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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의 뜻'에 대한 몰이해, 뒤틀린 역사의식 - 박영돈교수(고신대학교)
  • '하나님의 뜻'에 대한 몰이해, 뒤틀린 역사의식

     

    세월호 사건에 대한 목사들의 망언에 이어 총리 후보로 지명된 문창극 장로의 발언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그가 일제 식민 지배와 남북 분단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논조로 말한 것이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해 문 장로는 교회에서 한 신앙적인 언설을 그런 식으로 문제시하는 자체가 합당치 않다고 보며, 그러기에 자신의 말에 대해 특별히 사과할 것이 없다고 했다. 오히려 일부 언론이 강연의 전체 맥락과 상관없이 자신의 본의를 왜곡했다며 그에 대해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강경하게 맞섰다.

     

    그의 발언에 대해 거세게 반발하는 세상과는 달리 교회에서 나타나는 반응은 미묘하게 엇갈린다. 교회 안에는 세상과 함께 격분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그런 적대적인 반응이 지나치다고 보는 교인들과 목사들도 적잖은 양상이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는 것이 그동안 한국교회에 너무도 만연했기에 별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세상 역사가 담지하는 복잡다단한 차원의 의미에 대한 심층적인 고찰은 모두 생략하고 하나님의 뜻을 둘러대며 역사를 단순 무지하게 해석해 버리는 경솔함이 한국교회가 자주 범하는 과오, 즉 신앙의 이름으로 신앙의 본질을 배반하는 어리석음이다.

     

    문 장로의 발언은 다시 한 번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며 그에 대한 신학적인 반성을 촉구하는 사건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교회가 신봉해 온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이 얼마나 피상적으로 이해되는지를 잘 보여 주는 실례이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발생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악까지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단순 귀결에 이르는 것만큼 주권 사상을 왜곡하는 것은 없다. 악과 불의는 결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될 수 없다. 불의는 하나님의 공의와 선하심을 거스르는 반역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신 뜻을 끊임없이 거역하고 방해하며 좌절시키려는 악과 불의의 세력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반역의 세력을 주권적인 섭리로 제압하고 승화하여 궁극적으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신다는 것이 주권 사상의 핵심이다. 그러나 어떤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악과 불의를 발생케 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주권 사상의 핵심에서 벗어난 것이며 그 교리를 현저히 왜곡하는 것이다.

     

    일제의 악랄한 침략과 착취, 그리고 남북 분단과 6.25전쟁의 참사가 우리 민족을 연단하여 결국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할 위험이 다분한 발언이다. 물론 문 장로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런 표현은 하나님을 악과 불의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하지 못하게 한다. 동시에 일제 식민 통치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어느 정도 정당성과 필연성을 부여받게 되니 사람들이 격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더불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일제 치하에서 순응한 친일파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한 사람들인 반면에 일제 식민 통치에 반기를 들고 항쟁한 독립투사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반역자들이 되는 셈이다. 문 장로가 의도하지 않은 것까지 논리적으로 비약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발언이 그런 논리적인 귀결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회피할 수 없다.

     

    그런 발언에서 나타나는 주권 사상에 대한 오해와 맞물린 문제는 잘못된 성경 해석이다. 문 장로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 민족을 대비하여,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세우려 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통치와 섭리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의 압제로 연단하신 것처럼 우리 민족을 일제의 지배 아래 연단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성경 해석이 그의 역사의식을 상당 부분 주관하고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 국가는 앞으로 도래할 메시아 왕국을 대비한 하나님나라의 모형으로서 하나님이 통치하는 백성이었다. 신약시대의 어떤 국가도 이스라엘의 특권을 승계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이나 예루살렘의 역할을 할 수 없다. 기독교가 번영할 때마다 특정 국가를 새 예루살렘으로 등극시키려는 과도한 신앙의 열정과 교권에 대한 야욕으로 뒤틀린 역사의식을 빚어냈다. 한때 미국사회의 저변에 흐르고 있던 패권주의적인 국가관도 이런 역사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 구약의 이스라엘 국가와 유일하게 대비되는 대상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이다. 교회가 새 이스라엘이며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하나님나라의 공동체이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에서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 즉 교회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방인들이 다수를 점유하고 있는 특정 국가에 그대로 적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는 것은 성경 해석의 기본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다. 거기서부터 역사의식이 뒤틀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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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는 이번 문제에 대해 거론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습니다. 여러 분들이 이에 대해 문의해왔고 언론사에서도 원문을 보내주며 평가를 부탁해서 부득불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이미 강연의 전체 내용과 상관없이 문제가 되는 표현만을 가지고 문장로의 본의를 왜곡한다는 비난이 비등한 상황이었기에, 저는 강연의 원문을 다 읽고 문맥을 충분히 고려하여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몇 번을 다시 읽어봐도 문제는 명확했습니다.

