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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년 9월 3일] 마르 7:1-8,14-15,21-23 야고보 1:17-27 위선자가 되지 않으려면
  • 청지기
    조회 수: 3134, 2006-09-04 19:25:06(2006-09-04)
  • 어느 회사에서 여직원 둘이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A라는 여직원이 친구로 입사한지 얼마 안 된 B라는 여직원에게 직장에서 겪는 속상한 마음을 털어 놓습니다. 자기가 모시고 있는 상사가 얼마나 깐깐하고 자신을 무시하는지 하루에도 12번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B는 A에게 자기 교회에 와서 믿음생활하면서 이겨내라고 전도하면서 덧붙이는 말이 ‘우리 교회에는 멋쟁이 장로님이 계신데, 너도 와서 한번 보면 존경하게 될 거야. 겸손하시고 친절하신 너무나 좋은 분이야’라고 자랑했습니다.
    한 층 쯤 올라갔을 때 한 중년신사가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두 여직원이 동시에 인사를 했습니다. 그 신사는 몇 층 더 가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두 여직원이 동시에 말합니다.
    “저 사람이 내가 말한 꼴 보기 싫은 내 상사야.”
    “어, 저 분이 내가 말한 인자하신 장로님인데.”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누구나 빠지기 쉬운 위험이 있습니다. 예화에 나오는 장로님처럼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믿는 하느님의 말씀이 일상의 삶에서 진리로 나타나지 않는 괴리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은 없는 것 말입니다. 본질은 상실하지 형식만 남아있는 신앙생활입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교회가 금요일 밤마다 기도회를 갖는 것을 다 아시죠?
    수요예배 시간에는 기도제목을 가지고 합심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금요일 밤 중보기도회는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기도합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기도제목들은 다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그 시간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통해서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기도의 제목을 듣고 기도합니다.
    평소에는 12분에서 15분이 모여 기도하는데, 그저께는 8분이 모였습니다. 찬양과 기도를 진행하다가 4명씩 두 조로 나누어 한 조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다른 한 조는 교회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하느님이 어떤 기도제목을 주셨는지는 홈페이지에 올려 져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 중에 오늘 나누고 싶은

    “너희 가운데 사랑에 굶주린 영혼들이 많이 있단다. 그런데 너희는 그 마음을 서로 돌아보지 못하고 있구나.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그 깊은 아픔을 나누고 보듬고 위로하는 것이 내 교회의 모습이어야 하는데, 너희 가운데 서로 보듬고 위로하고 하나되는 사랑이 부족하구나. 사랑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해 주렴. 서로 위하는 마음이 강물처럼 흘러넘치도록 기도해 주렴.”

    사랑의 공동체여야 하는 교회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우리의 교회의 모습을 아파하시며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간절한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겉과 속이 다른 대표적인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왔다가는 제자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곧 바로 예수님께 공박합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조상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부정하다’라는 말은 원래 거룩하지 않다는 세속적인 의미로 사용되던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여기에 예배에 속한 종교적 의미를 더하여 하느님 앞에서의 죄인이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마르코는 이들의 종교적 의식에 대하여 “3 원래 바리사이파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들은 조상의 전통에 따라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깨끗이 씻었고 4 또 시장에서 돌아 왔을 때에는 반드시 몸을 씻고 나서야 음식을 먹는 관습이 있었다. 그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았는데 가령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 같은 것을 씻는 일들이 그것이다.”는 주석을 달아 놓았습니다.

    여기서 ‘조상의 전통’이란 그 당시 성문화 되지 않은 구전 율법으로 유대인의 종교적 윤리 생활규범에 속한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은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한 삶을 위해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되어야 할 도덕적인 원리였습니다.

    70년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 중에 에즈라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에즈라가 바빌론에서 돌아왔는데, 그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 받은 모세의 법을 통달한 선비였다.”(에즈라 7:6) “에즈라는 야훼의 법을 깨쳐 몸소 실천할 뿐 아니라, 그 법령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에즈라 7:10)

    그래서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다인들은 에즈라를 중심으로 말씀의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열심히 율법을 배우고 그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성령 하느님의 기름부음이 사라지고 계명을 바르게 가르칠 능력을 가진 사람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성령님의 기름부음이 끊어졌던 신구약의 중간기는 수세기 동안의 하느님이 침묵하시는 암흑의 기간이었습니다. 이 기간에 유다인들은 수세기에 걸쳐 자신들의 권익을 위한 조항들을 첨부시켜 종교적 생활윤리로 확대하여 주후 3세기에 이르러서는 사람의 계명과 교훈인 미쉬나(mishnah) 라는 윤리 경전을 만들어냈습니다.

