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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제자교회대한성공회 제자교회

  • 부활 3주일
  • 2014-5-4 루가 24:13-36

    예수가 동행하십니다.

     

    예수님의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30리쯤 떨어진 엠마오를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이들에게 예루살렘은 꿈의 도시였습니다. 그들이 삶을 바쳐 3년 이상을 동고동락했던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모세처럼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서 다윗왕처럼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강력한 이스라엘을 세워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드디어 그 날이 왔다며 호산나를 외치며 입성하던 도시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일주일은 자신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지나갔습니다. 민중을 규합하여 로마에 항거하고 혁명을 일으킬 것으로 여겼던 예수의 동선이 영 이상하기만 했습니다.

     

     

    성목요일 저녁 제자들과 함께 과월절 축제를 벌이던 자리에서는 늘 먹고 마시던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축사하시고 나누어 주시면서는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해서 흘리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그러더니 제자들의 발을 씼어주시고 알아들을 수 없는 긴 설교를 하시더니 게쎄마니 동산에 가셔서는 평소와는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도록 다른 고뇌에 찬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해가 안되는 예수님의 말과 행동이었습니다.

     

    마침내 가롯 유다의 배신으로 예수가 잡혀갈 때 자신들은 다 도망치고 순식간에 진행된 재판으로 예수는 무력하고 처참하게 십자가에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여 죽는 그 순간 저들의 꿈과 기대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다름 아닌 저들 희망의 종말이었습니다. 불과 일주일이 지난 지금, 예루살렘은 그들에게 비극과 절망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혼란과 실망이 밀물처럼 밀려왔고 허탈과 좌절에 주저앉아 이틀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예수의 무덤이 비어있다.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천사의 말을 들었다는 여인들의 증언이 있지만, 이미 무너져버린 마음을 추스릴 수 없어 두 사람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루가는 '저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길을 걸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길 위에서 서로 주고받은 이야기가 무엇이었을까요? 저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부정적이고 암울하고 절망적인 '실패와 좌절의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상이 좌절된 것에 훨씬 더 큰 비중을 두고 주고받는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나자렛 예수라면 충분히 우리 민족의 염원을 이루어줄 것이라고 기대했었는데...' 그런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있는 회한의 대화들을 나누면서 저들은 그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변혁의 희망, 입신양명의 꿈을 안고 올라갔던 예루살렘 길, 실패와 좌절, 절망으로 내려가는 엠마오의

    길에 있는 두 제자를 보며 수많은 인생의 여정을 보게 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절망한 사람들이 걸어가는 인생의 여정입니다. 낙심과 좌절이 배어있는 길입니다. 자신이 믿던 것들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자리가 엠마오입니다. 그치지 않는 상실감에 몸부림치는 자리가 엠마오입니다.

     

    지금도 우리 삶의 한복판에도 이런 절망의 소리들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세월호 침몰과 참사로 인한 희생자 가족들의 절규가 이 땅에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침몰하고 있고 '우리의 삶의 터전이 무너져 내린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렇게 오늘도 이 땅에는 절망에 몸부림치는 인생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내리막길을 걸어가는 인생들의 마음에는 좌절과 슬픔과 분노가 가득차 있으면서도 한편 누가 내 말을 들어주고 위로해 줄 함께 하는 사람을 그리워할지도 모릅니다. 노래 하나가 기억이 났습니다.

     

    최성수의 ‘동행’.

    아직도 내게 슬픔이 우두커니 남아 있어요.

    그 날을 생각하자니 어느새 흐려진 안개

    빈 밤을 오가는 마음 어디로 가야만 하나

    어둠에 갈 곳 모르고 외로워 헤매는 미로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 줄 사람 있나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사랑하고 싶어요 빈 가슴 채울 때까지,

    사랑하고 싶어요 사랑 있는 날까지

     

    그런 두 제자들 곁에 예수님이 따라붙습니다. 그의 발걸음은 저들과는 달리 가볍고 힘찼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새 따라와 저들과 어깨를 같이하며 여정을 함께 합니다.

    15절,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토론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서 나란히 걸어가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렇게 인생들과 함께 걸어가고 계십니다.

    부활 - 임마누엘 :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하지만 두 제자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눈이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16절의 '가리워졌다'는 헬라어 '이크라툰토''어떤 힘에 의해 붙들렸다'는 뜻입니다. 저들이 그 무엇엔가 붙들려 있을 때에 저들은 올바로 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와 같은 메시야가 나타나 자기 민족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다윗왕처럼 정치적, 군사적 대국으로 이스라엘을 재건할 메시야를 기다리는 잘못된 메시야관이었습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그 희망 속에 감추어져 있는 자신들의 욕망이었습니다.

     

    그런 나라가 세워지면 예수를 따라다니던 자신들도 한 자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보상심리, 성공욕이었습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과 욕망이 저들로 하여금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리워졌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깨닫지 못하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예배 중에 그 비늘에 벗겨지기를 축복합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주고받으며 길을 가는가'고 묻습니다.

     

    이에 글레오파와 그 친구는 그를 핀잔하는 투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사람으로서 요새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다니, 그런 사람이 당신말고 어디 또 있겠습니까?" 말하며 '나사렛 예수의 일'을 설명합니다.

