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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년 4월 16일] 요한 20:1- 죽어도 죽지 않는 길을 살아 가는 삶
  • 청지기
    조회 수: 3106, 2006-04-17 09:30:29(2006-04-17)
  • 2006년 오늘 부활절은 한국 교회의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것입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진보적 성향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보수적인 성향의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있는데, 이 두 단체가 올해 부활절예배를 연합으로 드리기로 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치를 끌어내는 데 있어서 우리 대한성공회가 역할을 한 것에 뿌듯함을 갖게 됩니다.

    성공회 서울교구장 박경조주교님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의장으로 계시는데, 교회의 연합과 일지를 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시면서 한국교회가 분열과 갈등을 넘어서는 일치와 협력의 시대로 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오후 3시에 잠실에서 박경조주교님의 환영사와 조용기목사님의 설교로 역사적인 연합예배가 드려집니다. 보수적인 여의도 순복음교회 당회장 조용기목사님 설교문의 초고를 진보적인 민중신학자 한신대학원장 채수일박사가 작성한다는 것 자체가 이제 한국교회가 진보와 보수를 뛰어넘어 일치로 나아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가 그 역사적인 자리에는 함께 하지 못하지만, 한국교회의 일치의 모습을 보며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고등종교는 인간의 죽음 이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만약 인간에게 죽음이 없었다면 종교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종교로는  기독교와 불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 조상들 모두의 종교는 불교일 것입니다.
    저 역시 어렸을 때 사월초파일 연등을 달려 절에 갔었고 기와에 이름을 적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된 이래 1천 6백여년 동안 한국 사회의 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것이 불교입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나라 역사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불교를 믿는 신자가 아니라, 선교 역사가 130여년 밖에 안 되는 기독교를 믿는 신자입니다.

    제가 기독교를 믿는 이유는 오직 기독교에만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은 로마의 바티칸 궁정에는 유명한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피에타 (Pieta)라는 조각품 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시신을 성모 마리아가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조각한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조각상 입니다.
    성가 79장의 감동! 죽음이 인생에 가져오는 아픔은 실로 큰 것입니다.

    원래 사람은 죽지 않는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범죄함으로 인간은 하루아침에 죽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법에 죄의 대가는 죽음이기에 죄인인 인간은 모두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인생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도 생명도 모두 코끝에 달려 있습니다.

    이사야 2:22, “다시는 사람을 믿지 마라. 코에 숨이 붙어 있을 뿐, 아무 보잘것없느니.”

    이 세상 모든 인생은 실로 자기 코끝에 죽음을 매달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이렇듯 가까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렇듯 죽음을 코끝에 매달고 있으면서도 마치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 속에서 하루하루 무의미하게 죽어가는 인생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읽었던 책 중에 ‘매듭짓기’라는 책에서 죽음의 실체를 잘 묘사하고 있어 인용하여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비록 중환자실에 의식이 없이 누워있을 지라도 그 사람의 코에 호흡이 붙어 있는 한 우리는 그를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코의 호흡이 멎는 순간 호칭은 시체로 바뀝니다. 불과 1초 전까지는 사람이었는데 순식간에 시체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과 시체의 차이는 큽니다.

    사람으로 있을 때는 언제나 사람들과 더불어 있지만, 시체가 되는 순간 격리의 대상이 됩니다. 영안실의 냉동실로 들어가 버립니다. 의식이 없는 중환자였을 때는 가족에게 둘러 싸여 있었지만, 시체가 되는 순간 완전히 분리되어져 버립니다.

    또 살아있을 때는 입는 옷을 의복이라고 부르는데, 시체가 되는 순간 그 옷을 수의라고 부릅니다. 의복과 수의 근본적인 차이는 옷감의 재질이 다르겠지만, 산 사람의 의복에는 주머니가 있는데, 시체의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습니다.