     

    2. 전통적인 신학에서는 악이나 불의가 하나님이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영역, 즉 하나님의 주권 밖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이원론적인 오류를 배격하고 악까지도 하나님이 주권적인 섭리 가운데 포괄된 관점에서 이해해왔습니다. 이를 하나님의 허용적인 작정, 또는 감취인 뜻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하지요. 이는 이 세상만사가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의 굴레 밖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을 신학적으로 반성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들이지요.

     

    그러나 전통적으로 이런 개념을 우리의 실생활이나 세상사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때 각별한 주의가 필요함도 강조해왔지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가운데 허용된 악과 불의는 대부분 그 뜻을 구체적으로 간파할 수 없이 숨겨진 것들입니다. 그런 미지의 뜻을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여 자신의 어떤 신념과 관점을 강화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심각한 왜곡을 초래하지요. 윗글에서 지적한 문제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문 장로가 아픈 우리의 민족사에도 하나님의 선한 섭리가 함께 했다는 정도로 말했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일제지배와 남북분단, 6. 25 전쟁이 게으른 민족을 일깨우고 미군이 우리나라에 주둔하게 하며 공산주의를 막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구체적으로 자의적 해석을 한 것이 문제이지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는 것이 한국교회에는 너무도 익숙해져 있기에 그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 차제에 이런 점에 유의하자는 의도로 글을 올린 것입니다.

     

    3. 일제지배를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됨과 대비할 수 없습니다(어떤 이의 댓글에 대한 답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된 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맺은 언약, 즉 율법에 명시된 벌칙조항, 즉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불순종하면 받게 될 징계와 저주가 임한 것입니다(신2815-68). 그 징계는 언약의 한 면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나님이 그들을 혹독하게 징계하심은 그들과의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의 포로됨에는 자기 백성을 징계하여 돌이키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뜻이 율법에 명시되었을 뿐 아니라 선지자들에 의해 계속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언약적인 징계는 새로운 언약백성인 교인들과 교회에 계속됩니다. 이런 징계가 비록 우리에게 달갑지는 않지만, 우리를 아들로 대우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생자에게는 이런 언약적인 징계가 없다고 했습니다(히 12:7-8). 죄를 물마시듯이 짓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런 징계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징계가 없는 것이 더 무서운 징계, 즉 심판의 전조라고 할 수 있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들에게 임하는 고통과 어려움 속에 혹 하나님의 언약적인 징계가 깃들여있지는 않은지 자신의 삶을 조심스럽게 반추해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에 부여된 특권인 언약적인 징계가 세상 나라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성경의 기본진리에 대한 심각한 몰이해입니다.

     

    우리나라는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하여 언약을 맺으신 나라가 아니며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메시아 왕국을 준비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도 아닙니다. 일제지배 전의 조선은 기독교인의 비율이 채 1%도 안 되는 이방국가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조선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주어지는 언약적인 징계가 임했다고 보는 것은 성경을 심각하게 왜곡하여 적용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당시 교회는 오늘날 세속화된 교회보다는 훨씬 더 순수했으니 징계 받을 이유도 상대적으로 적었겠지요.

     

    일제지배를 이스라엘과 교회에 임하는 언약적인 징계 차원의 하나님의 뜻으로 본다면 수많은 문제가 야기됩니다. 과거 바벨론 포로됨은 하나님의 징계이기에 바벨론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하시는 손길에 순응하지 않는 반역이 됩니다. 일제식민통치도 그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일제의 압제에 항거한 삼일운동과 독립군 운동에 참여한 애국투사들과 신사참배를 거부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반역자들이 되는 것이지요. 일본의 군국주의 통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동원된 도구이니 어느 정도 합법성이 주어질 것 이구요. 하나님이 게으르고 미개한 우리 민족을 일깨워 근대화시키는데 필요악으로 일본의 지배를 허용하신 셈이지요.

