상처와 성경적이지 않은 세계관 가치관으로 인해 우리의 인격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보다 온전한 인격으로 성숙하여 교회 공동체를 세우고 세상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성경적인 진리 안에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바로 잡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주말에 그 어떤 일보다 치유세미나에 참여함으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헌금하는 것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이 성전에서 헌금궤 맞은 편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궤에 돈을 넣는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부자들이 여럿이 와서 많은 돈을 넣었습니다.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겨우 렙톤 두 게를 넣었습니다. 동전 한 닢의 값어치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치면 1000원 정도.

      그것을 보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넣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자들은 다 넉넉한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넣은 것이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왜 유심히 바라보셨을까? 과부가 헌금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은 과부에 대한 칭찬일까?”
      이런 물음 가운데 묵상하며 3가지 정도의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은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헌금을 하는지를 보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십일조와 구제는 신앙적인 의무사항,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절기마다 드리는 제물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십일조와 구제가 강조되었습니다.

      십일조하면 기억나는 말씀이 있을 겁니다.
      말라기 3:10, 너희는 열의 하나를 바칠 때, 조금도 덜지 말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 넣어 내 집 양식으로 쓰게 하여라.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 창고의 문을 열고 갚아주는지 갚아주지 않는지 두고 보아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부자들과 과부가 헌금하는 것을 보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 넣었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을 보면, 부자들은 종교적인 의무감으로 헌금한 것 같습니다. 과부는 하느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의 마음으로 한 것으로 보신 것 같습니다.

       돈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쓰는 돈은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돈 얘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대표적인 말씀으로,
      마태 6:21,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마태 6:24,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하느님을 향한 마지막 회개는 지갑의 회개이다.”

      이런 점에서 헌금이란 하느님에 대한 마음이 어떠한지를 나타내는 것이 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의무감과 율법으로 헌금하면서 보이기도 하고 소리도 나니까 내가 이정도로 헌금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만족과 자기 의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과부는 보여지고 들려지는 가운데 헌금을 드리면서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과부의 헌금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것임을 보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헌금을 하시는지요?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대속물로 주신 하느님께 감사해서 그 사랑에 응답하는 사랑으로 헌금을 드리고 계신지요? 아니면 종교적인 의무감이나 체면치레 장도로는 헌금하시는지요?

      두 번째, 과부가 헌금하는 것을 보고 주님은 분노하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과부가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헌금한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과부를 위해서 하느님의 축복을 기원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본문과 앞뒤 문맥을 잘 읽어보면, 생활비를 다 바칠 정도로 헌금한 그녀의 아름다운 행위 뒤에는 그렇게 헌금하도록 과부를 끌어들인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헌금하는 장면이 담긴 본문 앞에 나오는 말씀이 이렇습니다.
      38-40, 예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이런 말씀도 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기다란 예복을 걸치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찾으며 잔칫집에 가면 제일 윗자리에 앉으려 한다. 또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오래 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헌금이야기 뒤에는 성전 파괴 예언이 나옵니다.
      마르코 13:2, 예수께서는 "지금은 저 웅장한 건물들이 보이겠지만 그러나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문맥이 이렇습니다. 과부의 가산을 등쳐먹는 율법학자, 그리고 생활비 전부를 성전에 바치는 과부, 그리고 그 헌물로 지어진 아름다운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겨지지 않고 무너지리라는 말씀.

      이렇게 볼 때 이 이야기는 과부의 가산을 등쳐먹는 종교 지도자들의 탐욕으로 희생된 과부의 헌물로 화려하게 꾸며진 부를 자랑하는 성전을 심판하는 내용이 됩니다.
      
      앞서 11장을 보면, 예루살렘이 올라오신 예수님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에 대하여 분노하셨습니다.
      
      마르코 11:17,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성서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구나!" 하고 나무라셨다.

