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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시대의 신정론(3)--- 악은 어디서 왔는가. : 김동건교수
  • 우리시대의 신정론(3)
    --- 악은 어디서 왔는가.

    전번 글에서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신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이다. 하나님이 악을 미워하신다면, 악은 어디서 왔는가? 이 질문은 신정론의 오래된 질문이다.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많은 사람들은 ‘신’이 존재한다면, 이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악의 기원과 존재에 대해 여러 철학과 종교에서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신정론은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을 내포하기 때문에, 모두가 동의하는 하나의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다.

    <신이여, 왜 악을 허용하십니까?>...
    그러면 지금까지 기독교에서 논의한 신정론에 대해 짧게 보겠다. 기독교에서 시도한 답변은 대체로 일원론적 관점이었다. 악의 존재를 이원론적(dualistic)으로 보는 것은 비기독교적이라는 견해가 우세했다.

    이원론적 관점은 신을 ‘선한 신’(하나님)과 ‘악한 신’(사탄)이라는 두 신으로 보는 입장이다.
    그래서 선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고, 악은 악한 신에게서 나왔다는 이원론적 견해는 지지를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원론적 신 이해는 다신론이 되기 때문이다. [여전히 일반 기독교인 중에는 이원론적 이해를 가진 사람이 상당히 있다.]

    일원론적(monistic) 입장은 악한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탄을 하나님과 대등한 ‘신’이라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사탄이나 악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일원론적 입장에서는, 악의 기원이 하나님과 무관할 수가 없다는 논리를 가진다. 따라서 어떤 형태이건 악에 대해 설명해야 했고, 대체로 악은 아무런 존재가 아니거나 선의 결여(혹은 부정)로 존재한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나아가 악은 오히려 선이 드러날 수 있도록 봉사하는 기능을 가진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생각 위에서, 성경에 나오는 무고한 자의 고통, 이스라엘이 겪은 고통, 심지어 전쟁과 살상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고 해석했다.

    이런 해석에는 전제가 있는데, 바로 악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보니 기독교인들에게는 고통의 원인, 고통의 현실, 살상과 악독의 이유를 언제나 하나님에게 돌리려는 사고가 숨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알 수 없는 고통을 만나거나, 이해되지 않는 부조리를 만나면, 이렇게 묻는다. “신이여, 왜 악이 존재합니까?”

    기독교인들이 고통의 현실, 사회의 부조리, 증오, 전쟁과 살육 앞에서, 그 원인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에 익숙해진 것이다.

    <우리는 왜 악을 허용하는가?>
    20세기가 되면서 악과 고통의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20세기에 있었던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은 수없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 갔다. 또한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심각한 재해를 많이 겪었다.

    20세기를 거치며 인간 내부의 숨겨진 악독이 노출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무고한 자의 고통과 죽음은 하나님에게 원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모순된 현실의 총체적인 결과”로 인해 파생되어지는 것이라는 반성이 일어났다.

    “모순된 현실의 총체”, 즉 악의 현실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죄성, 인간의 사악함, 그리고 피조세계가 가지는 한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창조론과 인간론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필요하다. 인간은 주체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악을 행할 수도 있고, 악에 처할 수도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주체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다.
    인간에게 아무런 주체성과 책임성이 없다면, 인간의 기도와 결단은 무의미 할 것이며, 하나님과 대화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도 없는, 로봇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아직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지 않았다. 역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는 과정에 있다. 이 도정에서 우리는 악을 만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죄성, 피조세계의 한계 등에서 비롯된 모든 부조리와 악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린 후 하나님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잘못된 독재자의 압제에 의해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갈 때, 자신의 이익과 탐욕에 의해 무수한 사람이 희생될 때, 가난한 사람이 치료받지 못하고 질병으로 고통에 시달릴 때, 이 모든 원인을 하나님께 돌린 후, 신의 정당성을 논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많은 경우 고통과 죽음의 원인은 그것을 야기하거나 용인한 우리에게 있다. 이제 “신이여, 왜 이런 부조리한 일이 일어납니까?”라고 질문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은 “우리는 왜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그냥 허용하는가?” 라고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성경의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고, 고통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선포하시고, 악에게 지지말고 이길 것을 명하신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누가 4:18-19)

    생명을 원하시고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과 이 뜻을 잘 수행하지 못한 기독교인의 죄성, 이 사이에서 신정론은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

    <정리>
    이제 일제 식민지배를 다시 생각해보자. 일제 식민지배 동안 한국, 중국, 동남아 등에서 무수한 생명이 죽고 고통당했다. 기독교인이라면 이 고통의 현장에서 예수님도 함께 고통 속에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악의 현실 앞에서 기독교인이 해야 할 고백은 무엇인가.

    한국교회는 이렇게 고백해야 할 것이다. “식민지배를 허용하고 이기지 못한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일본교회는 이렇게 고백해야 할 것이다. “식민침약을 막지 못한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한국교회와 일본교회는 함께 이렇게 고백해야 할 것이다. “두 번 다시 역사에서 식민지배와 같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위가 없도록 헌신하겠습니다!”

    고통 받고 있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 '왜' 라고 질문하고, 그 대답 여부에 따라 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그런 신정론은 지나간 시대의 유형이다.

    그대신 모순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원인을 찾아 담대히 맞서면서 '왜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허용했는가?'라고 우리에게 질문해야 한다. 이것이 악한 현실과 부조리 앞에 선 기독교인의 살아있는 신앙이며, 우리시대의 신정론의 출발점이다.

    모순과 부조리가 줄어들 때, 모순의 총체적인 힘에 의해 희생되는 무고한 자의 고통과 죽음도 줄어 들 것이다.

    과거의 신정론의 질문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던진 추상적인 질문이었다. 이제 인간에 의한 것을 하나님께 전가하기보다 우리에게 물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신정론의 과제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성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이 다가갈 것이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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