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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주간 화요일 단상 -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대한 비평 글 소개!
  • 생애 빠진 예수의 수난은 '빈껍데기'  멜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확실히 미국에서 예수는 인기가 있다. 6~70년대 반전과 반문화를 내세운 히피 문화가 한창일 때도 예수는 그 시대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70년 초 등장하여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이다.

    80년대 이후 역사적 예수 연구의 르네상스가 일어난 곳도 역시 미국이다. 현재까지 미국에서 한창 진행중인 역사적 예수 연구는, 상아탑에 갇힌 신학자들 간의 소일거리로서가 아니라 각종 일반 언론매체를 통해서 수차례 다뤄질 만큼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영화로 보자면, 국내에서는 철저히 홀대를 받았던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1988년작 <예수의 마지막 유혹>도 논란을 일으키긴 했으나 미국에서만큼은 그런대로 성공을 거둔 것으로 안다. 그만큼 거반 기독교 국가나 다름없는 미국이라는 사회는 예수에 관심이 많다.

    이것을 감안한다면, 최근에 나온 멜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그리스도의 수난)가 흥행에 대박을 터뜨렸다는 사실에 그다지 크게 놀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멜 깁슨이 바보가 아닌 한, 철저한 시장조사를 통한 수익구조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막대한 투자를 해가며 영화를 제작했으리라.

    그런데도 이 영화에 관해 다뤄지는 여러 기사들이나 제작 과정을 보여주고자 기획된 영상물을 보면 멜 깁슨의 보수적인 독실한 신앙심이 무모하게도 이 영화를 제작하게 한 듯한 인상을 풍긴다.

    라틴어와 아람어 사용이라든가 자막 없는 영화에 대한 고집 등을 그 근거로 들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 지금까지 흔해빠진 예수 영화와는 차별화 된 뭔가를 보여줘야만 상업적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니 깁슨의 이러한 시도는 참신하다기 보다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만 보인다.

    그렇긴 해도 <패션..>의 가장 큰 미덕은 오래 전에 사어가 된 라틴어와 아람어의 육성을 복원하여 사용한 데 있으리라. 성구를 판박이 한 것이나 다름없는 대사 내용은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말이다.

    감독은 주관적 해석이나 상상을 배제하고 최대한 성서에 있는 그대로의 예수를 그려내려고 했다고 한다. 숱한 자료를 뒤지고 역사적 고증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선전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수난사화를 재현해 내는 데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소품 사용은 역사적 고증에 충실한 것인지 모르지만 전체적인 줄거리는 지극히 고루한 수준에 머물러있다. 뻔한 스토리로 이목을 끌려고 예수가 당하는 수난에 과도한 집중을 하다 보니 관객들을 넘치는 가학적 폭력 현장의 구경꾼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것은 이 영화가 의도하고 있는 예수의 대속적 죽음이라는 이해와도 직결되는 문제다. 그러니까 결국 무엇인가? 로마 군병들에 의해 살점이 마구 튀어 떨어져 나가도록 채찍질 당하는, 육중한 십자가의 무게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수 차례나 넘어지는, 그 예수는 우리 죄를 대신하기 위하여 불가피한 죽음을 죽은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를 죽인 자들이든, 죽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며 지켜보는 자들이든 간에 예수가 흘린 피는 죄를 씻어주는 신비한 능력이 있음을 말하려는 것 같다.

    그것은 빌라도의 아내가 마른 수건을 가져다가 마리아에게 건네면서 대리석 바닥에 흥건하게 묻은 피를 닦도록 하는 장면이나, 마지막 피한 방울이 떨어지면서 지진이 일어나는 장면에서 그러한 의도를 쉽게 엿볼 수 있다.

    예수의 대속적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영화는 당연히 예수의 죽음을 무미건조한 교리적 틀 속에 가둬버린다. 단적인 예로, 영화에 등장하는 성모 마리아나 요한 캐릭터만 보더라도 그렇다.

    마리아는 자기의 아들이 채찍에 맞거나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장면에서조차 성모다운 품위가 손상되지 않은 선에서 그윽이 지켜볼 뿐이다. 그녀가 흘리는 눈물은 악어의 눈물마냥 전혀 실감이 없고 감정마저 메말라 있다. 예수의 제자인 요한도 마찬가지다. 스승의 처형 현장 앞에서 초연한 듯 서 있는 그의 꼿꼿한 모습이라니!

    예수가 처절한 고통을 당하고 너무나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했으며, 골고다 언덕에서 못 박혀서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애써 강조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그것은 이미 널리 알고 있는 바이고 그보다 더욱 잔인한 고문과 참혹한 죽음도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일어난다.

