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대한성공회 제자교회대한성공회 제자교회

  • [2010년 6월 6일]왕상 17:17-24, 시편 30, 루가 7:11-17
  • 청지기
    조회 수: 1975, 2010-06-07 10:24:32(2010-06-07)
  •   남편을 잃고 외아들만을 의지하며 고달픈 삶을 사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외아들이 건강하게 자라나서 의젓한 사회인이 되는 것 말고는 별 다른 희망이 없는 여인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용하다는 의사를 찾아다니고 좋다는 것을 다 해서 먹여보아도 차도는 없고 병세는 더 심해져만 갔습니다.

      ‘무슨 죄를 지었길래 하느님이 노하셔서 남편도 잃고 아들마저 저리 몹쓸 병이 들었을까?’

      이렇게 한 마디씩 던지는 동네 사람들의 말에 여인의 마음은 찢어지듯 아프기만 합니다. 하느님께 저주받은 기구한 운명같아 아들이 죽으면 따라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나자렛 출신의 예수라는 사람이 병자들을 고쳐주고 마귀를 쫒아내며 하느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여인의 마음에 마지막 희망같은 간절함이 솟아났습니다.

      ‘하느님! 예수라는 사람이 제발 우리 마을에 오게 해 주셔서 죽어가는 우리 아들이 예수라는 사람을 만나게 해주세요.’

      아들을 간호하면서 여인이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는 하느님께 올려드리는 간절한 기도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끝내 아들은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건만....하느님이 나를 버리셨구나...’
      
      참 불쌍한 여인의 운명입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과부였습니다. 당시 유대 여성들은 사회 참여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여자들은 철저히 가정적이어야 하고, 자녀 교육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직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경제력이 없습니다. 과부들은 이삭을 주워서 먹고 살아야 할 만큼 가난했습니다(신24:19). 그렇기 때문에 유대 여자들에게 있어서 남편의 죽음은 자기 인생의 사형선고와 같은 것입니다.

      이런 처지의 여인이 오직 아들에게만 소망을 두고 고난도, 가난도 이겨 왔습니다. 자기야 고생이 되어도 자식이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면 고생이 고생이 아니고, 보람이었습니다. 고생 끝에 어느덧 커서 청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결혼도 시키고 며느리도 보고, 손자도 보고 행복하게 살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이 여인보다 더 불쌍하겠습니까?

      유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무더운 지방이라 당일에 장사를 지냅니다. 유대인의 장례식은 우리나라와 비슷합니다. 온 동네 행사가 됩니다. 유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큰 소리로 곡을 하며 옷을 찢기도 하고(2사무엘 1;11) 베옷을 입었습니다(2사무엘 3:31). 또 흙이나 재를 머리에 끼얹으며 곡을 하기도 했습니다(미 1:10). 또 자기의 살을 베어서 상처를 내기도 하였습니다(예레 16:6).  

      그리고 피리를 부는 자들을 데려다가 피리를 불며 그들의 슬픔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마태 9:23). 장례 때에는 피리 부는 자와 가까운 가족과 친척들은 상여 앞에 가며 곡을 하고 또 상여 뒤에는 곡을 하는 사람들이 뒤를 따르며 울고, 조가를 부르는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이것이 유다인의 장례 모습입니다.

      이제 죽은 아들을 관에 넣고 천으로 덮은 후에 무덤을 향해 갑니다. 여인을 위로하는 동네 사람들 긴 장례행렬을 이루어 성문을 이제 막 나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성을 향해 오는 또 다른 행렬과 이 장례 행렬이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성 밖으로 나오는 행렬은 죽은 젊은이를 따르며 곡을 하는 장례행렬입니다. 성을 향해 오는 사람들의 행렬은 기쁨이 가득한 예수님을 따르는 행렬이었습니다.

      참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이렇게 희비가 엇갈리며 살게 되는 것이 우리의 인생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건이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어둠은 빛이 임하면 사라집니다. 생명의 주인 예수님이 오시었으니 이제 죽음이 사라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련한 과부를 보신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에 여인에게 ‘울지 말라’ 하시며 위로해 주십니다. 그리고 상여 앞으로 가시어 상여에 손을 대십니다. 장례행렬이 멈추어 섰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놀라운 선포를 하십니다. “젊은이여 일어나라” 이 명령에 죽은 아들이 관에서 벌떡 일어나 말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스토리 앞에는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하인의 병을 고치시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루가 7:1-10). 그 가운데 아주 유명한 고백이 적혀 있습니다.

      예수님이 백인대장이 보낸 사람들의 청을 듣고 백인대장의 집을 향해 가는데, 친구를 통해 보내온 편지 글에 적힌 백인대장의 말입니다.
      