    오늘 이들이 예수께 나아와 항의한 것은 유대인으로서 식사 전에 반드시 행하여야 하는 사람의 계명과 교훈에 따른 정결의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정한 정결의식에 의하면 유대인에게 있어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하느님 앞에 나갈 때 손을 씻는 것과 같은 의미가 부여됩니다.

    그들은 외부에서 거룩하지 못한 부정한 것이 묻어서 몸에 들어온다고 생각하여 손과 발의 먼지를 털고 정해진 방법에 의해 손을 씻지 않으면 음식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만약 누구든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으면 그 사람에게는 악령이 침입하는 대상이라고 규정을 지었습니다.

    물론 식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는 것이야 위생상 좋은 습관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하느님 앞에 선과 악을 가르는 종교적 의미를 부과한다면 결국 이것은 인간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의 문제가 되고 맙니다. 결국 유대인에게 있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생활 습관을 넘어서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죄인으로 정죄하는 이단적 요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나 단호합니다. 7절과 8절의 말씀입니다.
    “이사야가 무어라고 예언했느냐?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친다.' 했는데 이것은 바로 너희와 같은 위선자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그 전통을 지킨다는 구실로 교묘하게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다.”

    율법과 전통들을 지키면서 하느님을 예배한다고 자부심을 갖던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마음은 멀리 떠나 있는 하느님을 헛되이 예배하는 위선자들이라고 지적하시는 겁니다.

    마음은 하느님을 멀리 떠나 하느님을 헛되이 예배하는 위선자들의 신앙체계를 율법주의라고 말합니다. 율법주의란 한마디로 말하면,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보다 종교적인 행위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신뢰합니다. 마음의 상태보다 외적인 복종을 강조합니다. 인격체이신 성령님보다 규례와 규칙을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개신교회 안에는 이런 유우머가 있다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40일 금식기도한 사람입니다.
    좋은 뜻으로 시작한 어떤 행위가 절대 기준이 되고 규범이 되어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전락해 버리는 경우입니다. 이때 대개 정죄 받는 사람은 죄인취급 닫게 되고 정죄하는 사람은 내가 너보다 이만큼 우월하다는 자만심, 자기 의를 누리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가리켜 위선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그들의 이중성을 꿰뚫어 보신 까닭이었습니다.

    위선이라는 단어가 그리스어로는 ‘휘포크리테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본래 배우를 가리키는 용어였습니다. 당시에는 인쇄술이 보급되기 전이어서 일반인들은 고전 작품을 극장에서 배우의 대사를 통해서만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일반인들에게 배우란 모두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휘포크라테스’라는 호칭 자체는 전혀 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똑같은 단어를 위선자라는 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배우는 자신이 외운 대사에 대해서 책임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대사대로 살아야 하는 의무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의 대사는 무대의 막이 내리는 것으로 끝나 버립니다.

    그러나 성도는 배우가 아닙니다. 성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말하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입니다. 만약 하느님의 말씀을 읊기만 하고 삶으로 살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는 배우일 수는 있으나 주님을 믿는 신자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배우라는 말은 결코 칭찬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곧 위선자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위선자입니다. 마음은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으면서 주님을 헛되이 예배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제자들이 손을 안 씻고 음식을 먹었다고 제자들이 부정한 사람인 죄인으로 단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들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주님 곁에 있는 제자들보다 마음으로 주님을 떠나 위선적인 삶을 살아가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더 더러운 죄인이라고 주님이 선언하십니다. 위선자들의 마음 안에는 온갖 악한 것들이 가득 차 있어 겉모양만 뻔지르르한 이런 위선자들을 주님은 ‘회칠한 무덤 같다’고 비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주님께 속해 있나요? 멀리 떠나 있나요?
    혹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해야 겉과 속이 같은 정직하고 진실한 신자가 될 수 있을까요?

    오늘 서신 야고보서가 그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18절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직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기로 결정하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이미 말씀하셨죠.
    마태오 4:4,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신자들은 황소가 있어도 예배를 선택하듯이, 눈앞에 빵이 있어도 진리 되는 말씀을 선택하는 자입니다.

    손해를 보거나 고난이 온다 해도 진리 되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진리로 태어난 자들이고 주님이 보기를 원하시는 자입니다.

    둘째 21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심으신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humbly accept the word planted in you, which can save you.”

