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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년 4월 4일]부활절설교 나는 죽고 예수님이 사시게 하라!
  • 청지기
    조회 수: 2828, 2010-04-06 11:15:38(2010-04-06)
  •   할렐루야!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부활을 믿을 수 있냐고 하는데 우리는 부활이 너무 자연스럽게 믿어집니다. 우리는 이것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크고 놀라운 은혜임을 압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은혜가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육체적으로 부활하신 사건은 기독교의 주춧돌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1) 오늘 복음 말씀대로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실제 죽지 않았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쳤다, 권력자들이 시체를 훔쳤다.’ 등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계시지 않았다는 증거 중 가장 매혹적인 부분은 세마포에 대한 것입니다. 나비가 날아간 후 '나비 고치의 빈 번데기 집 같은' 세마포, 예수님은 세마포 수의를 단지 한 과정으로 통과하신 것만 같았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보았을 때 별로 놀라지도 않고 믿었습니다(요한 20:8).

      2) 오늘 서신 말씀대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6주에 걸쳐서 11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승천 이후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550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습니다(고전 15:6). 더구나 예수님은 만져질 수 있었고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도 하셨습니다.

      3) 사회에 미친 즉각적인 영향입니다. 성령강림절 이후 이 땅에 주님의 몸된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급속도로 성장해 갔습니다.

      4) 지난 2000년 넘는 시대를 통한 수많은 크리스챤들의 경험입니다. 고전 15:8을 보면 사도 바울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예수님이 이미 하늘로 승천하신 이후의 사건입니다.

      지난 2000년이 넘는 교회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가: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나: "어떻게 그걸 압니까?"
      가: "예, 저는 오늘 아침에 그 분과 10동안 얘기했기 때문이죠."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이고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사람도 부활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처럼 사람의 부활도 믿습니다.

      부활을 믿음으로 가장 큰 변화는 죽음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죽음은 끝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으면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은 부활하기 위한 한 과정입니다. 이 땅에서 눈을 감으면 저 천국에서 눈을 뜨고,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저 천국에 들어갈 것이란 믿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별세성찬례 성찬기도 특송 : “몸소 죽음을 겪으시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복된 부활의 희망이 비쳤으니, 죽음의 운명이 분명하여 슬퍼하는 우리에게 후세 영원한 삶의 약속은 큰 위로가 되나이다. 주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다만 새 생명으로 옮아갈 뿐이며, 이 세상의 나그네 집을 떠난 후에는 하늘의 영원한 거처로 옮아가게 하시나이다.”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하던 우리 영혼이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주님과 함께 이 땅에 와서 부활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대부분이 편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이런 부활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과거 일입니다. 우리의 부활은 미래 일입니다. 우리는 이 둘 사이에서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죄사함을 얻고 의인이 된 우리가 예수님의 그 은혜로 장차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부활에 감사하고 미래의 부활을 소망하며 살고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은 오늘 나의 삶에서 부활을 경험하게 합니다. 때로 우리는 마음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 같이 느낄 때가 있습니다. 절망의 수렁에 깊이 빠진 상태지요. 그러던 우리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소망 가운데서 다시 활기찬 생활을 합니다.

      우리 마음에서 부활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는 것을 통해 오늘 우리는 부활을 경험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은 우리 삶의 여러 부분을 통해 부활을 학습시키시고 계십니다.

      <1967년 6월 30일, 17살의 운동선수 조니 에릭슨은 체사피크 만에서 다이빙을 하다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로 인해 목 아래부터 전신이 마비된 그녀는 쓰라림, 좌절, 원망, 분노, 심지어 자살하고 싶은 충동까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하지만 재활 훈련과 치료 기간을 통해 그리고 부모와 친구들의 열렬한 후원 덕분에 점차 깊은 블랙홀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녀는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후원하는 모임도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변화의 중심에는 성경을 재발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처럼 ‘움직이지도 못하고 무력하며 마비된 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환상을 보면서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가장 큰 변화를 준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하늘에서 ‘영화롭게’ 된다고 말한다. 그때는 내가 여기에서 죽은 후 내 발로 춤을 출 때다. 손가락은 오그라들어 구부러지고 근육은 쇠약해지고 무릎은 비틀리고 어깨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는 내가 언젠가는 가볍고 밝으며 강력하고 눈부신 의로 옷 입은 새로운 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나처럼 척추를 다친 사람에게, 뇌 손상을 입은 환자나 조울증 환자에게 어떤 소망을 주는지 상상할 수 있는가? 다른 어떤 종교나 철학도 새로운 몸과 생명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 안에서만, 상처입은 사람이 이처럼 놀라운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상황과 처지가 어떠하든지 조니 에릭슨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현재 나의 삶의 자리에서 경험하고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실상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그분을 경험하지 못하고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나의 삶을 보게 됩니다.

      현재 나의 삶의 자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비결은 무엇일까?

      부활에 관한 가르침이 나오는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 유일한 비결을 자기의 삶으로 간증하고 있습니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죽으면 다시 사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합니다. 아주 단순한 진리입니다. 죽어야 삽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죽어야 한다는 말일까요?

