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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ㅡ 우리에게도 기적이 일어날까?
  • 우리에게도 '기적'이 일어날까?
    멜 깁슨 제작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고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김용운(ikem) 기자    

      
    예수가 죽기 전 열두 시간 동안 그의 수난과 부활을 담은 영화 <패션오브크리스트>는 1960년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의결된 자국어 전례를 받아들이지 않고 순수한 라틴어 전례만 고수하는 보수가톨릭교단의 신자, 영화배우 멜 깁슨이 사재를 털어 만들었다.

    지난 2월 미국에서 반 유대 영화라는 논쟁 속에서 개봉되어 전혀 예상치 못한 전미흥행 3억달러라는 기적(?)을 만들어가고 있으며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되어 단숨에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였다.

    예수의 벌거벗은 육체 위로 로마 군인들의 쇠 채찍이 내려쳐지고 예수의 육신은 살점이 뜯겨 허연 뼈가 드러날 정도로 참혹하게 유린되는 장면이 상영 시간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영화. 푸줏간의 고기 마냥 핏덩어리로 나뒹구는 예수의 절규가 낭자 하는 영화,

    당시 이스라엘 지방에 대한 철저한 고증과 성서에 묘사된 그대로를 바탕으로 만든 <패션오브크라이스트>는 이처럼 예수가 성금요일 수난을 당했던 그 당일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화제가 되었다.

    사순절 그리스도 수난사는 서구 기독교 문명의 중요한 문화적 코드였지만 <패션..>처럼 대놓고 예수의 육체적 고통을 극도로 묘사한 작품은 없었다. 적어도 중세시대의 성화처럼 미화시켜야만 떠올릴 수 있었던 예수 수난의 모습을 날것으로 묘사한 <패션..>은 역설적으로 예수가 진정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매우 기독교 색채가 강한 작품이었으나 한편으로 “하드고어뮤직비디오, 예수의 골고다 수난기”로 보일 정도로 감각적인 영상과 음악이 눈에 띄는 작품이기도 했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감동을 강요하는 음악과 십자가 처형에 대한 극도의 묘사는 눈물을 떨구게 하기보다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마리아와 예수의 제자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너무나 꼿꼿하고 의연한 모습들이었다.

    또한 빌라도가 그처럼 미화되어 있는 모습을 보자니 저건 아닌데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년기부터 내 삶에 내재되어 있는 기독교문화의 세례는 어쩔 수 없이 영화에 대한 갖가지 상념들을 이끌어내었다.

    육신이 걸레조각처럼 거덜나는 예수의 모습보다 더 눈길이 갔던 것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성난 군중들의 모습이었다. 반 유대 영화의 혐의를 받을 수 있는 부분이겠으나 그것은 유대인의 이름을 빌어 왔을 뿐. 타인의 고통을 관음하고 그것에 쾌감과 더불어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확인하려는 인간의 보편적 군중심리가 내재되어 있었다.

    영화의 주인공은 예수임에 분명했으나 정작 예수의 수난보다 더욱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를 보는 군중들의 광기였다. 집단의 힘으로 한 개인을 유린하는 그 광포한 살기와 그것을 축제의 형태로 즐기고 있는 군중의 모습은 인간이 지닌 또 하나의 모습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즉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기에 신으로부터 고통을 받지 않는다고 안도하는 군중들의 모습. 눈앞의 한 청년이 무수한 폭력으로부터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그는 신을 모독하고 유대인의 왕이라 스스로 칭하였기에 그렇게 되어 마땅하다는 확신에 찬 눈동자들. 예수의 비명소리에 즐거운 웃음을 짓는 그네들의 모습을 보면서 종종 양미간을 찌푸려야했다.

    더불어 인류역사상 수많은 군중 앞에서 벌어졌던 온갖 가학적인 형태의 형벌. 그 형벌의 희생자만을 기억했던 내가 정작 중요한 부분은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희생자들을 보면서 마음 아팠던 사람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희생자에게 행해지는 폭력을 보며 박수를 보냈던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희생자를 보며 박수를 치고 조롱을 유도했던 권력자들이 있었다는 것. 영화는 예수의 고통을 통해 그에게 가학적이었던 군중들의 모습이 비단 유대인에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통해 벌어졌던 인간의 어두운 진실을 환기시켜주고 있었다.

    지금 현대 사회에서 살점이 떨어지도록 매를 맞고 손바닥에 못이 박히는 형벌의 희생자가 될 확률은 극히 드물겠지만, 예수의 십자가형을 강요하는 군중들처럼 무고하게 희생되는 소수의 사람들을 보며 손뼉을 치거나 비웃음을 보낼 사람 중에 한 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그때에 비해 오히려 더 높아진 것이 아닐까?

    예수는 자신을 능욕하고 학대하는 이들을 보며 이렇게 되뇐다.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나이다.” 이 말에는 자신을 보며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그 손가락질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되면 잘못을 참회하고 회개할 것이라는 예수의 긍정적 인간관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의 이 전언은 “원수를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정언명령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자신의 행위가 죄가 되는 지도 모르는 이들. 그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신 앞에서 회개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주변의 이웃과 심지어 원수마저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가 전한 기독교 사상의 핵심이다.

    이런 예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무릇 진정한 기독교 신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원수마저도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나만 믿으면 천국에 갈 것이라는 '보험증서' 예수만이 오히려 더 환영받는 세태에 우리는 살고 있다.