    이미 우리는 수많은 주님의 말씀들을 들어 왔고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내 생각과 고정관념에 벽으로 인해 진리의 말씀이 내 인격의 중심인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마음으로 겸손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요한 1:12).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말씀은 곧 주님과 같이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경홀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예수님을 모시는 삶을 산다는 것은 바로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마음에 공손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말씀에 투자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T.V.나 인터넷, 기타 세상적인 것이 아닌 말씀에 투자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 내 삶에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내 마음의 중심에 들어오면 말씀은 나를 위선적인 삶에서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which can save you.
    위선적인 삶에서 진실된 삶으로 변화시킵니다.

    히브리서 4: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셋째 22절입니다.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기본자세는 “꾸준히 지켜 나가라”고 합니다(야고1:25).
    한두 번 말씀을 실천해 보다가 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삶으로 육화되기 까지 꾸준히 지켜 나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지난 주일에 제가 드린 설교의 본문과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리고 지난 주간 그 말씀대로 실천했습니까?
    이 질문에 즉각적으로 대답할 수 없다면 지난 주일의 예배는 그저 형식적으로 때운 예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찬양과 기도 가운데 눈물을 흘리는 감동을 느꼈을지라도 마음은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가 버린 헛되이 드린 예배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말씀을 지식적으로 알고 앵무새처럼 외운다고 할지라도 생활 속에서 반복하여 적용하지 않는다면 위선자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꾸준히 실천하는 사람, 반복해서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약속을 주십니다. 야고보서 1:25절입니다.
    “이렇게 실천함으로써 그 사람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축복이란 우리 인생의 형통함의 은혜를 누리는 삶입니다.  
    여호수아 1:7-8, “용기 백배, 있는 힘을 다 내어라. 그래서 내 종 모세가 너에게 지시한 모든 법을 한 눈 팔지 말고 성심껏 지켜라. 그리하면 네가 하는 모든 일이 뜻대로 되리라. 이 책에 있는 법이 네 입에서 떠나지 않게 밤낮으로 되새기며 거기에 적혀 있는 것을 어김없이 성심껏 실천하여야 한다. 그렇게만 하면 네 앞길이 열려 모든 일이 뜻대로 되리라.”

    주님은 우리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가 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심행일치, 지행일치, 언행일치, 말씀이 자신의 삶 안에서 통합된 정직하고 진실된 신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진리되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새로 태어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함께 찬양 드리고 기도합시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2006년 9월 3일                   마르 7:1-8,14-15,21-23 야고보 1:17-27

    위선자가 되지 않으려면

    어느 회사에서 여직원 둘이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A라는 여직원이 친구로 입사한지 얼마 안 된 B라는 여직원에게 직장에서 겪는 속상한 마음을 털어 놓습니다. 자기가 모시고 있는 상사가 얼마나 깐깐하고 자신을 무시하는지 하루에도 12번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B는 A에게 자기 교회에 와서 믿음생활하면서 위로받으라고  초대하면서 덧붙이는 말이 ‘우리 교회에는 멋쟁이 장로님이 계신데, 너도 와서 한번 보면 존경하게 될 거야. 겸손하시고 친절하신 너무나 좋은 분이야’라고 말합니다.
    5층 쯤 올라갔을 때 한 중년신사가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두 여직원이 모두 인사를 했습니다. 그 신사는 8층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동시에 말합니다.
    “저 사람이 내가 말한 꼴 보기 싫은 내 상사야.”
    “어, 저 분이 내가 말한 인자하신 장로님인데.”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누구나 부딪치게 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예화에 나오는 장로님처럼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믿는 하느님의 말씀이 일상의 삶에서 진리로 나타나지 않는 괴리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은 없는 것 말입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교회가 금요일 밤마다 기도회를 갖는 것을 다 아시죠?
    수요예배 시간에는 기도제목을 가지고 합심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금요일 밤 중보기도회는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기도합니다.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기도제목들을 다 내려놓고 하느님이 그 시간에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통해서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기도의 제목을 듣고 기도합니다. 저는 이 시간을 통해 우리 교회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목회의 방향을 잡아 갑니다.
    평소에는 평균 12~13분이 모여 기도하는데, 그저께는 8명이 모였습니다. 찬양과 기도를 진행하다가 4명씩 두 조로 나누어 한 조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다른 한 조는 교회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하느님이 어떤 기도제목을 주셔서 기도회를 진행했는지는 홈페이지에 올려 져 있습니다. 그 중 이 시간 나누고 싶은 주님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사랑에 굶주린 영혼들이 많이 있단다. 그런데 너희는 그 마음을 서로 돌아보지 못하고 있구나.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그 깊은 아픔을 나누고 보듬고 위로하는 것이 내 교회의 모습이어야 하는데, 너희 가운데 서로 보듬고 위로하고 하나되는 사랑이 부족하구나. 사랑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해 주렴. 서로 위하는 마음이 강물처럼 흘러넘치도록 기도해 주렴.”