    죽은 시체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설령 내가 수백억을 쌓아 두었다 해도 시체가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내가 남긴 재물은 사람들 사이에 처절한 재산 싸움만 일으킬 뿐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재벌가의 경우, 세상을 떠난 총수의 자식들이 화목한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한화, 한국화약이 우리 성공회 신자 집안인데 김승연회장과 그 동생 김호연 사이에 처절한 재산 싸움이 있었습니다.

    수년 전 세상을 경악하게 했던 보도에 의하면, 세상을 떠난 아버지로부터 4천5백만원의 유산을 받은 두 아들이 있었는데 요즈음의 경제 규모로는 작은 돈입니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큰 아들은 2/3, 작은 아들은 1/3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친 후 큰 아들이 작은 아들의 지분을 주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던 동생이 형에게 자기의 지분을 달라고 요구하자 형은 돈을 주겠다고 동생을 자기 차에 태우고 서울을 출발하여 경남 양산으로 갔습니다. 아무 영문도 모르고 따라 온 동생을 산으로 끌고 가 인적이 드문 곳에서 살해한 뒤 동생의 열 손가락을 모두 절단해 버렸습니다. 혹 시체가 발견되더라도 지문 감식을 통한 신원조회가 불가능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토록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사람이 누구입니까? 친형이었습니다. 왜? 1천 5백만원 때문에.

    이처럼 부모의 유산을 둘러싼 자식들의 처절한 재산 싸움은 재벌가만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습니다. 일평생 재물만을 삶의 목적으로 살아온 부모의 자식이라면 그들의 삶의 목적도 재물에 있을 것이기에 부모가 죽어 시체가 되는 순간부터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재산을 차지하려고 어떤 형태로든 서로 대립하고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혹 나에게는 자식이 한명뿐이어서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안심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부모가 물려주는 유산이 인생의 수고와 땀의 의미를 알 까닭이 없는 자식의 일생을 망쳐버린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코끝에서 호흡이 멈추면 시체가 되고 수의를 입게 됩니다. 그리고 땅에 묻히거나 불에 살라져 한 줌의 재가 되는 것이 죽음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더욱 처절한 실체는 죽음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히브리 9장 27절 말씀처럼, 사람이 한번 죽은 것은 정한 이치인데 죽음 뒤에는 심판이 있고 그 심판에 따라 영원한 죽음인 지옥과 영원한 생명인 천국이 갈라지는 것이 또한 진리입니다.
    그러니 참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으로 하여금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죽음의 형벌을 대신 받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해 친히 죄인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죽음의 형벌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여전히 죄인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신 예수님 안에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구주가 되실 수는 없습니다. 죄의 형벌에 관한 문제는 해결하셨을지라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죽음의 문제는 여전히 미결의 과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죽은 지 사흘 째 되는 날, 죽음을 깨뜨리고 다시 살리셨습니다. 일시적으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다시 살아나는 참 생명과 영원한 생명의 부활이었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6:23,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그 누구라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 안에 거하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는 것은 물론이요 참되고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예수님만이 인생의 근본문제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십자가와 부활로서 해결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내가 기독교인이 될 이유도 없고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전체를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변증하는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요, 진실이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 증거로 예수님은 성경대로 살아났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3절입니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액시던트(accident)가 아닙니다. 어쩌다 일어난 사고나 돌발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예고된 일입니다. 수백 년 전부터 구약의 선지자들이 영감을 받아, 장차 이 세상에 오실 하느님의 아들이 죽음을 이기고 살아날 것을 여기 저기 예언해 놓았습니다.

    이렇게 성경대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진실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부활하셨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증언은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경 밖의 증거 필요합니다.

    그래서 바울로는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이 많다고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변화된 인생들을 말합니다.

    5절 이후에 보면 바울이 대충 언급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베드로를 위시해서 500여명이나 되는 제자들과 끝까지 예수를 믿지 않으려고 버티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까지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다 목격자들입니다.