     

    바로 그런 역사의식이 일본이 자국의 침략과 착취를 정당화하려는 논리와 기막히게 들어맞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 일본은 개가를 부르며 문 장로의 발언이 용기 있게 진실을 말한 것이라고 추겨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문장로의 발언은 신앙적으로도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물의를 일으키는 매우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적으로는 타당한 것인데 신앙이 없는 세속사회에서는 악의적으로 해석된다고 이분법적 논리를 동원하여 자신의 발언에 면죄부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썩 지혜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차라리 자신이 실언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박영돈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얼굴> 등 저자

댓글 2

  • 김장환엘리야

    2014.06.17 18:06

    <일제식민지배와 6.25 전쟁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시련'과 ‘단련’이라는 이름하에 사람 죽이기를 즐기는
    하나님이라는 전쟁광 거짓 신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라!>

    과연 일제식민지배와 6.25 전쟁이 하나님 뜻일까요?
    먼저 문창극의 발언 전문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
    “너희들은 이조 500년 허송세월을 보낸 민족이다.
    너희들은 시련이 필요하다. 너희들은 고난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그 고난 속에서 우리가 36년을 지나고 난 다음에야,
    마치 광야의 40년 생활을 하고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듯이
    36년의 고난을 거치고 난 다음에 대한민국의 독립을 허용 하신 거에요.
    그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라 이거에요.............
    ........................
    일제시대가 지났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독립을 주셨어요....
    잘살아야 하는데 또 하나님은 시련을 주신 거야.
    분단이야 분단. 남북 분단을 만들게 해주셨어요.
    그것도 지금 와서 보면 저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봐요.

    아까 얘기했죠, 조선지식인들이라는거는 다,
    거의 공산주의 사상에 가깝게 있었어요.
    만일 그때 통일한국을 주셨으면 한국은 공산주의가 되는 거에요,
    그때 자동적으로 공산주의가 되는 거야.
    그 당시 남한에 얼마나 많은 소위 공산주의, 조선노동당이 있었습니까?
    그 사람들이 나중에 다 여순반란 사건 같은걸 일으키는건데,
    그 당시 우리 체질로 봤을 때 한국한테 온전히 독립을 주셨으면,
    우리는 공산화 될 수밖에 없었어요.
    ..................................
    하나님의 뜻으로 보면,
    내가 불쌍해서 독립을 시켜줬지만
    아직도 너희들은 더 고난의 길을 갈수 밖에 없어.
    아직도 너희는 게으른 죄 깨끗하게 안된 거야. 분단을 시킨 거에요.
    분단을 시킨 것이 지금 와서 우리한테,
    분단이 되었기 때문에 한국이 이정도 살게 되는 거에요.
    만일 그때 공산주의가 됐으면 우리가 지금 어떻게 되어 있겠습니까.
    .......................................
    그런데 하나님이 우릴 그렇게 놔두신게 아니야.
    하나님은 너희 그렇게 안되겠다.
    다시 고난을 더 가져라.
    그것뿐입니까. 6.25까지 주셨어요.
    이 6.25까지 주신 거야............”
    -----------------------------
    이상의 문창극 강연 내용을 간단히 줄여 말하면
    “이조 500년을 허송세월을 보냈으니 일제 식민지를,
    그럼에도 아직 덜 정신 차렸으니 6.25 고난을 받으라!”
    이게 문창극이가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문창극이 강연 내내 주장하는 기독교라는 것이
    고작 부지런함과 청결함이라는 천박한 인식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이번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만 살펴보겠습니다.

    일제치하에 얼마나 많은 선조들이 고통을 당하고 목숨을 잃었습니까?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삶을 착취당하고 죽어간
    우리의 누이들은 얼마입니까?
    아직도 살아남은 그분들이 그날의 아픔을 증언하고 있는데,
    어찌 이 피눈물 나는 고통과 아픔이 하나님의 뜻이란 말입니까?

    6.25 전쟁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습니까?

    그런데 만약 한국이라는 나라를 정신차리게 하기 위해
    일제 식민지배와 6.25라는 살상극을 일으킨 게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란 존재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생명을 처참히 죽이기를 즐기는 악마가 아닐까요?
    나는 이게 정말 하나님의 뜻이라면
    사람 죽이는 전쟁을 즐기는 악마 같은 하나님을 결코 믿지 않을 것입니다.

    일본은 한국만을 침략한 게 아님을 초등학생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6.25와 일제식민지배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문창극의 주장대로라면
    일본이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침략한 것 역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침략한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히틀러가 수많은 유대인을 태워 죽인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무언가 경고하고 단련시키기 위해
    저리도 많은 사람들을 태워죽이도록 한 것이겠지요.