    사랑의 공동체여야 하는 교회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우리의 교회의 모습을 아파하시며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간절한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겉과 속이 다른 대표적인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왔다가는 제자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곧 바로 예수님께 공박합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조상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부정하다’라는 말은 원래 거룩하지 않다는 세속적인 의미로 사용되던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여기에 예배에 속한 종교적 의미를 더하여 하느님 앞에서의 죄인이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마르코는 이들의 종교적 의식에 대하여 “3 원래 바리사이파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들은 조상의 전통에 따라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깨끗이 씻었고 4 또 시장에서 돌아 왔을 때에는 반드시 몸을 씻고 나서야 음식을 먹는 관습이 있었다. 그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았는데 가령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 같은 것을 씻는 일들이 그것이다.”는 주석을 달아 놓았습니다.

    여기서 ‘조상의 전통’이란 그 당시 성문화 되지 않은 구전 율법으로 유대인의 종교적 윤리 생활규범에 속한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은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한 삶을 위해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되어야 할 도덕적인 원리였습니다.

    70년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 중에 에즈라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에즈라가 바빌론에서 돌아왔는데, 그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 받은 모세의 법을 통달한 선비였다.”(에즈라 7:6) “에즈라는 야훼의 법을 깨쳐 몸소 실천할 뿐 아니라, 그 법령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에즈라 7:10)

    그래서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다인들은 에즈라를 중심으로 말씀의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열심히 율법을 배우고 그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성령 하느님의 기름부음이 사라지고 계명을 바르게 가르칠 능력을 가진 사람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성령님의 기름부음이 끊어졌던 신구약의 중간기는 수세기 동안의 하느님이 침묵하시는 암흑의 기간이었습니다. 이 기간에 유다인들은 수세기에 걸쳐 자신들의 권익을 위한 조항들을 첨부시켜 종교적 생활윤리로 확대하여 주후 3세기에 이르러서는 사람의 계명과 교훈인 미쉬나(mishnah) 라는 윤리 경전을 만들어냈습니다.

    오늘 이들이 예수께 나아와 항의한 것은 유대인으로서 식사 전에 반드시 행하여야 하는 사람의 계명과 교훈에 따른 정결의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정한 정결의식에 의하면 유대인에게 있어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하느님 앞에 나갈 때 손을 씻는 것과 같은 의미가 부여됩니다.

    그들은 외부에서 거룩하지 못한 부정한 것이 묻어서 몸에 들어온다고 생각하여 손과 발의 먼지를 털고 정해진 방법에 의해 손을 씻지 않으면 음식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만약 누구든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으면 그 사람에게는 악령이 침입하는 대상이라고 규정을 지었습니다.

    물론 식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는 것이야 위생상 좋은 습관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하느님 앞에 선과 악을 가르는 종교적 의미를 부과한다면 결국 이것은 인간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의 문제가 되고 맙니다. 결국 유대인에게 있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생활 습관을 넘어서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죄인으로 정죄하는 이단적 요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나 단호합니다. 7절과 8절의 말씀입니다.
    “이사야가 무어라고 예언했느냐?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친다.' 했는데 이것은 바로 너희와 같은 위선자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그 전통을 지킨다는 구실로 교묘하게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다.”

    율법과 전통들을 지키면서 하느님을 예배한다고 자부심을 갖던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마음은 멀리 떠나 있는 하느님을 헛되이 예배하는 위선자들이라고 지적하시는 겁니다.

    마음은 하느님을 멀리 떠나 하느님을 헛되이 예배하는 위선자들의 신앙체계를 율법주의라고 말합니다. 율법주의란 한마디로 말하면,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보다 종교적인 행위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신뢰합니다. 마음의 상태보다 외적인 복종을 강조합니다. 인격체이신 성령님보다 규례와 규칙을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개신교회 안에는 이런 유우머가 있다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40일 금식기도한 사람입니다.
    좋은 뜻으로 시작한 어떤 행위가 절대 기준이 되고 규범이 되어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전락해 버리는 경우입니다. 이때 대개 정죄 받는 사람은 죄인취급 닫게 되고 정죄하는 사람은 내가 너보다 이만큼 우월하다는 자만심, 자기 의를 누리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가리켜 위선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그들의 이중성을 꿰뚫어 보신 까닭이었습니다.