    요컨대 예수의 생애가 빠진 수난이란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 일 뿐이지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십자가 수난과 처형을 어찌하여 ‘대속’이라는 방식으로 이해했는지는 그의 생애를 말하지 않고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에 속한다. 예수가 벌인 하나님 나라 운동을 쏙 빼놓은 상태에서 보여주는 십자가의 처참한 수난은 일반에 '마술적인 대속'의 의미만 심어주기에 안성맞춤인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예수를 닮고 그가 걸었던 길을 따르려는 자들보다는, 인간으로서는 감히 범접하지 못할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얻은 대속과 부활의 영광을 누리려는 신앙적 이기주의자들만 양산시킬 것이 불 보듯 훤하다.

    벌써 복음서 자체에서 예수의 수난 이야기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만큼 예수의 수난이 그를 따르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음을 능히 짐작케 한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에서 그의 죽음을 우리 자신의 죽음으로, 그의 아픔을 우리의 아픔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흔히 억울하게 죽임 당한 의인을 추모하려는 자들은 넘쳐난다. 그를 죽인 자들마저 기회가 닿는다면 추모의 대열에 합류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예수와 같은 억울한 죽임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예수가 걸었던 정의와 평화의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려는 자들은 너무나 적다. 이것은 예수가 2천년이 넘도록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이유이다.  

    * 정병진 기자는 현재 여수에서 솔샘교회(http://solsam.zio.to) 담임 교역자로 일하고 있으며, 교회 내에 어린이 전문 도서관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댓글 4

  • Profile

    김바우로

    2004.04.06 16:20

    위 비평글에 커다란 이견 있습니다. 저도 이 영화를 봤습니다만....

    무엇인가 만들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보거나 사용하게 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서 어떤 정신적 노력의 산물을 바라볼 때에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만들어진 동기와 본래의 취지를 파악하려는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멜깁슨이라는 한 헐리우드 배우가 무엇때문에 이 영화를 만들었는 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대략 들어서 미루어 짐작하건데 그의 신앙심이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의심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순전히 영화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수도 있지요. 또는 감독이 표현하려고 하는 내용이나 방식이 관람자 개인적으로는 불편하거나 맘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영화에 관한한 그런 분에게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기의 생각을 다른 관람하지 않은 이에게 강요하지 말라구요. 제가 사실 영화나 서적의 비평과 평론을 때론 아주 극단적으로 하찮게 여기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자기만의 생각(단견일 수 있습니다)을 무책임하게 다른 이에게 선입견으로 심지 말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위의 비평을 쓴 분이 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으신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를 비평한 글에서도 이 두 작품을 아주 형편없는 영화로 폄하한 글을 여럿 보았습니다만 사실 두 영화를 보고난 제 느낌은 "아!! 이제 우리나라도 문화의 영역에서도 뭔가 해내고 있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관객이 바로 그 영화들을 대변해 주고 있지요.

    "Passion of Christ"도 볼 눈이 있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영화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사실 제 개인적으로는 그 이상입니다.

    음.... 글이 약간 과격하게 흘렀나요? 제가 남의 작품을 인색하게 평하는 것을 좀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서요...^^

    저와 같이 예수의 고난이 어떤 것인지 그저 성경내의 활자 속에서만 우아하게 이해하셨던 분들이 혹시라도 계시다면 이 영화를 보셔야할 이유가 있습니다.
  • Profile

    김바우로

    2004.04.06 16:38

    한가지 더...^^
    이 영화가 아람어와 라틴어로 되어있고 본래 계획은 미국에서 상영할 때에도 영어 자막조차 넣지 않으려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만일 성경을 한번이라도 읽은 사람이라면 이것이 필요 없다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습니다. 말을 못알아 들어도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는 별로 지장이 없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단 한번도 성경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난 성지주일에 노래로 봉독한 수난복음을 들으시고 함께 눈물을 흘리신 분이라면 이미 이 영화를 보실 필요가 없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바로 그 이야기이니까요.

  • Profile

    강인구

    2004.04.06 17:09

    바우로 의견에 백만 마흔 두표 던집니다.
  • 김장환 엘리야

    2004.04.07 08:22

    두분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저도 영화를 보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수난이 얼마나 가슴에 사무치도록 느껴졌는지, 참 우리의 신앙이 지식적이고 피상적인 것임을 회개했습니다.
    다만, 비평글에서 제기하는 의견 -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예수님이 걸어가시고 살아가신 그분의 삶을 우리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다분히 이 영화는 개인적 구원의 카타르시스에 머무를 수 있다는 생각에도 동의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의'와 '그리스도인의 의', 이 두 개념이 성취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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