    일제식민지와 6.25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문창극의 주장에 대해
    한국교회 많은 목사들이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하기에 틀리지 않은 신학이라는 것이
    문창극을 지지하는 목사들의 변호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위해
    처참한 살인극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해야 한다면,
    그 하나님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하나님일까요?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 목숨을 파리보다 못하게 죽이는 신을
    어찌 사랑의 신이라 할 수 있을까요?
    나는 그런 하나님은 결코 믿지도, 섬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람 죽이기를 즐기는 미치광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살인마 전두환이의 광주살상극과 삼청교육대는
    사람 죽이기를 즐기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살인독재에 비하면 껌 값에 불과합니다.

    문창극을 지지하는 목사들의 주장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하기에
    살생극인 6.25와 일제 식민지배를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해야한다면,
    오늘 아침 문창극이가 음식을 잘못 먹어 설사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문창극이 대머리 벗겨진 것도 유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문창극이가 셀프 교수질로 동창회비 삥땅 뜯은 것도
    문창극의 탐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에 불과합니다.
    문창극이가 지난 수년간 중앙일보에 써 갈긴 그 모든 헛소리 같은 글 역시
    문창극이가 쓴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한다는 목사들의 주장대로라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잘못도 하나님의 뜻이요,
    아벨을 돌로 처 죽인 가인의 살인극도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17명을 죽인 살인마 김대두 역시 하나님의 뜻입니다.
    살인마 유영철도, 강호순도, 신창원도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아무 잘못 없습니다.

    아, 세상의 모든 일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한다면
    조머시기 목사가 수백억원의 교회 돈을 삥땅 뜯은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강남의 뭐시기 목사가 여비서에게
    “너는 내 마지막 애인이야”라고 속삭였던 것도
    전머시기 목사가 교회 여성들을 성추행한 것도,
    교회 여권사와 바람피다 호텔에서 떨어져 죽은 뭐시기 목사도
    다 개인의 성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더 깊은 뜻이 숨겨져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 목사님들의 추잡한 성욕 뒤에 숨은 하나님의 뜻을 모를 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에 문창극이의 헛소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목사들의 논리대로라면 인간은 그저 하나님의 허수아비요,
    인간은 한낱 하나님의 일회용 장난감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그저 장난감에 불과하니
    하나님 마음대로 죽이고 장난쳐도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 당신의 뜻을 이룰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이건 결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꺼져가는 작은 생명도 살리시는 사랑과 생명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살인광이 아니라
    탐욕스런 인간들이 일으키는 전쟁의 살인극 속에
    고통 받고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의 아픔에 함께 신음하는 하나님입니다.
    어찌 참담한 전쟁에 하나님의 뜻을 붙인단 말입니까?
    이보다 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준 십계명 중 제3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문창국이처럼 아무데나 하나님의 이름을 붙인다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만들고 생명을 보존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미명하에
    사람을 죽이는 살인광으로 만든 망령된 범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교회 주일학교 유치원 아이들도 줄줄 외는 요한복음 3장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에
    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너무 많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고 우리의 잘못에 대해 벌을 주는 대신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에게 우리 대신 고통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허물과 고통을 대신 지고 가는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온몸이 채찍에 맞아 살갗이 너덜너덜 찢어지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며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의 눈물과 고통 속에 하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시련’과 ‘단련’이라는 미명하에 전쟁을 일으키고 사람 죽이기를 즐기는
    미치광이 하나님이 절대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탐욕의 인간들이 일으킨 미친 전쟁의 포화 속에
    고통 받고, 눈물 흘리며 죽어가는 자들의 신음 속에 함께 아파하고
    함께 눈물 흘리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데나 하나님의 뜻을 붙인다고 하나님의 주권을 이루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장난감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을 닮은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닮은 형상인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도,
    히틀러가 유태인들을 학살한 것도,
    일본들이 조선을 침략한 것도,
    북한이 3.8선을 넘어 민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킨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탐욕의 인간들이 저지른 흉악한 범죄에 불과합니다.