      루가 7:6-8, "주님, 수고롭게 오실 것까지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만한 사람이 못 되며 감히 주님을 나가 뵐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 저도 남의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에도 부하들이 있어서 제가 이 사람더러 가라 하면 가고 또 저 사람더러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종에게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
      
      백부장의 이 믿음대로 하인은 나음을 입었습니다. 바로 그 주님이 말씀 한 마디로 죽었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10:9,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로마서 16:31,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네 집안이 다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이란 우리의 전인격적인 구원을 말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그의 이름을 부르면 죽었던 나의 영혼이 다시 살아나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이 되는 구원을 받습니다.
      또한 예수의 이름으로 질병이 치유받고 인생의 막힌 문이 열립니다.
      인생을 묶고 있는 결박들이 풀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아들이 살아남으로 삶이 회복된 과부의 구원은 우연이었을까? 나인성문 밖에서 예수님과 과부의 만남은 우연이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삶은 언제나 하느님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삶이었습니다. 기도 가운데 성령으로 인도받는 삶이었습니다.

      성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moved by the Spirit.
      
      나인성은 가버나움에서 하루거리에 있는 엘리야가 하느님께 기도해서 과부의 아들을 살렸던 시돈 지방과 가버나움 사이에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먼 나인성으로 발걸음을 옮기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느님께서 죽은 아들로 인해 슬퍼하는 여인을 위로하고 그 죽은 아들을 살리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여인의 간절한 기도를 하느님이 외면하지 않으시고 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편 30편이 바로 이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6-7절, “마음 편히 지내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이제는 절대로 안심이다 하였는데 나를 어여삐 여기시고 산 위에 든든히 세워주시던 야훼께서 얼굴을 돌리셨을 때에는 두렵기만 하였사옵니다.”

      인생이 항상 평탄하지마는 않습니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고난과 어려움이 반드시 있습니다. 마치 하느님이 떠난 것과 같 절망의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믿음의 사람들은 하느님 앞에 나갑니다.
      2, 야훼, 나의 하느님, 살려주십시오.
      8, 야훼여, 이 몸은 당신께 부르짖었고, 당신께 자비를 구하였습니다.
      10, 야훼여, 이 애원을 들으시고 불쌍히 여겨주소서. 야훼여, 부디 도와주소서.

      그러면 반드시 하느님은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2, 내 소리를 들으시고 병들었던 이 몸을 고쳐주셨습니다.
      3, 야훼여, 내 목숨 지하에서 건져주시고 깊은 구렁에 떨어지는 자들 중에서 살려주셨습니다.
      11, 당신은 나의 통곡하는 슬픔을 춤으로 바꿔주시고 베옷을 벗기시고 잔치옷으로 갈아 입히셨사옵니다.

      이렇게 기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시는 구원의 통로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인생에 죽음과 같은 고통이 있습니까?
      지금은 안심이다 마음 편하지만 혹 예기치 않은 고난의 때가 닥쳐올 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들으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고통 중에 있는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멈추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만져주십니다.
      주님은 그 모든 상황을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만을 사랑하며 찬양하며 살 것입니다.

      장례의 행렬은 예수님의 행렬같은 축제의 행렬로 바뀌었습니다.
      루가 7: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셨다."고 말하기도 하였고 또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와 주셨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시편 30:12, 내 영혼이 끊임없이 주를 찬미하라 하심이니 야훼, 나의 하느님, 이 고마우심을 노래에 담아 영원히 부르리이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우리에게는 응답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 인생이 오직 주님을 찬양하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사 42:8, 나는 야훼다. 이것이 내 이름이다. 내가 받을 영광을 뉘게 돌리랴? 내가 받을 찬양을 어떤 우상에게 돌리랴?
      이사 43:7, 그들은 내 백성이라고 불리는 것들, 나의 영광을 빛내려고 창조한 내 백성, 내 손으로 빚어 만든 나의 백성이다.
      이사 43:21, 내가 친히 손으로 빚은 나의 백성이 나를 찬양하고 기리리라.

      기도함으로 주님을 더 깊게 만나고 오직 주님께만 찬양을 드리는 회복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댓글 0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298 청지기 1920 2010-08-05
297 청지기 1427 2010-07-26
296 청지기 1763 2010-07-13
295 청지기 1706 2010-07-05
294 청지기 1452 2010-06-28
293 청지기 2473 2010-06-21
청지기 1975 2010-06-07
291 청지기 1762 2010-05-31
290 청지기 1706 2010-05-24
289 청지기 2476 2010-05-24
태그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