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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년 6월 29일 사도 베드로 바우로 - 사도성을 계승하는 그리스도의 삶
  • 2014년 6월 29일 요한 21:15-22



    사도성을 계승하는 그리스도의 삶

     

    1. 지난 한 주 우리 교회 공동체는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왔다. 6/23:삼성전자서비스노조 노숙투쟁 위로예배, 6/25-평화통일기원성찬예배, 6/27-28:향심기도피정, 6/29 오늘은?

     

     

    2. 6월 29일 오늘은 사도 성베드로 바우로 기념일이다. 천주교에서는 6.29에 가까운 주일을 교황을 위하여 기도하는 주일로 지킨다. 천주교는 교황이 베드로 사도의 정통성을 이어오는 사도적 계승자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여 천주교는 자신들의 교단만이 정통성이 있는 예수교이기에 개신교의 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3. 이는 사도적 계승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고백문 니케아 신경을 보면 교회에 대한 고백을 이렇게 하고 있다.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정리된 초대교회가 이해하고 있는 교회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다.

     

    4. 교회가 여러 지역교회로 흩어져 있지만 한 주님 예수님을 고백하며 하나이다. 오늘날로 적용하자면, 여러 교단으로 갈라져 있고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져 있지만,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면 한 교회라는 고백이다.

     

    5.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말이다. 죄인이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져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믿는 자에게 어떤 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하느님이 신자를 거룩히 여겨주시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인정해주시는 은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6. 공번되다는 말은 보편적이다. 열려있다.는 의미로 인종 성 계급 등등 누구나 예수님을 믿으면 교회공동체를 통하여 하느님의 가족이 된다는 말이다. 영어로 카톨릭이라고 하는데 흔히들 카톨릭하면 천주교라고 생각하지만, 이 땅의 모든 주님의 교회는 카톨릭이다. 천주교는 로만 카톨릭, 성공회는 홀리 카톨릭, 개신교는 리펌드 카톨릭.

     

    7.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 이 말은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베드로의 정통성을 이어오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교회 전체가 사도성을 계승하고 있다는 말이다. 교회란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의 모임이므로 예수 믿고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사도성을 계승받는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말이다.

     

    8. 먼저 사도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자기 뜻대로 살지 않고 나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사명자로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렇게 주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는 사도들이 가르치고 전한 교훈과 순교까지 각오하며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워온 사도들의 사역을 사도성이라고 한다.

    사도성이란 사도들의 교훈, 사도들의 사역이다.

     

    9. 오늘 서신은 사도로 자기 삶을 헌신한 바울로가 인생을 후반부에 자기의 삶을 회고하며 고백하는 말씀이다. 다시 읽어볼테니 눈을 감고 들어보라. 감동적이지 않은가? 주님은 오늘 이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모두가 사도 바울로와 같은 고백을 드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10. 어떻게 베드로처럼 바우로처럼 사도로 살아갈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 그 길이 나와 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 어부로 돌아가 그물질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오신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장면이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품 안에 거하며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비로서 사도적인 삶을 살기 시작한다.

     

    11. 밤새 헛그물질한 베드로와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밤새 헛고생한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대로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자 그물이 터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다. 몇 마리? 153.

     

    12. 그들이 그물질을 할 동안 예수님은 숯을 피우시고 빵과 생선을 준비해놓으셨다. 방금 잡은 고기도 가져오라고 하시어 와서 아침을 들어라 하시며 그들에게 생선을 구워주셨다. 선듯 다가오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친히 가까이 가셔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빵도 집어 주시고 생선도 집어주시며 먹이셨다.

     

    13. 베드로와 제자들이 먹은 것은 단순한 빵과 생선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사랑과 생명이었다. 오늘 우리가 먹는 면병과 포도주, 단지 밀가루떡과 술이 아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찢기신 예수님의 살, 흘리신 예수님의 피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며 생명이다.

     

    14. 모두를 조반을 마친 후 예수님이 시몬에게 질문하신다.

    15절, 모두들 조반을 끝내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15. 이 대화가 세 번이나 반복된다. 왜 일까? 첫 번째 두 번째 예수님의 질문에서 사용된 사랑이라는 단어가 헬라어 원문을 보면 아가파오라는 단어이다. 한국말에 사랑을 나타내는 단어는 하나이지만, 헬라어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네 가지 종류나 있다.

     

    16. 남녀간의 사랑 - 이성애적 사랑은 에로스, 가족 간의 사랑은 스토르게, 친구 간의 사랑-우정은 필리아이다. 이 세 가지 사랑은 조건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기브-엔-테이크. 가족 간에도 조건이 작용하는 것을 본다. 갈등, 외면 등의 현상.