    한 두 사람이 보았다고 말해도 함부로 의심할 수가 없거늘, 수백 명의 사람들이,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면, 누가 이것을 거짓말 이라고 꾸며낸 이야기라고 부인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이만큼 확실한 것입니다.

    또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자기 자신의 간증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제일 마지막에 본 사람이 누군가?’ 라고 묻는다면 바울 자신이라고 간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 하려고 이를 갈면서 다메스커스로를 향해 가던 사람입니다. 그 때 갑자기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찾으셨습니다. 그는 그의 영광스러운 빛 앞에 거꾸러졌습니다. 간신히 눈을 뜨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아무도 없는데 누구냐고 물었겠습니까?
    아니죠. 분명히 바울만이 본 예수님의 실체가 있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드디어 사도 바울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실히 증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간증자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진실입니다.

    하지만, 불교 신자들도 역시 2천 5백년동안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생이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증거가 바로 오늘 복음의 빈 무덤이야기입니다.
    어떤 종교이든 교주의 무덤을 갖고 있습니다. 무덤의 크기가 마치 종교의 권위를 나타내 주는 것처럼 그 위용을 자랑합니다. 만약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 예루살렘 어딘가에 제자들이 정성을 다해 조성해 놓은 거대한 무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무덤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덤의 핵인 시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으로 주장하는 천주교의 성지와 개신교의 성지가 다릅니다. 이 그림은 개신교의 성지인 빈 무덤인 ‘가든 툼’입니다.

    이 빈 무덤의 증언, 부활의 증언이 지난 2,000년 동안 무너지지 않고 전파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진실이기 때문에 복음이 지금도 땅 끝까지 증거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지금도 북한을 비롯하여 중국에 있는 지하 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자기 생명을 내어놓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진실이기 때문에 지금도 지구상에 있는 수십억의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릎 꿇고 경배하고 있습니다.

    꾸며낸 이야기에 누가 생명을 걸겠습니까?
    꾸며낸 이야기에 누가 변화를 받을 수 있습니까?
    진실이기 때문에 지난 2,000년 동안 그리고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라는 신앙의 신비가 계속 선포될 것입니다.

    살아계신 그 분이 오늘도 계시기에 그 이름 만 불러도 귀신이 쫓겨 나가고, 그 이름만 불러도 병든 자가 나음을 입고, 그 이름만 불러도 영적으로 죽었던 자가 구원 받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렇듯 주님의 부활은 역시적인 사실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능력이 실재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물건을 놓았을 때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만유인력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인력보다 더 큰 힘을 (반대방향으로) 가하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모든 인생을 죽음으로 몰고 가던 죄의 권세보다 더 큰 부활의 능력이 그를 죽음으로부터 참 생명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기만 하면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의 위력이 어떤 것인지를 다음 두 이야기를 들으며 깨달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느 전도사님의 간증입니다.

    어느 재력가의 집안에 따님이 암에 걸려 투병 중에 있었습니다. 환자는 크리스챤이 아니었지만, 가족 중에 믿는 사람이 있어서 안타까움 중에 전도사님의 심방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미 유명한 목사님들이 여러분 다녀갔지만, 치유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환자는 죽음 앞에서 깊은 절망감에 빠져 시름하고 있었습니다.
    전도사님이 서울대학교 특실의 문을 여니 환자는 비단 수건을 두른 채 병상에 누워 주사를 맞고 있었고 가족들은 그 주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가족 중의 한명이 전도사님을 소개하니 귀찮다는 듯 벽 족으로 돌아누웠습니다. 보기도 싫다는 뜻이었습니다.
    어색한 분위기에 남편은 “여보, 의사 선생님 이번 항암제 투여를 마치면 현저하게 좋아질 것이라고 합디다. 힘을 내시오.”
    다른 가족들도 격려하며 거들었지만, 아무런 대꾸가 없었습니다.
    이에 전도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인, 지금 부군과 자녀들은 이번 항암주사를 맞으면 회복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인은 그 말을 정말 믿으십니까? 부인이 아무리 항암 주사를 맞아도 부인은 반드시 죽습니다.”