      성전 안에서 성전 당국자들과 결탁하여 이루어지는 장사치들의 매매로부터 이익을 챙겨온 성전 당국자들에 대한 단죄였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서 성전이 멸망의 대상임을 보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마르코 11: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 예수께서는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사고 팔고 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며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그렇다면 오늘의 과부는 강도의 소굴에 헌신적으로 전 재산을 바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푼까지 바치게 하는 율법교사들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강도들은 더 부유해지고 그들의 소굴은 날로 화려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에게 모든 것을 바침으로 가뭄을 이겨내는 축복을 받은 시렙다 과부의 이야기를 기억하며 과부는 자기 생활비를 모두 헌금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수한 동기 뒤에는 아낌없이 바쳐서라도 하느님의 물질의 축복을 받아 내야 한다고 가르치는 종교 지도자들의 탐욕이 있고 순전하게 과부는 그 희생양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 넣었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과부의 행동에 대한 칭찬이라기보다는 종교적으로 착취당하는 과부에 대한 한탄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성전의 회복을 바라는 주님의 마음을 느꼈습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중심이었습니다. 죄사함을 받는 제사를 드리고 죄 사함의 은혜를 입어 다시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죄란 자기 탐욕으로 인해 말씀대로 살지 못함이요. 죄사함이란 이 탐욕에서 회개하고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 이스라엘에 하느님의 공의 - 미슈팟, 쩨다카가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듯 성전은 하느님 나라의 중심이었습니다.
      
      성경에서 과부는 고아와 함께 사회 경제적인 결핍의 상징이었습니다. 율법은 그들에 대한 사회경제적인 보호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고아와 과부를 괴롭게” 하면 하느님이 갚으신다고 했습니다.
      출애 22:21-22,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지 마라. 너희가 그들을 괴롭혀 그들이 나에게 울부짖어 호소하면, 나는 반드시 그 호소를 들어주리라.

      하느님은 고와와 과부의 하느님이셨습니다.
      신명 10:18, 고아와 과부의 인권을 세워주시고 떠도는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고아와 과부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우선적인 보호대상이었습니다.
      신명 14:29, 너희가 사는 성 안에 있는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복을 내리실 것이다. 레위인은 너희가 받은 유산을 함께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신명 26:12-13, 삼 년째 되는 해 곧 십일조를 바치는 해가 되면, 네 모든 소출에서 열의 하나를 떼내어 레위인과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주고 그것을 너희 성 안에서 실컷 먹게 하여라. / 그리고는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 아뢰어라. '주께서 분부하신 대로 거룩한 것을 집에서 모두 퍼내어 레위인과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주께서 분부하신 것을 잊지 않고 어김없이 다 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서 과부의 가산을 등쳐먹는,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사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구약의 이 모든 말씀들이 이루어진 곳이 바로 신약의 교회였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제는 더 이상 율법으로 체면으로 자기 의로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서 봉헌하신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것을 봉헌함으로 신약의 교회에서 비로서 하느님의 공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사도 4:34-35,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고 저마다 쓸 만큼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에서 과부들은 돌봄과 섬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도 6:1, 이 무렵 신도들의 수효가 점점 늘어나게 되자 그리스 말을 쓰는 유다인들이 본토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의 과부들이 그날 그날의 식량을 배급받을 때마다 푸대접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수님은 탐욕으로 무너져 버린 성전을 보시면서 복음에 반응하는 하느님의 사람들에 의해서 회복될 새로운 성전 – 주님의 교회를 꿈꾸고 계셨을 것입니다. 이 비전을 위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이 어떤 마음으로 헌금하는지가 아십니다. 더 이상 종교적인 의무나 체면으로 헌금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질적인 축복을 받기 위한 기복적인 동기로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서신이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자기 생명을 온전히 희생제물로 봉헌하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드리는 감사의 헌물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더 이상 십일조가 헌금의 기준이 아니라, 기복신앙이 헌금의 동기가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날 사랑하시어 나의 영혼을 구원하신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힘껏 드리는 봉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비전대로, 초대교회처럼 공동체 안에 궁핍한 자들이 돌봄과 보호를 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불의한 사회구조와 제도로 인해 보호받지 못한채 어렵게 살아가는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을 섬기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한 여러분이 드릴 또 다른 진정한 봉헌은 하느님의 공의가 이루어지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모든 일에 여러분의 시간과 물질을 사용하는 것임을 알고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댓글 1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379 청지기 2178 2012-12-24
378 청지기 2349 2012-12-11
377 청지기 2090 2012-12-06
376 청지기 3505 2012-11-28
청지기 2265 2012-11-13
374 청지기 2754 2012-11-06
373 청지기 2599 2012-10-21
372 청지기 2863 2012-10-15
371 청지기 2415 2012-10-10
370 청지기 1996 2012-10-02
태그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