    게다가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신자를 자처하는 몇몇 보수주의자들은 김정일을 '사탄'이라 규정하고 북한을 악으로부터 구하고자 설령 무력으로라도 쳐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패션..>에서 역시 기독교 신앙에 있어 중요한 개념인 사탄이 등장한다. 그는 예수의 고난을 지켜보며 그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권능을 이용하여 그 고통의 상황에서 빠져나오길 눈빛으로 종용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저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끝까지 거부하지 않고 참아낼 뿐이었다.

    그는 사탄에 맞서 물리적으로 싸웠던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가진 이기적 욕망과 싸웠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고 온전히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 아버지 하느님이 바란 것은 사탄과 대결이 아니라 사탄 스스로 아버지 하느님 뜻을 따르는 인간 예수를 보고 파멸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마침내 다 이루었다” 하고 숨을 거둔다. 그 순간 사탄은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괴성을 지르며 산산조각 난다.

    또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지 원수를 증오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원수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그러나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것을 반대로 해야한다고. 영화 속 예수는 제자들에게 거듭 강조한다. 그것은 영화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서에서도 강조되는 예수의 핵심 교리이다.

    사랑은 일방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말했듯이 그 대상의 벗이 되어주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 부를 터이니 너희도 그렇게 하여라.” 친구 사이에는 우열이 없다. 위아래가 없다. 예수는 그런 관계에 비로소 천국이 있다고 말했다. 사귐과 나눔의 공동체를 바란 것이었지 배타와 적대의 공동체를 바란 것이 결코 아니었다. 작금의 한국 기독교 문화가 과연 어디에 더 가까운 것인지 영화를 보며 몇 번이나 의심스러웠다.

    우리나라에서도 기적이 일어날까?

    99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전체 인구 중 불교신자가 약 26%에 이르고 개신교와 천주교를 포함한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약 25%를 차지한다고 나와있다. 그러나 우리가 체감하는 기독교 인구수는 이보다 더 많을 듯 하다. 전국 어디에서나 교회의 붉은 십자가를 볼 수 있으며 세계 10대 대형교회 중에서 절반 가까이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은 단순히 기독교 신자가 많다는 느낌에 확신을 부여한다.

    사실 필리핀을 제외하고 아시아권에서 기독교 문화가 가장 많이 정착되어 있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단적인 예로 예수의 탄생일인 성탄절이 국경일로 지정된 나라는 아시아권에 서 흔치 않다. 이웃 일본만 해도 성탄절이 국경일이 아니다. 또한 역대 대통령들의 종교를 봤을 때도 기독교 신자가 다른 종교에 비해 많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패션..>의 흥행은 미국에서처럼 폭발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 아시아권에서는 가장 수위에 있을 것은 분명하다. 개봉직전 4월 첫 주 각종 영화 예매사이트에서 <반지의 제왕3 왕의 귀환> 이후 처음으로 한국영화를 제치고 예매율 정상에 올랐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부활절을 앞두고 각 교회와 성당에서 단체 관람이 줄지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관객들이 부지기수고 '아멘' 하며 보는 신도들도 있다고 한다.

    영화 한 편으로 없던 신앙심이 생기고 나약했던 믿음이 다시 강해지지는 않으리라. 영화는 영화 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터이니. 다만 영화를 보면서 예수의 고통에만 눈물 흘리지 마시길, 예수의 참혹한 육신에만 눈길이 가지 말기를. 자신들이 믿는 예수가 가장 바라는 것은 지금 살고 있는 이 현실에서 서로 위로하고 나누며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임을 잊지 마시길.

    또한 전후 좌우 사정을 살피지도 않은 채 무작정 집단의 힘에 의탁하여 무고한 이에게 손가락질하며 조롱했던 이스라엘 군중이 사실 우리의 일반적 모습과 더 가까운 것임을 명심하시길.

    그리고 예수의 부활은 단순히 육신의 부활이 아니라 그 정신의 부활임을, 하여 오직 예수라고 목청 높여 기도만 하는 것보다 그의 정신을 삶으로 증거하며 사는 것이 가시관 쓴 예수의 진정한 바람이며 예수는 굶주리고 가난한 이들의 벗이었지 권세와 부를 지닌 이들의 벗이 아니었음을 기억해 주시길.

    마지막으로 예수의 비명에만 마음 아파하지 마시고 주변 이웃들의 신음소리에도 마음 아파하시길. 그것이 영화를 보며 흘리는 눈물보다 더욱 값진 것이라고 감히 주장해본다.

    끝으로 사족 하나를 덧붙인다. 나이를 먹어 어릴 적 순진무구한 믿음이 점차 퇴색해 가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 죄를 대신하여 수난하고 죽으신 예수보다 우리에게 새로운 인간관계와 그 관계에서 오는 참된 행복과 기쁨을 알려주러 오신 예수에게 더욱 이끌리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영화 속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행복해하는 예수의 표정이 가시관의 고통에 일그러졌던 그의 표정보다 더욱 인상적으로 내 가슴속에 남았던 까닭도 그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과연 예수처럼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다 내주고 스스로 낮추어 가난한 이들의 발을 씻겨주며 진정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리더는 없는 것일까? 영화를 보고 나온 밤거리. 총선 출마자들의 포스터가 어두운 담벼락에 붙은 채 각기 한 표를 호소하고 있었다.

    그네들의 얼굴을 보며 문득 우리나라에서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2004/04/10 오전 12:39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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