      오랫동안 목회를 성공적으로 하시고 은퇴하신 선배 신부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자신이 평생 목회를 하면서 자신의 집을 팔아 바친 교인도 보았고 자기의 땅을 팔아 바친 교인도 보았지만 자신의 성질을 뽑아 바친 교인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웃으시며 가볍게 하신 말씀이지만 참으로 새겨들을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정말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이 말을 다르게 생각해 보면 자신은 지금까지 상처받기 쉬운 자아를 붙잡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살기 힘들다고 하소연합니다. 이 말 역시 지금까지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고 애썼다는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주님을 고백하고 영접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자기가 잡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실은 자기만 믿고 산 것입니다.

      자기가 죽는다는 말은 곧 ‘자아’가 죽는 것을 말합니다.

      이 놀라운 부활의 신비를 깨달은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갈라 2:19-20,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입니다. 사순절 동안 주님께서 내 삶을 통해 받기를 원하셨던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이 찬양을 자주 불렀지만,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비밀을 알지 못합니다. 나의 자아가 죽지 않아서 이 모양으로 밖에 못 산다는 것도 모르고 기를 쓰고 죽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아의 죽음은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일을 내가 인정하는 것뿐입니다. 십자가로 더 가까이 나아가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만나게 된 사람은 누구나,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볼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죽음을 보게 됩니다.
      
      마땅히 내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것이 아니라, 그 예수님과 함께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제 부활 밤 1독서 말씀을 기억합니다.
      로마 6:6-7, 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옛 사람이 못 박혔다고, 죽었다고 말씀하십니까?

    우리 생명 안에 죄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죄와 나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죄가 곧 나요, 내가 곧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짓고 사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뒤따라 다니며 그 죄를 씻어 주는 게 아닙니다. 죄에 종노릇하며 살던 우리가 죄를 이기게 하는 능력입니다. 죄와 죄의 결과인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 어릴 때 부모님을 잃고 고모 손에서 자란 소녀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모는 결혼도 하지 않고 조카들을 길렀습니다. 어느덧 고등학생이 된 소녀가 친구의 전도로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사춘기를 보내고 있던 소녀는 고모와 갈등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공부하지 않고 교회에 가는 조카를 나무라는 고모가 싫었습니다. 잔소리가 싫어 반항도 하고 불평이 많았습니다. 교회에 가면 회개하고 고모에게 잘해야지 하지만 집에 가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고모에게 대들고 화내고 짜증내고 문을 꽝 닫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배 중에 읽은 성경 말씀이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  갈라디아 2장 20절.
      “그렇구나. ‘내’가 고모를 만나니까 안 되는거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데, ‘예수님’이 고모를 만나주시면 되겠구나.”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 앞에 서니 자신이 없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시 고모의 잔소리가 시작될 것이고 그러면 반복될 일이 눈에 선했습니다. 소녀는 현관 손잡이를 잡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제가 고모를 만나면 오늘 또 싸울 것 같아요. 내안에 계신 예수님이 고모를 만나주세요. 저는 죽었고 예수님이 제 안에 살아계시잖아요.”
      이렇게 기도하고 문을 열자 역시나 고모는 벼르고 있었다는듯이 ‘너 또 공부 안하고 교회갔다오는구나.’ 호되게 야단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소녀의 눈에 야단치고 있는 고모의 무서운 얼굴이 보이지 않고 조카들 때문에 결혼도 못하고 평생 고생하고 외롭게 늙어가고 있는 지치고 여윈 고모의 모습이 보인 것입니다. 소녀는 너무 마음이 아파 고모를 와락 끌어안았습니다.
      “고모! 얼굴에 왜 이렇게 주름이 많아? 언제 이렇게 흰머리가 났어? 우리 때문에 이렇게 늙어버렸어...”
      조카가 자신을 끌어안고 펑펑 울기 시작하자 고모의 가슴도 갑자기 뜨거워졌습니다. 평생 조카를 위해서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살아온 고모에게 얼마나 슬픔과 한이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조카가 자기를 끌어안고 그렇게 엉엉 울자 고모의 가슴에 응어리 진 것들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날 예수님이 고모의 마음을 깊게 만져주셨고 그 후 고모 역시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믿는 이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그런데 만일 우리 가정에 예수님이 함께 계시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유는 하나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죽지 않아서 입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남편 안에 살아계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아내가 죽으면 남편이 아내 안에 살아계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부모의 가장 큰 바람은 자식이 잘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신앙이 있는 부모는 내 자녀가 하느님을 만나고 신앙생활 잘하기를 소원합니다. 아무리 욱박질러도 소용없던 자녀들도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됩니다. 부모가 자녀들 앞에서 자아가 죽은 모습을 보인다면 비로소 자녀는 부모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입에서 이런 고백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나는 부모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교우 여러분, 살아가면서 내가 분하고 제대로 숨조차 쉴 수없는 억울한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음성입니다.
      “바로 지금이 네가 죽어야 하는 때다!”
      
      자아의 죽음이란 ‘내가 이미 죽었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제대로 말하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이미 나는 죽었습니다.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듯이 자아의 죽음도 믿음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로마 6:4-5,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 자아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 삶에 예수님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말은 곧 그분의 십자가에서 그분과 함께 내가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 저는 이미 죽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이 제가 되어 주십시오. 저를 도구로 삼아 제 남편을 만나주시고 제 아내를 만나주시고 우리 아이들을 만나주십시오. 저를 도구로 우리 직장 사람들을 만나주시고 제 이웃들을 만나주십시오. 저는 이제 예수님 앞에 죽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고백할 때 우리 삶에 복된 죽음이 임합니다. 그 후에 죽음으로 부활의 생명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비밀이 자신의 삶에 해석되고 실현되는 놀라운 기적-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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