    보기 싫어 돌아누웠던 부인은 “당신은 반드시 죽는다.”는 말에 고개를 돌렸고 눈이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부인, 저는 가족들처럼 부인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살려 달라고 기도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나는 부인에게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오늘도 이 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그들이 부인보다 부족하거나 모자라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한번 부르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항암주사를 맞아도 부인 역시 반드시 죽는 것입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부인이 말합니다./
    “그럼 난 어떡해야 합니까?”
    “모든 사람은 다 죽지만, 그러나 죽어도 죽지 않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가십시오.”

    그리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졌고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녀는 그 다음 날 퇴원하였습니다. 항암 주사를 맞으며 아무 의미 없이 죽어가는 시간을 의미 있는 되살렸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성경 태이프를 들으며 말씀의 거울 앞에서 누군가에 대해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 즉시 그 사람을 불러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렇게 석달을 살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살다가 그 석달은 이전의 삶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삶 - 부활하신 예수님의 참 생명이 들어와 영원한 생명을 시작한 삶이었습니다.

    이 다음 언젠가 우리 모두 천국에서 이 여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육체의 임종을 앞둔 사람만이 하느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부활절 무렵, 영국의 한 마을에 신부님이 새로 부임을 해 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새로운 목사님의 설교에 관심을 기울이며, 하나 둘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드디어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바닷가 마을에 어머니를 여읜 소년과, 그 소년을 목숨보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었지요. 어느 날, 소년은 소년의 친구와 바닷가에 놀러갔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높은 파도와 강한 바람에 둘이 타고 있던 배에, 금세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등대지기였습니다. 등대에서 바라보다가 아들이 탄 배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가까운 곳에 매어둔 보트에 몸을 싣고, 아들이 있는 쪽으로 힘껏 노를 저었습니다.
    아들에게로 갔지만 아버지는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이 아들이 탔던 배는 뒤집혀 파도에 휩쓸려 가벼렸고, 자기가 탄 보트에는 한 명 밖에 더 태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둘을 모두 태우면 배가 뒤집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미 아들의 친구는 포기한 얼굴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가, 이내 손을 거두었습니다.
    아들은 놀란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았습니다.
    ‘미안하다. 아들아, 너는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지만, 네 친구는 아직 주님을 안 믿잖니.....’
    아들은 아버지를 한참 바라보더니 이내 미소를 뛰었습니다.
    ‘그래요.  아빠.  천국에서 만나요.’
    아버지는 배에 아들의 친구를 태우고,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지 못한 채 있는 힘껏, 육지까지 노를 저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끝이 났고, 그의 눈은 촉촉이 젖어 있었습니다.
    찬송가가 시작되는데, 교회 뒤쪽에 앉은 동네 불량배 몇 명이, 자기들끼리 소곤거렸습니다.
    “뭐야.  저런 이야기. 다 지어낸 거잖아. 어떻게 믿겠어.”
    그때 그들의 뒤에 앉아서 그윽한 눈으로 설교를 듣던,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나직이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네.  젊은이들. 내가 그 아버지고, 저기 서 있는 목사가 바로 내가 구한 아들의 친구라네.”>

    이 간증을 준비할 때가지는 깊게 와 닿지 않았는데, 새벽녘 꿈을 꾸었는데, 잠에서 깬 후 다가온 메시지가 ‘네가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겠니?’
    여러분, 여러분이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 안에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천국의 영원한 생명이 내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죽음일지라도 우리는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하물며 죽음보다 하찮은 인생의 문제들에게 우리는 굴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고 천국의 소망이 있기에 이 땅에서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정직한 삶, 이기적이지 않은 섬김의 삶,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부활의 능력으로 승리하시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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