     

    17. 조건적인 이 세 가지 사랑과 구분하여 무조건적인 사랑을 헬라어는 아가페라고 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아가파오로 물었다는 것은 베드로 네가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느냐는 질문이다. 그런데 그 질문에 베드로가 답한 동사는 휠레오다. 필리아의 사랑으로 형제간의 우정으로 사랑한다는 대답이다. 동문서답이다.

     

    18.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재차 아가파오로 물으셨고 베드로는 역시 필리아의 사랑으로 대답했다. 이 두 번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이 언급하신 아가페의 사랑을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 그 단어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셨다.

     

    19. 그래서 예수님은 세 번째 질문에서 베드로에게 필리아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고쳐 물으셨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번에도 필리아의 사랑으로 사랑하노라고 고백했다. 예수님은 필리아의 수준까지만 사랑을 알고 있는 베드로의 수준으로 자신을 낮추시어 그의 고백을 받아주신 것이다.

     

    20. 사랑은 상대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부부가 서로 자기 눈높이로 바라보며 요구하면 서로가 그 기대에 못미쳐 실망하고 갈등하고 힘들어 하는 것이다. 5가지 사랑의 언어를 읽어보았는지? 아내가 이해하는 사랑의 언어가 있고 남편이 이해하는 사랑의 언어가 있다. 남자는 대개 아내가 자신을 인정해 줄 때 아내로부터 사랑을 느낀다. 나는 그렇다. 아내는 남편이 기념일을 기억하고 선물을 주거나 집안일을 도와주거나 할 때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이해한다고 한다.

     

    21. 이렇듯 사람은 각자 자기가 이해하는 사랑이 다르다. 그렇기 상대방에게 눈높이를 맞추어 주는게 사랑이다. 공부에 소질이 없는 자식에게 공부를 강요하는 것은 탈선의 지름길이다. 하느님이 주신 무한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자녀 사랑이다.

     

    22. 요구할 수 없는 것 - 상대방이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면 결국 상처를 받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러나 요구할 수 있는 것 - 상대방이 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항상 감사하다.

     

    23. 베드로에게 아가페의 사랑을 요구할 수 없음을 아신 주님께서는 당신을 베드로의 수준으로 낮추시어 그에게 요구할 수 있는 필리아의 사랑을 요구하고 받으셨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시어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그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시고 그를 품어 주셨을 때, 베드로는 마침내 주님 안에서 아가페의 사랑까지 다다를 수 있게 되었다.

     

    24. 이것이 사랑의 위대함이다. 상대방의 수준으로 내려가 상대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상대를 품는다는 말이다. 그것은 상대방의 수준에서 상대와 내가 함께 머물러 버린다는 말이 아니다. 상대를 품으면 상대는 그를 품은 나의 품 안에서 나에게 동화된다. 그래서 상대를 품는 사랑은 위대하다.

     

    25. 이렇게 베드로를 품은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단 하나의 당부를 하신다. 내 양을 먹이라. 아가페의 사랑이 아닌 필리어의 사랑이어도 벗된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은 바로 양을 돌보아주는 것이다.

     

    26. 사도적 삶은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그 품에 거하며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의 양을 돌아보고 섬기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27. 사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 사랑의 정도가 에로스나 스토로게이다. 이성애를 추구하고 또 가족 정도만을 챙긴다. 필리오로 우정을 쌓아가는 사랑이 드문 일이다.

     

    28. 주님은 우리가 아가페는 아니어도 필리아의 사랑으로부터 시작하여 주님의 양을 섬기기를 원하신다. 주님이 양이란 먼저는 교회 공동체의 지체이다. 또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주님의 우리 안에 아직 들어오지 못한 우리 밖의 양들도 있다고 하신다. 즉 예수님이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불신자들이다.

     

    29.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공동체 지체와 불신자들을 돌아보고 섬기며 더불어 함께 주님의 제자로 세워지기를 원하신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양들을 잘 돌보는 것일까?

     

    30. 이 질문이 한 주간 여러분의 기도가 되기를 바란다. 기도가 깊어지기 위하여 주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기억하라. 그리고 소박하게 미인대칭부터 시작해 보자. 미소, 인사, 대화, 칭찬. 먼저 미소짓고, 먼저 다가가 인사하고 먼저 대화하며 칭찬하는 훈련을 통해 사랑을 배워가고 사랑을 키워가 보자.

     

     

    31. 사도 성 베드로 바우로 축일인 오늘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졌다. 사도성을 계승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초대교회 사도들이 전한 교훈-복음 위해 서서 사도들이 보여준 사역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워가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32. 이 사도적인 삶은 지금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고백으로 그의 양을 돌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교회 공동체 지체들과 교회 밖 불신자들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갈 지를 고민하며 우선 미인대칭으로 실천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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