    위선이라는 단어가 그리스어로는 ‘휘포크리테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본래 배우를 가리키는 용어였습니다. 당시에는 인쇄술이 보급되기 전이어서 일반인들은 고전 작품을 극장에서 배우의 대사를 통해서만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일반인들에게 배우란 모두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휘포크라테스’라는 호칭 자체는 전혀 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똑같은 단어를 위선자라는 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배우는 자신이 외운 대사에 대해서 책임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대사대로 살아야 하는 의무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의 대사는 무대의 막이 내리는 것으로 끝나 버립니다.

    그러나 성도는 배우가 아닙니다. 성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말하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입니다. 만약 하느님의 말씀을 읊기만 하고 삶으로 살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는 배우일 수는 있으나 주님을 믿는 신자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배우라는 말은 결코 칭찬의 언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곧 위선자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위선자입니다. 마음은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으면서 주님을 헛되이 예배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제자들이 손을 안 씻고 음식을 먹었다고 제자들이 부정한 사람인 죄인으로 단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들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주님 곁에 있는 제자들보다 마음으로 주님을 떠나 위선적인 삶을 살아가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더 더러운 죄인이라고 주님이 선언하십니다. 위선자들의 마음 안에는 온갖 악한 것들이 가득 차 있어 겉모양만 뻔지르르한 이런 위선자들을 주님은 ‘회칠한 무덤 같다’고 비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주님께 속해 있나요? 멀리 떠나 있나요?
    혹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해야 겉과 속이 같은 정직하고 진실한 신자가 될 수 있을까요?

    오늘 서신 야고보서가 그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18절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직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기로 결정하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이미 말씀하셨죠.
    마태오 4:4,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신자들은 황소가 있어도 예배를 선택하듯이, 눈앞에 빵이 있어도 진리 되는 말씀을 선택하는 자입니다.

    손해를 보거나 고난이 온다 해도 진리 되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진리로 태어난 자들이고 주님이 보기를 원하시는 자입니다.

    둘째 21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심으신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humbly accept the word planted in you, which can save you.”

    이미 우리는 수많은 주님의 말씀들을 들어 왔고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내 생각과 고정관념에 벽으로 인해 진리의 말씀이 내 인격의 중심인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마음으로 겸손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요한 1:12).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말씀은 곧 주님과 같이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경홀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예수님을 모시는 삶을 산다는 것은 바로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마음에 공손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말씀에 투자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T.V.나 인터넷, 기타 세상적인 것이 아닌 말씀에 투자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 내 삶에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내 마음의 중심에 들어오면 말씀은 나를 위선적인 삶에서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which can save you.
    위선적인 삶에서 진실된 삶으로 변화시킵니다.

    히브리서 4: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셋째 22절입니다.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기본자세는 “꾸준히 지켜 나가라”고 합니다(야고1:25).
    한두 번 말씀을 실천해 보다가 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삶으로 육화되기 까지 꾸준히 지켜 나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지난 주일에 제가 드린 설교의 본문과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리고 지난 주간 그 말씀대로 실천했습니까?
    이 질문에 즉각적으로 대답할 수 없다면 지난 주일의 예배는 그저 형식적으로 때운 예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찬양과 기도 가운데 눈물을 흘리는 감동을 느꼈을지라도 마음은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가 버린 헛되이 드린 예배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말씀을 지식적으로 알고 앵무새처럼 외운다고 할지라도 생활 속에서 반복하여 적용하지 않는다면 위선자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꾸준히 실천하는 사람, 반복해서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약속을 주십니다. 야고보서 1:25절입니다.
    “이렇게 실천함으로써 그 사람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축복이란 우리 인생의 형통함의 은혜를 누리는 삶입니다.  
    여호수아 1:7-8, “용기 백배, 있는 힘을 다 내어라. 그래서 내 종 모세가 너에게 지시한 모든 법을 한 눈 팔지 말고 성심껏 지켜라. 그리하면 네가 하는 모든 일이 뜻대로 되리라. 이 책에 있는 법이 네 입에서 떠나지 않게 밤낮으로 되새기며 거기에 적혀 있는 것을 어김없이 성심껏 실천하여야 한다. 그렇게만 하면 네 앞길이 열려 모든 일이 뜻대로 되리라.”

    주님은 우리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가 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심행일치, 지행일치, 언행일치, 말씀이 자신의 삶 안에서 통합된 정직하고 진실된 신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진리되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새로 태어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함께 찬양 드리고 기도합시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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