     

    “그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도 사람들 앞에서도 행하는 일이 바르고 행위로나 말로나 참으로 예언자다운 훌륭한 예언자였소. 그런데 그만 제사장과 장로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아서 사형에 처하도록 총독에게 넘기지 않았겠소. 그래서 그분은 지난 금요일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소. 우리는 그분께 얼마나 희망을 걸었는지 모르오.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었으니...”

     

    그러한 저들의 말을 다 듣고 예수님은 크게 탄식합니다.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예수님은 이제 구약성서에 기록된 '오셔야할 메시야'에 대한 모든 예언을 놀라운 지식과 통찰로서 차근차근 설명해 나갑니다. 메시야의 고난과 죽음은 오히려 오랫동안 예언되어온 구약의 성취라고 설명합니다. 말씀이 거기서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메시야 생애의 클라이막스가 바로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요, 멸망이 아니라 승리요, 부끄러움이 아니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은 사망의 죽음이요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의 연장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새로운 탄생이기에 말씀의 완성이요 그 과정으로서의 십자가는 필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서에 의하면 수난과 죽음은 그 모순과 패배의 양상을 벗어나 오히려 영광을 입는 조건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은 실패요 좌절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왜 주님이 저들에게 지난 금요일의 사건을 말하게 하는 걸까요? 그 일들을 몰라서가 아닐텐데 말입니다. 주님이 저들을 찾아와 저들의 입으로 그날의 일을 말하게 하고 그 사건에 대한 저들의 이해를 토로하게 하는 것은 저들의 잘못된 삶의 해석을 고쳐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금요일 사건'은 하느님의 구원역사가 이루어지는 긍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에게 그것은 실의와 좌절과 절망의 스토리였습니다. 주님은 그런 저들의 잘못된 이해를 고추 잡아주시자는 겁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길손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어느새 저들에게 뜨거운 감동이 일고 있었습니다. 조금 전까지의 그 무겁고 우울했던 감정이 말끔히 가시고 무엇인가 새로운 희망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그들이 가려던 엠마오의 마을에 거의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더 멀리 가시려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두 제자는 “"이젠 날도 저물어 저녁이 다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와 함께 묵어가십시오." 하고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숙소에 들어가 저녁을 함께 할 때 예수님은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셨습니다. 이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날 때 예수님이 행하시던 모습이었고 불과 4일 전 성목요일 최후의 만찬에서 ‘이 예를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고 하신 성만찬의 모습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두 제자는 길을 걸어오면서 들었던 성경이 말하는 메시야가 바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희생제물로 바치신 예수이고 바로 지금 자신들과 함께 있는 이 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가리워졌던 두 사람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루가 24장에는 '연다'라는 말이 세 번 등장합니다. 헬라어로 '디아노이고'라고 하는 이 단어가 이 24장에서는 세 가지 의미로 각각 다르게 번역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31절에서 '눈이 열려'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32절의 '성경을 설명해 주실 때''설명'이라는 헬라어도 같은 '디아노이고'입니다. 그리고 45절의 '마음을 열어'도 역시 '디아노이고'입니다

    '눈이 열리고', '성경이 이해되고‘, '마음이 열려지고'... 이 세 가지를 종합하면, 올바른 시력이란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 열어주시고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고 마음을 열어주실 때 생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여전히 같은 환경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갖게 되는 눈을 갖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인생 가운데 오시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바로 눈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순간, 예수님은 어디론가 사라지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두 사람은 예수님이 눈에 보이고 안보이고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도상에 함께 하고 식탁을 함께 했던 부활하신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들과 함께 하심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하여 이들은 곧바로 그 발길을 돌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들이 자리를 박차고 달려가는 그 때는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저들에게 이제 밤은 더 이상 무섭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길에서 살아계신 주님의 동행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말씀에 대한 올바른 앎을 가졌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해 뜨거운 마음으로 사명의 길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저들은 이스라엘의 독립과 입신양명을 추구하던 예전의 저들이 압니다. 저들에게는 자신들과 동행해 주시며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바로 그분을 증거하는 것이 새로운 인생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그것을 알리려고 힘차게 자리를 박차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성공회 감사성찬예배의 축복이 이것입니다. 말씀의 전례, 성찬의 전례를 통해서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갖게 해 주시고 주님을 봄으로써 주님의 경륜과 뜻을 깨달아 알아 새로운 삶 - 파견례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정'이라든가 '길'이라든가 '걸어간다'는 단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길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입니다. '여정'과 '길'은 이 이야기의 특징입니다. 이 것들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 여정은 우리네 삶을 비유하는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그 인생의 여정에 길동무되시고 안내자되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엠마오는 그 절망의 인생의 여정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십자가의 사랑을 온전히 깨달아 죽음과 무감각 그리고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불신앙을 물리치는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친히 저들과 함께 길을 가는 것은 저들을 하느님의 길을 가는 당신의 길로 인도하셔서 저들로 참된 인생의 기쁨과 보람을 그 길에서 발견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여 무엇보다도 엠마오는 자신이 불필요하고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났다고 자포자기하는 인생들에게 새로운 마음과 눈을 열어주는 비전의 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엠마오 길에 저들과 함께 동행하셨던 이분은 오늘 우리들과도 동행해주시는 부활의 주님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나와 함께 울어줄 것입니까?

    누가 나와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되어줄 것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인생 여정에 동행이 되어주십니다.

     

    우리가 말씀 묵상과 기도로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의 심령은 회복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거룩한 희생을 기억할 때 하느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그 사랑의 힘으로 능히 새로운 인생의 여정을 힘차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 예배 가운데 이 축복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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