    문창극의 발언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올바른 신학이라고 변호한
    한국교회의 많은 목사들을 보며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 이게 오늘 한국교회의 슬픈 현실이구나 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슴 깊이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깊이 병들어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정신병 증세가 심각합니다.
    문창극의 발언은 오늘 한국교회의 정신병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준
    고마운 계기가 되었다고 스스로 안위 삼아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돈’이라 써놓고 ‘하나님’이라고 읽습니다.
    탐욕의 신 맘몬을 하나님이라고 섬기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창극이 덕에 맘몬뿐만 아니라
    일본천황을 섬기는 목사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마르크스는 종교를 마약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주권이란 미명하에 전쟁을 즐기는 하나님을 믿으라 한다면
    이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마약보다 더 심각한 폐해를 가져오는 재앙입니다.
    이미 한국교회는 오염된 신앙에 심각하게 중독된 증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만약 6.25와 일제식민지배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면
    ‘이 세상을 정말 사랑하사 예수를 보냈다’는 복음을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전쟁을 통해 사람을 심판하거나 단련시키는
    미치광이 전쟁광, 살인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문창극의 발언이
    워낙 중요한 문제이기에 쓰다 보니 말이 길어졌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멈춰야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이어서 문창극 발언의 문제점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문창극과 목사들에게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마시오.

    마태복음 7장15, 21~23절에 예수님 말씀으로 말을 마치겠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최병성 목사
  • 김장환엘리야

    2014.06.17 20:08

    “모든 것은 신의 뜻” 함석헌과 문창극의 차이

    [건국대 사회학강사, 연구집단 카이로스 회원] 글펌

    “모든 것은 신의 뜻”

    ...이 세상의 “모든 시련과 고난은 신의 뜻”이라는 사고방식, 그리고 그것을 국가의 역사적 운명에도 적용하는 사고방식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옛날의 주술적 세계관, 운명론적 사고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문창극의 역사인식은 결코 문창극 개인의 것만이 아니라, 한국 보수 개신교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신교의 역사인식이 모두 엉망이자 문제인가? 사실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서술한 한국 신학사(또는 신학의 범주를 넘어서는)의 역작은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이다.

    함석헌 선생도 민족의 고난에 직면하여, 신의 뜻과 민족의 역사를 연결시켜 사고했다. 민족의 고난에 신의 뜻이 있다고 했다. 표면상으로는 문창극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한국 보수개신교나 문창극과는 달리 함석헌 선생의 저작은 고전 중의 고전이며, 한국 진보진영과 민중신학 진영에서 폭넓은 인정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양자 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함석헌과 문창극의 차이

    첫째, 문창극과 함석헌의 차이점은, ‘고난의 원인제공자’가 다르다는 점이다.

    문창극에게서 신은 파시스트이자 새디스트이다. 경제발전이라는 텔로스를 위해 민중 학살도 마다하지 않는다. 일제통치, 6.25와 민족분단, 심지어 독재도 정당화된다. 신정론이자 신정을 정당화하는 담론이다.

    함석헌에게서 신은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하는 신이다. 고난의 원인제공자는 일제 같은 외세와 지배층, 권력자들이다. 그래서 함석헌의 역사인식은 고난받는 자와 함께 한다. 신의 근본적 뜻은 민중들의 번영일뿐 고난이 결코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이 성서적 역사관이다. (물론 성서에서 문창극과 같은 ‘승리주의적 사관’을 뽑아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역사신학자들에게 맡겨두자.)

    둘째, 시간관의 차이가 있다.

    문창극 같은 인식에서, 고난은 실제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역사적으로 ‘무의미’하다. 경제발전된 세계만이 목표이므로, 그의 시선에 고통받는 역사적 시기는 그야말로 ‘스쳐 지나가는’ 과정에 머무른다. 오히려 신에게 그 시기의 고통을 ‘떠넘기는’ 것이며, 나아가 지배계층의 죄악을 덮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문창극의 역사인식은 “가해자를 신을 빌어 용서해버리는” 역사관이다. 우리는 이러한 인식을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 본 적 있지 않은가? 결국 문창극의 역사관은 ‘면죄부’ 역사관이다.

    반면 함석헌의 역사관에서 주인공은 고난받는 민중이다. 고난의 과정도 의미가 있다. 해방 자체가 목표라기보다 해방의 과정도 중요한 것이다. 물론 함석헌의 사상도 50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신정론적 시간관, 근대의 직선적 시간관이 없지는 않다. 그런데 과거 굳이 맑스주의적 역사관보다 함석헌의 역사관이 대중들에게 소구력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함석헌의 역사인식이 단순한 근대의 목적론적 역사관과는 뭔가 다른 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승리주의적 역사관, 사회진화론과 무엇이 다른가

    사실 성서를 둘러싼 역사인식 문제는 단순한 백년전쟁도 아니고, 이천년 전쟁, 나아가 오천년 전쟁일 수도 있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를 지배했던 ‘사회진화론’은 사실 기독교의 승리주의적 역사관과 거의 동질성을 갖고 있다. 어떻게 보면 단순히 기독교만의 문제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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